2024년 3월 14일 목요일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 왕위다툼을 벌인 왕건의 아들들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나라를 안정시킨다는 이유로 권력이 있는 지방 호족의 딸과 결혼을 하여 인척관계를 맺는 혼인 정책을 펼쳤다. 이 때문에 무려 25명의 배다른 형제를 둔 왕건의 아들들은 왕 자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면서 왕건 사후(死後) 한동안 왕권이 불안정할 수 밖에 없었다.

왕건이 죽고 난 뒤 943년 왕건의 둘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의 아들 왕무가 2대 왕 혜종이 되었지만, 오씨는 다른 후궁들에 비해 세력 기반이 약해 혜종의 정치적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왕건도 살아생전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왕무를 태자로 삼으면서 측근들에게 "태자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하지만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왕건의 셋째 부인인 신명 순성왕후 유씨의 아들 왕요·왕소 형제는 혜종이 왕이 된 이후에도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노렸다. 어머니 유씨가 충주의 힘 있는 호족이자 장군인 유긍달의 딸이었기에 왕요와 왕소를 왕으로 만들려는 세력은 점점 더 야심을 품게 되었다.

이에 혜종의 측근들은 "왕요 형제가 왕위를 넘보고 있으니 이들을 애초에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혜종은 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맏딸을 왕소에게 시집 보내 그들을 달래려 했다. 하지만 왕요 형제의 위협은 계속되었고, 이에 시달리던 혜종은 왕이 된 지 2년 4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혜종의 죽음에 대해 여러 학자들은 혜종이 왕요 형제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고려사\에는 혜종이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병 이름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혜종이 살해 위협을 걱정하며 늘 군사를 시켜 자신을 호위하게 한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타살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혜종이 죽은 뒤 왕요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3대 왕 정종이 되었지만,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 왕소가 4대 왕 광종이 되었다. 광종은 과거제도와 노비안검법(노비해방)을 도입해 외척과 지방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면서 고려 왕실을 안정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광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수많은 신하를 숙청하고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을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정치를 펼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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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 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 광해군의 실리외교 1편

서인이 광해군을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이다. 광해군은 정치 개혁 측면에선 분명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지만, 무리한 정치 보복으로 비판을 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 감각만큼은 조선 역사상 가장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던 왕 중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동아시아는 매우 정세가 불안정했다.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워 주변 국가를 위협했는데, 특히 명나라 입장에서 후금의 탄생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탄생지가 명나라의 변방(邊方)인 만주 땅인데다가, 후금의 성장은 명나라에 커다란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중원의 지배자 명나라가 만력황제의 방탕, 조선 파병으로 인한 국력손실 등으로 쇠락해가고 있던 즈음, 명의 지배를 받고 있던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급격히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8기제 등 강력한 전술 전략을 바탕으로 인근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대금(후금)을 건국한 후 1618년에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해 왔는데, 당시 조선 사대부들의 생각은 천자의 나라, 아버지의 나라에서 도움을 요청할 땐 죽어도 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후 복구 사업에 전력을 다하고 있던 광해군에게 명나라의 이 제안은 참으로 난감하기만 했다. 당시 조선에게 시급한 문제는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의 후폭풍을 앓고 있던 국내 정세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신하 대다수가 명나라는 조선이 받들어 모시는 ‘부모의 나라’이자, 임진왜란 때 도와준 은혜가 있으니, 명의 요청을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임진왜란 때 왕세자로서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했던 광해군은 명나라의 약해진 국력과 더불어 신흥 강국으로 성장하는 후금의 힘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의 기세가 오히려 명나라를 압도한다고 보고 명나라의 요구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명나라는 당시 국내에 반란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내부적으로 매우 힘든 상태였고, 후금은 새롭게 일어나는 신흥(新興) 강국(强國)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상태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며 후금을 맞상대했다가는 조선에게 매우 큰 피해가 올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전통적인 우방국인 명의 파병 요청을 거부할 명분은 없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위기에 빠진 조선을 위해 대대적인 병력을 파병해준 ‘은혜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조정의 거의 모든 신료들은 파병에 응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신하들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자 비변사의 신하들은 태업(怠業)을 하였고, 영의정 박승종은 아예 병(病)을 이유로 집에 틀어박히는 등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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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9편

■ 광해 9편

■ 광해 9편

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라는 ‘원죄’ 때문에 조선시대의 여러 기록 등에 남아있는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광해군은 조선의 다른 왕들과 달리 연산군과 함께 ‘조(祖)’와 ‘종(宗)’으로 칭해지는 묘호(廟號:임금의 시호)마저 부여받지 못한 채 ‘군(君)’이라는 왕자 시절의 호칭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묘도 ‘릉’이라고 칭해지는 다른 왕들의 무덤과는 달리 ‘광해군묘’로 지칭된다. 연산군이야 검증된 폭군이므로 그리 억울할 것도 없겠지만, 광해군의 경우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존재하는 왕이므로 연산군과 같은 위치의 폭군으로 취급되는 점은 분명 억울할 수 있다. 이런 인식 때문에 최근에는 광해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광해군이 왕통 강화를 위해 무리수를 둔 점은 분명하지만, 내정 개혁이나 외교 부분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구습을 타파하고 피폐된 국토를 재건하기 위해 내정을 충실히 했으며,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에 적응하려 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그의 개혁과 혁신을 위해 치도(治道)의 이론을 제공한 인물은 정인홍이었다. 정인홍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를 물러가게 하고, 우리의 군사로 우리의 강토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부패한 관리들을 매섭게 처단했으며, 후금과의 관계에서도 중립적이고 실리적인 태도를 건의했다.

광해군은 정인홍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혁신정치를 폈지만, 이런 과정에서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을 제거하는 데에 덕치(德治)를 벗어나는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간신인 이이첨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일을 그르친 경우도 있었다. 반정(反正)이후 서인 주도의 모든 기록들은 온갖 잔일을 들추어 광해군을 헐뜯었고, 심지어 인목대비는 “선조를 독살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광해군을 받들던 대북파가 몰락하여 그를 옹호할 세력이 없었다는 점도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과도 비슷한 상황에서 광해군이 보여준 유연하고 능동적인 실리외교는 당시 조선에서 반드시 필요했던 탁월한 외교 정책이었고, 전후 복구 사업은 오랜 전란 후유증으로 살기 힘들었던 조선 백성들에게 유효적절한 민생안정정책이었다. 만약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더라면 후금과의 전쟁을 치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우리나라는 안정적인 발전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백성의 삶도 더 편안하지 않았을까? 과연 광해군은 짐승의 탈을 쓴 패륜아에 불과한 것일까? 국제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여 현실적으로 적절히 대처하려 했던 명군주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국가나 백성들의 안위보다는 당쟁(黨爭)만을 일삼던 그 시대가 만든 비운의 왕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아 여러 가지 뼈아픈 아쉬움이 남는다.

광해군부부의 무덤은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고,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서글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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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8편

■ 광해 8편

■ 광해 8편

광해군은 유배기간 중 몇 번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긴다.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된 바 있던 인목대비는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인조 세력 역시 왕권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몇 번이나 그를 죽이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반정 이후 다시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의 반대와 내심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살해 기도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 실어 태안으로 이배(移配:귀양지를 옮김)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데려왔다.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으며, 이 때 서인 계열의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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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제주 땅에서도 초연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이어갔다.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上房)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고 호칭하며 멸시해도 전혀 이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말 한마디 없이 굴욕을 참고 지냈다. 이렇듯 초연하고 관조적인 그의 태도가 생명을 오래도록 지탱시켰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긴 세월 동안 언젠가 다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1641년 귀양생활 18년 수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67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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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손(傍孫:방계혈족) 이해성의 말에 의하면, 그는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 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양주 적성동에 있는 그의 어머니 공빈 김씨 무덤 아래 묻혔다. 조정에서 베풀어 준 마지막 은총인 셈이다.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 15년 세자 생활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훌륭한 임금이 될 수도 있었을텐데, 결국 스스로를 극복하지 못하고 폭군의 오명을 쓰고 폐위에까지 이르렀으니, 비운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군은 인간적인 약점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세자자리에 올랐으나 선조의 질투와 변덕으로 기댈 언덕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많은 왕자들(선조는 영창대군 외에도 13왕자를 두었음) 틈에 끼어 왕위가 늘 불안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늘 외롭고 불안한 그의 처지는 정서불안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음모 술수가 판을 치는 궁중을 현명하고 유연하게 다스리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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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6편

■광해 6편

■광해 6편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출범했지만 광해군은 즉위 직후 바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린다. 광해군은 즉위한 다음 날 이호민을 명나라에 파견해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알렸다.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유를 캐물었다. 광해군은 즉위 후 보름 만에 임해군이 역모를 꾀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에 유배 보낼 정도로 정치적인 견제를 하고 있던 차에 명나라까지 왕통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자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느꼈다. 결국 광해군은 1609년 4월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돼 있던 임해군을 처형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 광해군이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하였다는 설과 이이첨이 사람을 보내 임해군을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 결과적으로 임해군은 동생 광해군이 왕위를 지키려는 과정에서 희생된 것임에는 분명하다.

임해군보다 광해군을 힘들게 한 인물은 동생 영창대군이었다. 영창대군의 최대 후원자였던 유영경은 선조 사후 한 달이 못 돼 처형됐고, 광해군 초반 각종 역모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소북 세력은 대거 정계에서 축출당했지만 살아 있는 적통의 존재는 여전히 부담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1613년 4월 25일 조령(鳥嶺:문경새재)에서 은상(銀商:은 장사꾼) 살해사건이 일어났다. 살해의 주범은 서인(西人)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 심우영, 박치인, 박치의, 이경준, 허홍인 등 7명의 서얼들로 밝혀졌다. 이들은 여주, 춘천 등지에 모여 ‘강변칠우(江邊七友)’로 자청하면서 무기와 양식을 준비했다. 서얼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자금 확보를 목적으로 은상을 살해한 것이었다. 그런데 심문 도중 대북파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박응서가 놀라운 진술을 했다.

“자금을 확보해 김제남(영창대군의 외조부)을 중심으로, 왕(광해군)과 세자(광해군의 아들)를 죽이고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

이 발언의 파장은 확산됐고 정국은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결국 김제남이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되어 강화도로 유배됐다. 1614년 봄 역시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은 영창대군을 작은 골방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증살(蒸殺: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시켰다. 영창대군은 불과 8세의 어린 나이로 정치적 희생양이 된 것이다. 영창대군의 죽음에 가장 충격을 받은 인물은 생모 인목대비였다. 졸지에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인목대비에게 광해는 아들이 아니라 원수였다. 결국 광해는 어머니 인목대비를 1615년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옮겨가게 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막았으며, 3년 후 ‘서궁(西宮)’으로 명칭을 격하시켰다. 선조가 그렇게 예뻐하던 정명공주도 평민으로 강등 시켜 이 불쌍한 모녀는 가택연금 수준의 감시를 받으며 지내게 됐다. 광해군은 교서를 반포해 흉측한 글을 유포시킨 인목대비의 죄상을 알리고 이에 연루된 나인들을 처형하는 조치를 취했다. 인목대비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이러했으니, 서궁에서의 비참한 생활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현재 덕수궁 안에 ‘석어당(昔御堂)’ 이라는 건물이 이 두 모녀가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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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5편

■ 광해 5편

■ 광해 5편

선조(宣祖)의 죽음에 대해 북인(北人)이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왕비 인목대비가 지켰다고 했다. 그런데 서인측의 기록인 《광해군일기》에는 선조(宣祖)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未時)에 광해군이 찹쌀떡을 올렸는데 선조가 먹고 갑자기 기(氣)가 막히는 병이 발생하여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남계집》을 인용해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입시(入侍)했던 선비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어느 것이 옳은 기록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일컬어지듯이 이 역시 당쟁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어쨌든, 재위 장장 41년으로 초유의 임진왜란을 겪었고, 4색 당파의 분화(分化)와 당쟁을 지켜 본 선조. 권력유지에는 큰 수완을 보였으나 특별히 내세울 만한 업적 하나 없이 그렇게 살다 갔다. 숱한 장애를 딛고 33세의 나이에 마침내 보위에 오른 광해군. 일찍이 왕재(王才)를 인정받았으나 16년의 세자 생활은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살얼음판을 걷는 하루 하루였다. 창업자인 태조에 견줄 만큼 나라 곳곳을 누볐고, 문종에 견줄 만큼 실무 경험이 풍부한 새 임금 광해를 백성과 신료들은 진심으로 반겼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정인홍, 이이첨, 이경전 등이 중심이 된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다. 대북 정권은 정적 제거의 칼을 빼들었다. 제일 먼저 제거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히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이었다. 유영경은 자신이 먼저 알아서 사직하려고 했으나, 광해군은 선왕(先王)이 신임하던 재상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북의 사주를 받은 대간의 탄핵이 연일 계속되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세손의 원손 책봉과 혼인을 지연시킨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공격했다. 광해군은 결국 유영경을 삭탈관작(削奪官爵)하고 유배 보낸 후 죽였다. 유영경을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광해군 정권 초기에는 남인인 이원익(李元翼)이 영의정에, 서인인 이항복(李恒福)이 좌의정에 임명되는 등 조정에는 대북 외의 세력이 남아 있었다. 전후 복구를 위해서는 당파를 초월한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모두가 뜻을 같이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정권의 실세는 대북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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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4편

■ 광해 4편

■ 광해 4편

이즈음 정권을 잡은 북인은 정인홍이 이끄는 대북, 유영경이 이끄는 소북으로 분열되었는데, 이 중 소북의 리더 영의정 유영경은 왕의 의중을 잘 읽고 그 뜻에 부합하는 능력이 출중하였다. 유영경은 선조의 뜻이 광해가 아니라 영창대군에게 있음을 알고, 세자를 바꿀 명분을 찾고 있었다. 당연히 명분은 ‘적자승계’이다. 선조가 영창대군이 좀 더 자랄 때 까지만 산다면 틀림없이 세자는 바뀔 것이라 생각하고 영창대군에게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선조는 자기 마음을 알아주는 유영경을 더욱 총애했고, 덕분에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유영경의 무리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후궁들과 상궁 나인들마저 광해군을 임시 세자로 여기고 무시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궁중의 안주인인 인목왕후라도 중심을 잡고 후궁 등을 단속하여야 할 것인데, 그러기는커녕 영창대군에게 세자 의상과 비슷한 옷을 입히기까지 하는 등 광해군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광해군은 이러한 외로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사면초가(四面楚歌)의 불안한 상태를 전쟁이후 무려 10년이나 견디어 냈으니, 그 속에 품은 한이 얼마나 컸을까. 얼마나 외롭고 두려웠을까.

선조 40년 10월, 선조는 갑자기 쓰러져 자리에 누웠다. 죽음을 예감한 선조는 여러 생각을 했으나 차마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결국 비망기(備忘記:임금의 명을 승지에게 내려 전함)를 내려 장성한 광해군에게 전위(傳位) 또는 섭정을 하도록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갑자기 선조가 몸져 누워 이 같은 뜻을 밝히자 급해진 것은 영창대군에 올인한 소북파의 유영경과 어머니 인목왕후였다. 인목왕후는 현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선조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혔으나, 유영경은 여러 이유를 들어 선조의 뜻에 반대를 하였다. 반면에 정인홍을 비롯한 대북파는 유영경이 세자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불충(不忠)을 저질렀다며 유영경을 강하게 공격하였다.

이렇게 대북파와 소북파들이 목숨을 건 대립을 하고 있던 이때, 다소 기력을 회복한 선조는 소북파 유영경의 손을 들어 주고 대북파의 영수 정인홍을 귀양 보내버렸다. 이로써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의 패배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선조(宣祖)는 재위 41년을 맞으면서 병세가 악화되어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1608년 2월 향년 57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결국 선조(宣祖)가 죽자 세자인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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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 3편

■ 광해 3편

■ 광해 3편

이러한 어이없는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軍務司)의 업무를 주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때문에 조야(朝野)에서는 광해군이 차기 대권의 주인공임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왜란 통에 어쩔 수 없이 광해를 세자로 책봉한 선조는 1594년(선조 27년)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명나라에 세자책봉 승인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광해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던 명나라 조정이 선조에게 맏아들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막상 광해의 세자책봉을 반대하면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섯 차례나 종용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후계 다툼과 맞물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서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長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명나라 신료들은 만일 조선의 광해군를 세자로 승인해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선조는 명나라의 상황과 입장을 파악하고는 세자 책봉 승인을 위한 노력을 하지않고, 나아가 광해를 사실상 세자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덧붙여 광해의 앞날에 또 하나의 넘어야 할 산이 나타났으니, 이는 선조의 새 장가였다. 선조는 첫째부인 의인왕후가 죽자 새 중전을 맞이했는데, 이 때 선조의 나이 51세, 새 중전 인목왕후의 나이 17세, 세자인 광해의 나이는 26세였다. 인목왕후가 적장자를 낳게 된다면 당연히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울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인목대비가 학수고대하던 첫 아이를 출산 하는 날, 선조와 광해군 양쪽의 희비가 엇갈렸다. 정명공주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는 52세에 정실부인에게서 얻은 늦둥이 딸이 마냥 귀엽기만 했다. 조선시대 왕의 자식들은 6~7세가 되기 전까지는 호칭도 없이 그냥 아기씨라고 불렀다. 최소한 6~7세가 되어야 재산도 주고 왕자, 공주로 불리게 되는데 선조는 너무 기쁜 나머지 정명공주가 2살이 되자 4백만 평의 농지에서 나오는 세금을 공주 앞으로 책정해 주었다. 이 재산이 천석정도 된다고 하니 요즘으로 치면 미성년자 주식부자나 다름없다. 3년이 더 지나 선조는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드디어 왕자를 보게 되었다. 정명공주의 친동생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이다. 광해군의 고민은 깊어갔다. 명나라는 세자 인정을 거부하고 선조는 자신을 미워하는데, 설상가상 새어머니인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이때부터 선조(宣祖)의 마음은 광해군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광해 2편

■ 광해 2편

■ 광해 2편

1592년 7월, 광해군은 이천에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왜적과의 항전을 독려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 이조 참의 이정암에게 황해도의 연안성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이정암은 500여 명의 의병으로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 개가(凱歌)를 올렸다. 광해군은 또 명과 일본군의 화의 교섭으로 전쟁이 주춤해진 1593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남행길에 올라 무군사(撫軍司)라는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행하고 민심을 살폈다. 18세에 불과한 광해가 평양성 탈환 때 까지 사실상의 조정인 분조를 이끌며 훌륭히 임금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선조가 의주에서 요동만 바라보며 여차하면 국경을 넘을 태세를 취하고 있을 즈음, 광해군의 활약 소식을 들은 젊은 신하들은 노골적으로 "군국의 기무를 모두 세자 저하께 맡겨 처리하심이 옳은 줄 아옵니다" 라는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설상가상, 명나라도 선조의 무능함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광해군이 눈치 있게 업무를 대강 수행했더라면 되었을 텐데, 너무나 열심히 임무를 수행한 덕분에(?) 선조(宣祖)의 눈 밖에 나 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금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선조(宣祖)는 전쟁을 제대로 수행하면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찾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투정부리듯 양위(讓位)를 선언해 버렸다. 전쟁의 와중에, 그것도 공식적인 것만 자그마치 19회씩이나! 선조는 사실 양위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조정 대신들은 양위선언을 철회하도록 수도 없이 상소를 올리고, 모두들 왕 앞에 나아가 양위(讓位) 취소 선언이 있을 때까지 엎드려 통곡하는 한심한 상황을 연출해야만 했다. 물론 천하의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 세자인 광해도 며칠씩 끼니까지 굶어가며 차가운 뜰 앞에 꿇어 앉아 명을 거두어 달라며 엎드려 읍소(泣訴)해야만 했다.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중차대한 이 시점에 이 무슨 국력낭비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란 말인가!

선조(宣祖)는 이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면서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하고 자신의 입지를 굳히는 방편으로 삼았다. 선조는 이 방법을 통해 흔들리는 권력을 움켜잡았지만, 떨어진 위신까지 회복할 수는 없었다. 선조는 도망 다니며 제 한 몸 건사하기 바빴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볼 때마다 어린 나이에 위풍당당하게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한 광해군과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장군에게 열등감을 또 다시 느껴야만 했을 것이다. 선조의 이러한 질투와 열등감은 미움으로 변해갔고, 이는 결국 광해군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광해 1편

■ 광해 1편

■ 광해 1편

조선의 제15대 국왕 광해군의 이름은 혼(琿), 선조의 둘째 아들이다. 선조에게는 14명의 아들을 있었지만 막상 정비인 의인왕후 박씨에게서는 아들을 얻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공빈 김씨 소생으로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을, 인빈 김씨 소생으로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신성군을 두고 있었다. 공빈 김씨는 아들 둘이 서너 살일 때 세상을 떴고, 왕실에는 달리 적자(嫡子)가 없었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임해군과 광해군은 자식이 없던 의인왕후의 손에서 자랐다. 모정의 부재 속에서도 형인 임해군과 달리 광해군은 소년 시절부터 영민하고 도량이 넓어 일찍이 왕재(王才)로 인정을 받았다. 언젠가 선조가 왕자들을 불러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마음대로 고르게 하자 왕자들은 앞다투어 보물을 골랐지만, 학문에 심취해 있던 광해군은 붓과 먹을 집어 들어 선조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방계(傍系) 혈통으로 보위에 오른 탓에 늘 열등감을 가지고 있던 선조는 적통의 후계자를 갈망했지만 나이 마흔이 넘도록 적통의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다. 의인왕후와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장자인 임해군이 마땅히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그는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었다. 선조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후계문제를 놓고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조정과 민간의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세 살 때에 죽은 처지여서 스스로 처신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들이 세자책봉을 거론하자 선조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런데 서인의 리더였던 정철이 세자로 광해군을 언급하자 인빈 김씨 소생인 넷째아들인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는 분노하며 그를 유배형에 처해 버렸다. 그러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는 부랴부랴 급하게 평양에서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현군(賢君)의 자질을 키워 나갔다. 세자인 광해군이 솔선하여 각지를 돌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했으며, 군량과 마초를 수집하는 등 활발한 후방 지원 활동을 벌였다. 그러자, 흩어졌던 민심이 다시 모이고 도망쳤던 사대부와 조정 중신들이 모여 들었고, 그때부터 광해군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활약으로 전란 초기 일본군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되었던 조선군이 본격적으로 항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