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일 화요일

아침 1시간이 운명을 가른다

아침 1시간이 운명을 가른다

아침 1시간이 운명을 가른다

전두엽 관리의 열쇠는 규칙적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다. 부지런해야 한다. 성공한 정신 노동자는 예외 없이 아침형 인간이 많다. 우선 효율성 측면에서 아침 1시간은 저녁 2시간에 필적한다. 1시간만 일찍 일어나도 생활의 질이 달라진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허둥대지 않고, 또 운동이나 독서를 할 수 있고, 아침 식사에서 가족들과 대화할 수 있으며, 지하철에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또 1시간을 버는 것이다.

매일 아침에 책을 1~2시간만 본다고 하더라도 1년에 100권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때 영어공부를 꾸준히만 하면, 영어 실력은 남달리 발전해 있을 것이다. 아침 1시간이 당신의 운명을 바꾼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아침에 써야할 기획서, 보고서, 칼럼 등을 잠들기 전 대충 머릿속에 정리해 두면 정말이지 아침이 기다려진다. 가벼운 흥분이 인다. 자는 사이 생각해 둔 것들이 요약, 정리, 편집되어 아침에 일어나면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숙면이 주는 또 다른 축복이다. 생산적일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좋다. 아침이 기다려지게 하라. 맛있는 커피, 즐거운 산책, 읽다 덮어둔 책, 내일 아침 새롭게 해볼 것들, 좋은 습관, 운동, 아이들과의 대화 등 아침이 기다려질 거리를 만들어라. 하루 밤샘을 해 본 사람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컨디션이 엉망이다. 리듬이 완전히 난조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루의 생활 리듬을 일정하게 해야 한다. 이상적으로는 밤 10~11시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늦어도 밤 12시를 넘기면 안된다. 사람이 죽는 것도 이 시간대가 가장 많다. 어쩌다 취침 시간이 늦더라도 기상 시간만은 일정해야 한다. 그래야 그걸 기점으로 해서 세로토닌의 조절 기능이 원활해지기 때문이다.

● 생활의 팁 - 짧고 깊은 수면을 위한 습관

1) 저녁에 워킹 30분 하기

2) 더운물로 10분간 목욕하기

3) 밤 10~11시에 잠들기

4) 아침 5~6시에 기상하기

5) 점심식사 후 낮잠 20분 자기

6) 오후 6시~7시에 저녁 식사하기 (더 늦게 하지 않기)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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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라 할 때의 ‘황’을 ‘누렇다黃’는 뜻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의 ‘황’은 ‘누렇다’는 뜻이 아니라 ‘크다’라는 뜻을 가진 ‘한’에서 나온 말이다. 한(大) 소(牛)에서 나온 말로 ‘큰소’를 의미한다. ’큰길‘을 ’한(大) 길(路)‘로, 황새는 큰새라는 한(大) 새(鳥)로 쓰는 구조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검은 소이든 흰 소이든 간에 덩치가 큰 숫소를 모두 황소라고 부르며, ‘저기 흰 황소가 지나간다’라든가, ‘옆집에 검은 황소가 있다’ 등의 표현도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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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잘나가다가 삼천포(三千浦)로 빠지다

‘삼천포’는 경상남도 남서쪽 끝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항구 도시이다. 기후가 온화하고 해안 경치가 빼어날 뿐만 아니라 먹을거리가 풍부해 그 어느 지역보다 살기 좋은 고장이다. 그런데 ‘삼천포’는 1995년 5월 행정구역 개편 때 사천군(泗川郡)과 합쳐져 ‘사천시’로 바뀌면서 그 이름이 사라졌다. 그래서 행정명칭 상 ‘삼천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삼천포(三千浦)’에 느닷없이 ‘빠지다’가 붙어 ‘삼천포’라는 지명의 이미지에 큰 손상을 주게 되었다.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는 표현에서 보듯이 어떤 목적지를 가려다가 의도하지 않게 삼천포로 잘못 들어섰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삼천포’ 사람들에게 별로 유쾌한 표현은 아니다. 이 표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가지 유래설이 있다.

(1) 어떤 장사꾼이 장사가 잘되는 진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삼천포로 가게 됐다.

(2) 과거 부산發 진주行 열차는 개양역에서 삼천포행 객차를 분리하여 운행했다. 이때는 반드시 안내 방송으로 진주행 손님과 삼천포행 손님이 객차를 갈아탈 것을 알렸다. 그런데 간혹 객차를 잘못 옮겨 탄 손님이 진주가 아닌 삼천포로 잘못 가게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3) 부산발 순천행 열차는 진주에서 분리하여 삼천포로도 운행을 하였다. 순천으로 가는 손님이 객차를 분리할 때 삼천포행 객차로 잘못 옮겨 타 삼천포까지 가게 되었다.

(4) 진주로 가는 길과 삼천포로 가는 갈림길에서 진주로 가려던 사람이 삼천포로 가는 길로 잘못 접어들어 결국 삼천포까지 가게 되었다.

여러 유래설을 종합해 보면, 공통적으로 원래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길을 잘못 들다’ ‘이야기가 곁길로 빠지다’ ‘어떤 일을 하는 도중에 엉뚱하게 다른 일을 하다’ 등과 같이 나쁜 결과가 나왔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주로 쓰인다. 그러니 삼천포 주민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이 표현보다는 “잘 나가다가 샛길로 빠지다”라는 표현으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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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임꺽정

■ 의적 임꺽정

■ 의적 임꺽정

임꺽정은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활동한 인물로 홍길동, 장길산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의적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유기제조업, 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며, 신분적으로는 노비가 아니지만 그 직업이 천하다 하여 노비보다 더 심한 천대를 받았다.

임꺽정이 도적활동을 하게 된 원인으로는,

첫째, 잇따른 흉년과 기근으로 농민의 생활 상태 악화

둘째, 과중한 세금부담

셋째, 고을 수령의 착취를 들 수 있다.

임꺽정 부대의 규모 · 전술과 활동 거점에 대해서는 <명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창, 칼, 활, 도끼 등 단순한 무기로 무장했을 뿐 총포류 등의 화약 무기는 없었으므로, 관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면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고 관군과 맞대고 교전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기동력 면에서 탁월하였으므로 산악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임꺽정 부대가 수령들을 거리낌 없이 처단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라를 욕보이고 국가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므로, 임꺽정 부대는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떼인 ‘군도(群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집단인 ‘반적(叛賊)’ 이었다.

임꺽정은 관군과의 3년에 걸친 전투 끝에 생포되어 1562년 초 최후를 맞게 된다.

임꺽정의 반란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나, 정작 임꺽정 자신의 문제인 천민 층의 신분해방은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근본적으로 봉건지배층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항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모순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사회의식은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임꺽정의 활동은 봉건사회 변혁운동의 초기적인 형태로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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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레지

젊은 사람들에게는 낯선 단어일지 모르지만, 연세가 드신 분들은 ‘다방’ 이라는 장소와 거기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레지’ 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이 ‘레지’에 대해서 영어의 ‘lady’ 가 ‘레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으로 영어의 register(등록하다)에서 온 말이다. ‘레지스터’가 줄여진 ‘레지’는 일본사람들이 ‘카운터’ 또는 ‘카운터에서 계산하는 사람’으로 사용하는 단어이다. 그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그대로 다방에서 요금을 계산하는 사람 또는 요금을 계산하는 곳이라는 의미로 쓰이게 된다. 과거 다방에서 주로 카운터에서 요금을 계산하는 사람이 주로 여자이다 보니, 다방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까지도 ‘레지’라는 말로 확대해서 쓰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돌팔이

‘돌팔이’의 사전적 의미는 ‘전문 지식이나 기술 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돌팔이’는 ‘돌다’ 와 ‘팔다’ 의 합성어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는 않는데 ‘돌팔이’가 쓰인 예로 ‘돌팔이 글방’이란 것이 있다. 어린 아이들을 모아 놓고 자격도 별로 없는 사람이 가르치는 글방을 말하며, 본래 ‘돈팔이 글방’이었다고 한다. ‘돈팔이’란 학문이나 기술을 본분으로 하지 않고 오로지 돈벌이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이런 연유에서 ‘돌팔이’는 가짜나 엉터리를 뜻하는 말로 그 의미가 확대되어 사용되게 되었다. 돌팔이 무당, 돌팔이 의사 등의 말이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3. 백일장(白日場)

‘한글날 기념 백일장’ 이라는 말을 학창시절 자주 들은 기억이 있다. 보통 글짓기대회를 할 때 쓰이는 말인데, 왜 ‘백일장’이라고 할까? 글짓기와 어떤 관계가 있는 말일까?

조선시대에 유생들의 학업을 장려하기 위해 각 지방 유생들을 모아 시문(詩文)짓기를 겨루던 행사가 있었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 달밤에 모여 친목을 도모하고 시재(詩才)를 겨루어보는 망월장(望月場:밤에 달을 바라보며 열림)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대낮에 백일하(白日下: 밝은 태양 아래)에 시재를 겨루는 백일장(白日場)의 두 종류가 있었다. 옛날 관리의 등용문이던 과거 시험이 후자(後者)인 백일하에 이루어지던 백일장(白日場)이었으므로, 오늘날 전문 직업작가가 아닌 일반인이나 학생들이 모여 글짓기 대회로 시재(詩才)를 겨루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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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 정현왕후 윤씨

■ 성종의 여인들- 정현왕후 윤씨

■ 성종의 여인들- 정현왕후 윤씨

폐비 윤씨가 생을 마감하자 성종은 새로운 왕비를 맞이해야 했다. 후궁 출신 중에서 선발하는 관례에 따라 숙의 윤씨가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그녀가 바로 성종의 두번째 계비(繼妃)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다. 정현왕후는 파평 윤씨 윤호(尹壕)의 딸로, 1462년 12세의 나이로 숙의(淑儀) 자리에 올랐다가 왕비가 되었다. 성종의 세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이후 폐비 윤씨의 소생 연산군은 그녀를 생모로 알고 자랐고, 그녀도 원자인 연산군(燕山君)을 친아들처럼 키웠다. 정현왕후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훗날 중종이 되었고, 신숙공주는 일찍 죽었다. (성종은 모두 28명의 자식을 두었다.)

성종은 인정전에 나아가 왕비를 책봉하는 의식을 진행했다.

『성종께서 항상 칭찬하기를 “부녀는 질투하고 시기하지 않는 사람이 적은 법인데, 현명한 왕비를 맞아들임으로써 내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셨고, 소혜왕후(인수대비)께서도 역시 기쁨이 안색에 넘치면서 이르기를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왔는데 낮이나 밤이나 무슨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는 <중종실록>의 기록처럼 정현왕후는 남을 배려하고 온화한 성품이 돋보이는 왕비였다.

그러나 연산군의 폭정 시기에 그녀는 많은 수난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이 어둡고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근심되는 마음과 애타는 생각으로 침식(寢息)이 편치 못하시어 이로 인해 병이 나셨다가 간신히 나으시기도 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1506년의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을 축출한 반정군들은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현왕후를 찾아와 그녀의 아들인 진성대군을 왕(중종)으로 추대하기를 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에는 대비로서의 정치적 간섭보다는 조용한 내조의 길을 택했다. 『깊고 원대한 계책을 잠시도 잊지 않았고, 의례적인 혜택은 조금도 베푸는 일이 없으셨다.』는 그녀에 대한 평가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그녀는 왕실의 안정을 위해서는 단호하게 처신하기도 했다. 1527년(중종22년) 세자의 생일에 쥐의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과 귀·눈을 불로 지져 동궁의 북쪽 뜰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세자를 저주한 ‘작서(灼鼠)의 변’이 있어났다. 언문 쪽지를 추관(推官)에게 보내 즉각 범인을 색출하도록 하고, 주모자로 경빈 박씨를 즉시 처벌하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1530년(중종25년) 8월22일 69세의 나이로 경복궁 동궁의 정전에서 승하셨다. 그녀의 무덤은 남편 성종의 무덤이 있던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선릉(宣陵) 왼쪽 언덕에 동원이강릉 방식으로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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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5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5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5편

성종은 왜 윤씨를 폐출시킨 것도 모자라 죽이기까지 했을까?

성종은 원자가 왕이 되었을 때 폐비 윤씨가 살아있다면, 왕의 모후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정국을 혼란하게 만들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죽이고 원자에게는 이 사실을 숨겨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고 했다. 그는 폐비 윤씨 사사 사건 문제를 자신의 사후 100년간 언급하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연산군의 폭정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는 법. 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생모 윤씨가 폐출된 끝에 사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관련자 모두에게 피바람이 몰아닥쳤다. 결국 연산군 대에 일어난 불행의 씨앗은 성종이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씨가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원자의 생모인 윤씨를 다시 왕비(王妃)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끊임없이 반복되었고, 그에 따라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연산군이 즉위한 뒤, 윤씨를 복위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대로 윤씨 폐위에 앞장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한명회 한치형 윤필상 등이 있다.

1480년(성종11년) 11월, 중전 윤씨를 폐한 지 1년 후,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를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수대비는 총애하던 정소용을 왕비로 올리려 했지만, 간택의 결정권을 쥐고 있던 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성품이 무난하고 분쟁의 요소가 적은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했다. 폐비 윤씨의 아들 융은 무사히 세자로 책봉되었지만, 세자 융이 13살이 되었을 때 새 왕비 정현왕후 윤씨에게서 진성대군(후에 중종)이 태어났다. 성종이 사망할 때 세자 융(연산군)은 18세였고, 진성대군 이역은 6세였다. 1494년 세자 융은 10대 임금 연산군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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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3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3편

■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3편

그해 윤 10월 날씨가 차가워지고 윤씨의 거처에 도둑까지 들자, 폐비를 별궁으로 들여야 한다는 중신들의 의견이 비등했지만 성종은 들어주지 않았다. 왕비는 폐출되고 왕자 융은 외가인 강희맹의 집에 거처하면서 양육되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자신의 부인이요, 후일 왕위에 오를 원자의 어머니라 성종 역시 그녀가 개과천선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성종은 윤씨가 폐위된 후에도 언문(諺文)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며 허물을 고치기를 바랬다. 그러나 성종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1482년(성종13년) 정월, 연산군이 일곱 살이 되자 조정에서는 세자 책봉 논의가 일어났다. 또한, 일부 조정 신료들에 의해 세자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된다는 상소가 이어졌다. 즉,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해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면서 새로운 정치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에 대한 동정론이 제기되었고, 신료들은 자연스럽게 폐비 윤씨를 복권(復權)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폐비 윤씨가 왕위를 이을 세자의 어머니이기에 결코 사가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윤씨 동정론에 위기를 느낀 인수대비는 몇몇의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그녀를 더욱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었다. 폐비를 미워하는 자들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정희왕후(貞熹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는 여전히 폐비를 혐오했고, 왕의 후궁들인 숙의(淑儀) 엄씨(嚴氏),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폐비를 더욱 모함하였다. 윤씨가 사가에 나간 뒤에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바쳐 그녀의 복권은 없던 일이 되었다. 그해 여름, 나라에 기근이 들고 세간의 물가가 오르자, 중신들은 폐비 윤씨가 아사(餓死)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별궁 안치를 권했다. 그러자 성종은 내관 안중경을 윤씨의 사가로 보내 그녀의 동정(動靜)을 살피게 했다.

그때 인수대비의 밀명을 받은 안중경은 폐비 윤씨에게서 반성의 빛을 찾아볼 수 없다는 허위보고를 올렸다. 한편으로 정희왕후도 성종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언문서한을 보내 결단을 독촉했다.

『과거 윤씨가 독을 가지고 첩을 살해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어린 원자를 끼고 ‘내 명이 장수하면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협박했다. 또 주상에게 ‘눈을 도려내리라’ ‘흔적을 없애리라’ ‘손목을 절단하리라’ 등 험한 말을 했고, 주상이 편치 않을 때 즐거워하는 등 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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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2편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2편

성종의 여인들-폐비 윤씨 2편

그로 인해 궁중이 발칵 뒤집히자 성종은 내명부에 봉작된 23명의 후궁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문초했지만 범인을 색출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소용 정씨소행으로 결론 났으나, 중전 윤씨의 처소에서 주술 방법이 적혀있는 방양서(方禳書)와 극독(劇毒:지독한 독)인 비상(砒霜)이 발견되었고, 투서에 사용된 것과 똑같은 재질의 종이도 발견되면서 결국 윤씨의 소행이 드러났다. 비로소 진상(眞相)을 모두 알게 된 성종은 분노하였고, 윤씨를 빈(嬪)으로 강등하려 했지만 대신들이 앞 다투어 말렸다. 그녀가 원자(元子)의 생모(生母)였기 때문이었다.

성종은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불문에 붙였지만, 주술을 도와준 어머니 신씨의 직첩을 회수하고 궁궐 출입을 금했다. 그리고, 흉물을 궐내로 반입한 중궁전 나인 삼월이는 교수형에 처했으며, 나인 사비는 장형 100대를 때리고 변방(邊方)의 관비(官婢)로 내쫓았다. 가까스로 처벌을 면한 중전 윤씨는 별궁에서 근신하게 되면서 일단락되었다. 그로부터 2년여 동안은 은인자중(隱忍自重:참고 견디며 몸조심하다)하며 살았다. 하지만 성종의 여성편력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여러 후궁처소를 들락거리며 중전 윤씨 마음을 아프게 했고, 성종에 대한 원망이 가슴 속에 쌓여만 갔다.

이후 윤씨는 둘째 아들 즉 연산군의 동생까지 낳고 성종의 사랑을 되찾으려 애썼다. 하지만, 성종이 후궁의 처소에 들었다는 것을 듣고 후궁의 처소까지 난입하여 패악을 부리던 윤씨는 결국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야 마는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이 알려지자 분노한 인수대비는 성종에게 즉시 그녀를 폐서인(廢庶人)하라고 요구했다. ‘내훈(內訓:훈계)’이라는 책을 써서 내명부를 교육시킬 정도로 여성의 예절을 중요하게 여기던 시어머니였다. 이미 윤씨에게 정나미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성종은 못이기는 척 그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때는 삼촌인 신숙주도 이미 죽고 없었으므로 그녀를 감싸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윤씨는 대비들은 물론 성종의 후궁들과도 관계가 틀어져 있었다. 이윽고 성종이 조정에서 폐비 문제를 거론하자, 대신들은 윤씨가 세자의 생모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이미 성종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성종의 결심이 굳건함을 알게 된 대신들은 만일 폐비하더라도 윤씨는 세자의 생모이므로 별궁에 안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성종은 대비의 뜻이라며 그녀를 친정어머니 신씨와 살도록 명했다. 1479년(성종 10년) 6월, 마침내 중전 윤씨는 직첩을 빼앗기고 폐서인(廢庶人) 되어 사가(私家)로 쫓겨났다. 원자(연산군)의 나이 4살이었다. 왕비를 폐출시킨 것은 조선 역사상 그때까지 처음 있는 일이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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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여인들 폐비윤씨 1편

■ 성종의 여인들 폐비윤씨 1편

■ 성종의 여인들 폐비윤씨 1편

성종의 계비(繼妃)가 된 윤씨(尹氏)는 판봉상시사 윤기견과 부부인 신씨의 딸이며, 신숙주의 외조카였다. 아버지 윤기견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세종실록》과 《고려사절요》 편찬에도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윤기견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자, 어린 윤씨가 길쌈을 해서 어머니 신씨를 봉양했다고 한다. 윤씨는 성종보다 2살 연상으로 어릴 때 간택 후궁으로 1473년(성종 4년) 입궐하여, 종2품 숙의에 봉해졌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윤씨는 입궐 후 검소하고 온화한 태도로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당시 왕실에는 세 명의 대비(大妃) 즉 정희왕후(貞熹王后)·안순왕후(安順王后)·소혜왕후(昭惠王后)가 있었는데, 윤씨는 이들 또한 극진하게 봉양하여 신뢰를 얻었다. 3년 뒤인 1476년(성종7년) 첫 부인인 공혜왕후가 18세의 나이에 요절하자, 숙의 윤씨를 왕비로 간택했다. 윤씨는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임신 중이었으므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성종母) 한씨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7일 윤씨는 원자(元子) 이융(후에 연산군)을 낳으면서 왕비로서의 지위가 확고부동해지는 듯 했지만, 여색(女色)을 탐하는 성(性)종이 그녀에만 만족할 리가 없었다. 중전 윤씨가 아들을 낳고 몸을 추스르며 육아에 집중하는 동안, 성종은 아름다운 소용 정씨와 엄씨의 처소를 들락거리며 후궁들을 총애하면서 산후우울증(?)과 함께 윤씨의 투기가 점점 심해져 성종과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윤씨의 집안이 크게 내세울 만한 명문가가 아니다 보니 집안이 좋은 후궁들은 은근히 왕비를 무시하며 그 자리를 위협했다. 본성이 괄괄한 성격이었던 윤씨는 그런 왕과 후궁들의 태도를 참지 못하고 성종과 종종 다투었다. 두 후궁은 성종의 총애를 받게 되자, 자신들도 윤씨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꿈을 꾸면서 윤씨를 총애하고 있던 인수대비에게 접근하여 윤씨를 고자질했다. 인수대비는 원자를 낳은 윤씨를 이뻐했었지만, 두 사람의 이간질로 점차 윤씨를 탐탁치않게 여기게 되었다.

윤씨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으로서 내명부를 다스렸지만, 돌아서버린 남편의 사랑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고심하던 그녀는 자신의 연적(戀敵)들을 제거하기로 결심하고, 어머니 신씨의 도움을 받아 정씨와 엄씨의 처소에 시신의 뼈를 묻어두어 죽게 만드는 매흉(埋兇:주술의 일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매흉이 아무런 효과가 없자, 후궁 정씨와 엄씨가 짜고 자신과 원자를 죽이려 한다는 투서를 만들어 숙의 권씨의 처소에 던져 넣어 일부러 공개되게 만들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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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실리외교

■ 광해군의 실리외교

■ 광해군의 실리외교

임진왜란은 조선, 명, 왜 삼국이 한반도에서 벌인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전쟁의 무대가 한반도였던 관계로 수많은 우리 백성들이 죽고 국토가 피폐해졌으며 국가체제는 무너졌다. 전쟁 이후 광해군에게 가장 시급했던 문제는 전후 수습과 복구였다.

당시 국제정세는 명이 쇠퇴하고 후금(청)이 강성해지면서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었을 때였다. 명은 조선에게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것을 빌미로 명나라가 후금을 치는데 출병을 요구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후금이 명보다 우세하다고 판단, 명의 요청을 들어 주는 척하면서 당시 최고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비밀명령을 통해 적당히 싸운 척하다가 후금에게 투항하도록 해서 후금의 원성을 사지 않고 전쟁을 막아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들을 또 다른 전쟁에 내 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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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을 기본외교정책으로 삼았다. 여기서 사대(事大)는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교린(交隣)은 이웃 나라와 화평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즉 사대는 명나라에 대한 외교정책이고, 교린은 여진족과 일본에 대한 외교책이었다. 사대주의(事大主義)와 사대교린(事大交隣)정책은 분명하게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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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은 서로의 독립성이 인정된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예속 관계에 의한 것은 아니다. 조공(朝貢:약소한 나라가 강대한 나라에 정치·군사적인 복속의 표시로 공물을 헌상)과 책봉(冊封:중국의 황제가 국내외 귀족이나 공신에게 왕 또는 공. 후 등의 작위를 주는 것)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대교린정책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국제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실리를 챙기는 외교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대해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무조건적 충성의 맹목적 사대주의에 빠져 든다. 그리하여 서인들은 중립적 실리외교를 표방하던 광해군을 ‘폐모살제(廢母殺弟)’ 라 하여 쫓아내고(인조반정), 교린 상대에 불과했던 여진족인 후금을 우습게보고 배금정책을 쓰다가 또 다시 큰 전란(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게 되었다.

두 번의 호란(胡亂)으로 수십만의 백성들이 죽거나 청으로 납치되었고 수많은 문화재를 잃어버렸으며, 인조가 청 황제 앞에 나아가 ‘삼배구고두례(세 번 절하면서 한번 절할 때 땅에 머리를 세 번씩 부딪힐 정도로 조아림)’ 라는 역사상 유례없는 국가적 수모(삼전도의 굴욕)를 당했다.

♣ 제공 : KIMSEM과 함께 역사 다시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