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4일 목요일

통증을 줄이는 꿀팁 8가지

통증을 줄이는 꿀팁 8가지

통증을 줄이는 꿀팁 8가지

신체는 복잡하게 구성된 유기체입니다. 통증 하나가 사라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통증이 찾아오죠. 몇 가지 방법만 숙지하면 코막힘, 편도선염, 여타 크고 작은 통증이 찾아올 때마다 진통제를 먹을 필요가 없답니다.

1. 목 간지러움 해소

목구멍이 간지럽고 계속 기침이 난다고요? 이럴 때는 따뜻한 차도 소용 없죠. 간단한 방법으로 몇 초 안에 기침을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귀를 힘차게 긁어보세요. 물론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귀를 긁으면 목이 자극을 받고 간지러움이 줄어듭니다.

2. 스트레스 진정 효과

어깨에 판다 100마리를 얹은 듯, 스트레스에 찌든 날에는 뭘 해도 좀처럼 해소가 되지 않습니다. 이럴 때 간편한 해결책이 있습니다. 얼굴에 몇 분간 얼음물을 뿌리세요. 이렇게 하면 포유류 잠수반사(MDR) 기제가 작동해, 신체가 더 많은 산소를 흡입하게 되어 몸과 마음이 진정됩니다.

3. 피 뽑는게 두렵지 않아요.

피 뽑는 걸 무서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가느다란 바늘만 봐도 닭살이 돋는다면 이 방법에 주목하세요. 핵심은 시선 분산! 주삿바늘이 피부에 들어갈 때 기침을 힘차게 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입니다. 두려운 주삿바늘로부터 생각을 분산시키는 거죠.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사전에 의사나 간호사에게 어떤 행동을 할지 미리 귀띔해두세요. 그리고 주의할 점은 기침 시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팔을 꼭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4. 코가 뻥 뚫리는 법

코가 막히면 정신이 없습니다. 코를 세게 풀면 보통 해결되지만, 코를 아무리 세차게 풀어도 소용없을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땐 몇 초간 혀끝으로 입천장을 누르는 동시에 둘째 손가락으로 미간을 누릅니다. 20초가 지나면 코가 뻥 뚫리며 숨 쉬기가 편안해집니다.

5. 물집 방지

가벼운 화상을 입으면 얼음팩을 대고 있으라고 배웠습니다. 대신, 화상 부위를 몇 분간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세요. 이렇게 하면 화상 부위의 체온이 정상으로 돌아와 물집이 생기지 않습니다. 화상도 자연스럽게 나아집니다.

6. 치통, 이제 안녕

치통에 기가 막히게 효과적인 팁을 소개합니다. 엄지와 검지 손가락으로 얼음 조각을 집어 손등에 올려놓고 누르세요(곧바로 손등을 문질러 따뜻하게 만들고 싶어 질 거예요). 손등을 지나는 신경은 통각을 담당하므로, 얼음으로 이를 마비시키면 대다수 통증이 60~90% 정도 감소합니다.

7. 신경과민과의 작별

신경이 곤두선 긴장 상태가 지속되면 몸과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피곤해집니다. 긴장을 가라앉히려면, 몇 분간 엄지손가락을 불어 보세요. 호흡과 심장박동을 조절하는 미주신경이 진정돼 긴장감이 잦아듭니다.

8. 편두통 완화

편두통, 그 고통은 겪어본 분만 압니다. 이를 무작정 참거나 진통제를 먹는 대신, 이 방법을 써보세요. 엄지와 검지로 다른 손의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를 누르며, 적당히 힘을 가해 둥글게 마사지합니다. 편두통이 마법같이 사라진답니다!

연산군과 갑자사화 4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4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4편

1504년(연산군10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나 형벌은 무오사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하게 진행되었다. 죄인들의 자식들도 모두 죽이고 부인들은 종으로 삼았으며, 사위들은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사형에 처할 대상자 중에 미리 죽은 자는 모두 시신의 목을 베도록 하고, 동성의 삼종(三從)까지 장형을 집행한 다음 여러 곳으로 나누어 귀양 보냈다. 그 과정에서 연산군은 왕권을 능멸한 이세좌와 윤필상 등에게는 쇄골표풍(碎骨飄風), 곧 뼈를 갈아 바람에 날려 버리는 형벌을 가함으로써 자손들이 제사조차 지내지 못하게 했다. 그와 같은 전대미문의 극형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는 국왕이라도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또 특이한 점은 직접적인 극형과 함께 재산 몰수라는 경제적 처벌도 병행되었다는 사실이다. 목적은 고갈된 재정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재산 몰수는 추쇄도감을 따로 설치할 만큼 철저히 진행되었고 대부분 국고로 귀속되었다.

갑자사화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정치적 비극의 하나일 것이다. 갑자사화의 결과, 궁중 세력이 승리해 정권을 잡고, 신진사류 세력은 완전히 몰락하였다.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주원인은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 문제였으나, 내면으로는 왕권을 능멸하는 신권에 대한 연산군의 징벌적 성격이 짙었다. 폭력적인 사화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연산군은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으나, 결과적으로 오히려 정권의 정당성과 세력기반을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갑자사화는 이후 국정뿐만 아니라 문화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사형을 받았거나 부관참시를 당한 사람들 중에는 역사상 명신과 대학자·충신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해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는 점이다. 또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寺院)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한글로 연산군을 비난하는 방이 나붙자 훈민정음(訓民正音) 교습 및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국문학 발전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200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을 참혹한 방법으로 처벌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신하들을 완벽하게 제압한 연산군은, 이후 자신의 욕망을 전혀 제한받지 않고 자유롭게 현실화할 수 있었다. 반정으로 폐위될 때까지 꼭 2년 반 동안 연산군이 보여준 행태는 황음(荒淫-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 사화를 계기로 더 심해진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와 질서를 요청하게 되었고, 이로써 마침내 1506년(연산군 12년) 9월2일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게 되었다. 연산군의 12년간의 독재정치는 막을 내렸고, 폐위(廢位) 두 달 만인 1506년 11월 6일, 31세의 젊은 나이로 강화도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폐위되기 전부터 천연두, 가슴통증, 안질, 이질, 치통 등 온갖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는데, 역사 전문가들은 왕에서 쫓겨난 심리적인 충격이 더해지면서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왕이므로, 그의 무덤 역시 왕릉이 아닌 묘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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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갑자사화 3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3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3편

나라는 연산군 편에 선 궁중세력과 부중세력훈구세력이 두 편으로 갈라져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부중파를 제거하고 조정의 권력을 잡으려고 음모를 꾸민 자가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연산군의 복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였다. 예종과 성종의 외척으로 척신세력이던 임사홍(任士洪)은 윤씨의 폐비와 사사(賜死)에 얽힌 전말을 연산군에게 밀고하였다.

윤씨의 폐비론을 가장 강력하게 들고 나왔던 사람은 윤씨의 시어머니(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였다. 윤필상 등 훈구 세력도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김종직 문하의 사림 세력까지 폐비론에 가세했다. 당시 네 살이던 연산군은 뒤이어 왕비가 된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어머니로 알고 자랐으며, 생모 윤씨의 폐비 및 사사에 얽힌 구체적인 정황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마치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것 같은 꼴이었다. 평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이를 마무리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던 연산군은 먼저 선왕의 후궁이었던 엄숙의와 정숙의를 처벌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사약 회의에 참여했거나 또는 이를 힘써 간하지 못한 조정신하들은 물론, 앞서 무오사화에서 죽음을 면한 선비들까지도 협조자로 몰아 죽였다. 사약회의에 참석했던 신하로서 이미 죽은 한명회·정창손 등은 무덤을 파고 그 시신을 베었으며(부관참시), 생존했던 윤필상·한치형·이극균·성준 등과 사림파의 잔존자들은 모두 극형을 당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이 모친 윤씨를 다시 왕후로 추존 복위하려 할 때, 아무도 간하는 신하가 없었다. 오직 권달수와 이행이 죽음을 무릅쓰고 반대했으나, 사리를 따질 리 없는 연산군은 대노하여 즉시 권달수의 목을 베고, 이행을 귀양보냈다. 연산군의 숙청 작업은 1504년 3월부터 무려 7개월 동안이나 계속됐다. 이를 갑자사화(甲子士禍)라고 한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보다 훨씬 많은 인사들을 처단하여, 훈신 세력과 남아있던 잔여 사림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었다.

무오사화가 훈구세력과 사림세력 사이의 상호대립에서 생긴 것이라면, 갑자사화는 궁중 중심의 세력과 훈구세력 일파와의 충돌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다. 갑자사화는 표면상 생모 윤씨의 폐위, 사사 사건으로 인한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기 쉽다. 그러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하고 격화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폐비 윤씨의 죽음이 갑자사화의 계기 및 명분은 될지언정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왕이 되기 전부터 어머니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마음 속으로 칼을 갈고 있다가 기회가 와서 사화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기에 ‘폐비 윤씨’가 원인이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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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갑자사화 2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2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2편

이 후 연산군은 실로 폭군이라 불리울 만한 폭정을 이어나갔다. 연산군은 사냥·연회·음행 등을 더욱 거침없이 즐겼다. 또한 그런 방종을 외부에서 알지 못하도록 궁궐 주변의 민가를 철거하고, 철거 후에 그곳에 금표를 설치하여 일반 백성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들어오는 자들은 사형에 처하였다. 실제로 천동이라는 사람이 금표 안에 들어오자 그를 효수하여 사람들이 보도록 하였다. 또 금표로 인하여 땅을 빼앗긴 사람들이 불만을 품자 그들을 모두 고문하도록 명령하기도 하였다. 국왕에 관련된 발언도 철저히 통제했다. 이런 현상은 재위 8~9년부터 크게 증가했다.

또한 전국에서 얼굴이 예쁘고 노래를 잘하는 기생들을 뽑아 올리라고 명하여 이들에게 흥청, 운평, 광희라는 이름을 붙였다. 처음에는 흥청 3백 명, 운평 7백 명을 뽑아 올리라고 명하였으나, 그 수를 계속해서 늘려 9천여 명까지 늘어나기도 하였다. 연산군은 이들과 향락을 즐기면서 그 비용을 국고에서 충당하고, 심지어 흥청의 가족들에게까지 돈을 주어 몸을 치장하도록 하였다. 곱게 단장하지 않은 기녀는 의금부에 가두기도 하였다. 지금의 ‘흥청거리다’라는 말은 연산군대의 기생 ‘흥청’에서 유래된 것이고, 흥청이 나라를 망쳤다는 의미로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보다 못한 내시 김처선이 술에 취에 임금을 욕하자, 연산군은 즉시 김처선을 하옥하여 사사시켰다. 김처선의 재산을 모두 다 빼앗고 그 집을 연못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한 양자(養子)를 비롯하여 칠촌까지 벌하고, 김처선 부모의 무덤을 뭉개기도 하였다. 한편 연산군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게 애정을 느껴 국가재정으로 많은 쌀과 콩 등을 하사하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큰어머니를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박씨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비애감을 느껴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이는 사실여부가 확실치 않다. 이전에서도 밝혔듯이 중종 때 쓰여진 ‘연산군일기’의 내용은 연산군을 천하의 몹쓸놈(?)으로 만들기 위해 다소 왜곡과 과장이 있는 듯하다.)

연산군의 방만한 국정운영과 절제 없는 사치와 향락으로 국고는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조선은 몇 년간 큰 흉년을 겪게 되어 국가 재정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향락을 그칠 생각은 하지 않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했던 공신전(세습토지)을 다시 거두어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였다.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훈구세력들의 경제권마저 위협 당하자, 이때까지 국왕의 비위를 맞추던 훈구세력들이 왕에게 간언(諫言)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연산군이 곱게 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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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갑자사화 1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1편

■ 연산군과 갑자사화 1편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가 폐위된 것을 안 것은 즉위한 다음해 3월 선왕(성종)의 묘지문을 보면서였다. 이때부터 연산군은 자식된 당연한 도리로 생모의 죽음을 애도하고 명예를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윤씨 묘를 이장하고, 그녀를 모시는 사당을 효사묘(孝思廟)로, 능을 회릉(懷陵)이라고 정하였다. 오늘날 서울시 동대문구 회기동 일대이다. 이때도 당시 젊은 삼사의 언관들은 몇 년을 두고 이를 반대하였다. 물론 언관들이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법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들은 반대하면서 그 근거를 선왕의 뜻이 아니라는 것으로 일관했다. 하루는 대사헌 김심이 휘하의 여러 대관들을 거느리고 연산군 앞에 가서는 “선왕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고집하여 뜰에서 10여 일이나 버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연산군의 의도대로 시행되고야 말았다.

그러나 계속된 젊은 언관들의 반대는 왕조국가의 절대 지존인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연산군은 삼사의 언관들을 비롯한 사림들을 왕을 능멸하는 존재라 하여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다. 젊은 언관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는 연산군뿐만이 아니고, 이극돈·유자광·노사신·윤필상·한치형 등의 훈구세력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그들의 갈등의 골은 싶어만 갔고, 김일손의 사초(史草)를 빌미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충돌이 일어났고(무오사화), 많은 사림들이 죽임을 당하고 낙향함으로써, 결과는 훈구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연산군은 무오사화로 자신에게 잔소리를 하던 사림들을 숙청하고 조정을 장악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나타난 가장 뚜렷한 주요 현상은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위축이었다. 이제 조정에는 더 이상 왕에게 간언하고 학문을 요구할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훈구대신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연산군의 향락을 지켜만 보거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연산군의 비행을 막을 신하들은 아무도 없었다. 당연히 연산군의 향락은 더욱 더 극심해졌다. 삼사가 제 구실을 못하면서 국왕(과 대신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구상을 한결 자유롭게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연산군은 돌이킬 수 없는 우(愚)를 범하게 되었다.

그는 강화된 왕권을 정치나 제도 개혁 같은 곳이 아닌 사치·사냥·연회·음행 같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곳에 집중했다. 연산군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 누리는 것이 능상(凌上:깔보다)의 척결을 통한 전제적 왕권의 행사라는 정치적 목표의 달성이라고 판단하였다.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되자 조정에는 언론 기능이 상실되었고, 연산군은 절대군주로서의 위상을 높여갔다. 날마다 연회를 열어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았으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로 급기야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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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무오사화 3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3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3편

거듭되는 고문에 칡넝쿨 얽히듯 연루자가 불어났다. 김종직은 이미 죽은 사람이었지만, 김종직을 대역의 우두머리로 간주하여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는 형(부관참시:剖棺斬屍)을 내리고, 생전에 지은 그의 많은 저서들을 불살라버렸다. 김일손·이목·허반·권오복·권경유 등은 세조를 욕보였다는 죄목으로 능지처사에 삼족(三族)이 처형을 당했다.

그리고 표연말·홍한·정여창·이주·김굉필·이계맹·강혼 등은 〈조의제문〉의 내용에 동조했거나 김종직의 문하생으로서 당을 이루어 국정을 어지럽게 했다는 죄로 곤장을 맞고 귀양을 보냈다. 또한 김종직의 관작만을 빼앗자고 주청한 대간(臺諫)들도 모두 죄를 주었고, 이극돈·유순 등은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알리지 않았다고 하여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로써 성종 때 대거 진출했던 사림은 처형되거나 유배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받고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씨가 말라버렸고, 귀찮고 말 많던 사림들을 싹쓸이하고 난 연산군은 신하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 권력자로 부상했다. 이 무오사화를 주도한 윤필상·노사신·한치형·유자광 등 훈신들은 논밭과 노비 등을 상으로 받고 그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이 옥사(獄事)의 주모자 가운데서도 유자광은 권력의 정상에 오르면서 위세를 떨쳤고, 연산군의 폭정과 훈구파의 득세로 조정의 분위기도 크게 경색되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4년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파평부원군 윤필상(尹弼商), 선성부원군 노사신, 우의정 한치형(韓致亨), 무령군 유자광이 비밀스러운 일을 아뢰기를 청하고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출입을 관장케 하니 사관은 참여할 수 없었다. ……곧 의금부 경력 홍사호(洪士灝)와 도사 신극성(愼克成)이 경상도로 급파되었는데, 외부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다.』

이 기록이 보여주듯이 사화는 소수의 대신들이 비밀리에 보고하고 국왕이 재가하면서 급작스럽게 발발했다. 이렇게 시작된 사화는 같은 달 27일 주요 연루자들의 처벌 내용을 확정해 전교(傳敎- 임금이 명령을 내림)함으로써 일단락되기까지 채 한 달도 걸리지 않았으며, 본격적인 추국이 시작된 시점부터 계산하면 20일도 되지 않았다. 즉 돌발적으로 일어나 매우 짧은 기간 안에 전격적으로 마무리된 사건이었던 것이다. 무오사화가 상당히 목표를 가진 정치적 숙청이었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무오사화는 사림 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훈구세력이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띤다. 무오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훈구세력에게로 넘어갔지만, 6년 뒤 조정에는 다시 한 번 피바람이 불어 닥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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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2편

사화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던 것은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춘추관 기사관(記事官)이었던 제자 김일손이 사초(史草)에 실은 것이었다. 《조의제문》이란 \의제를 애도하는 글\이란 의미로 김종직이 생전에 꾼 꿈에 대해 쓴 글이었다. 꿈에 신(神)이 나타나서 "나는 초나라 회왕 손심(의제)인데 서초패왕 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에 잠겼다." 라고 말하곤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 꿈을 꾼 후 김종직은 글을 지어 의제를 조문했는데, 그 글이 《조의제문》이다. 1498년 실록청(實錄廳)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실록청의 당상관으로 임명된 이극돈은 ‘조의제문’이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고 즉위한 것을 빗댄 것으로 세조를 비방하는 내용이라고 유자광에게 알렸다.

유자광은 노사신·한치형·윤필상·신수근 등을 포함해서 당시 사림파로부터 탄핵을 받고 있던 외척과 함께 김종직과 김일손 일파를 연산군에게 고변(告變)했다. 무오사화의 발생과 전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신하는 단연 유자광이었다(물론 최종적이며 최대의 결정권을 행사한 사람은 국왕인 연산군이었다). 일찍이 성종 때 유자광은 김종직과 묵은 원한이 있었는데, 이극돈(李克墩)이 김일손의 사초와 관련된 문제를 상의하자, 누구보다도 민첩하게 사건의 확대를 주도했다.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은 유자광이 남이(南怡)를 무고(誣告)로 죽인 자라 하여 멸시하였다. 함양 군수 시절에 함양군의 한 정자에 걸려있던 현판을 간신이 쓴 현판이라 하여 떼어내어 불사른 적이 있었는데, 이 현판의 주인공이 바로 유자광이었다. 평소 서자(庶子)라 하여 찬밥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었고, 김종직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던 유자광은 이 일로 단단히 복수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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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의 발고로 절대로 사초를 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규정을 어기고, 훈구대신들은 김일손이 기록한 사초를 발췌하여 연산군에게 바쳤다.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 조의제문을 검토하던 연산군은 분기탱천하였다. 세조가 과부가 된 자기 며느리 귀인 권씨를 범하려 했다는 소문이 사실인 양 기록되어 있었고, 단종의 시신을 산 속에 넣어 까마귀와 솔개가 날아와 쪼아 먹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산군은 원래 사림파의 간언(諫言)과 권학(勸學)에 증오를 느끼고 학자와 문인들을 경원(敬遠)했을 뿐 아니라 자기의 방종과 사치 행각에 추종하는 자를 좋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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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받은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의 제자들을 모조리 잡아 보름동안이나 직접 국문을 시작했다. 연산군은 이런 불충한 사초를 쓴 까닭을 날카롭게 추궁했다. “이것은 반심(反心)을 품은 것이 분명한데, 어째서 너는 세조의 후손이 다스리고 있는 조정에서 벼슬했는가?” 김일손은 반역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문제된 내용은 이런저런 사람들에게서 들었거나 자신의 소박한 판단에 따라 작성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7월 12일부터 26일까지 신문한 끝에 이 사건은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지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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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 연산군과 무오사화 1편

조선 시대에는 모두 네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년)의 갑자사화, 중종 14년(1519년)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1545년)의 을사사화가 그것이다.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에서 ‘사화(士禍)’라고 부른다. 다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태종에서 세조대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조선의 국가 체제는 성종 대에 이르러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경국대전》의 반포,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의 실시 등 법제가 완성되고, 유학이 일어나면서 유교문화가 융성했다.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세조 이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렴청정을 끝내고 1476년(성종7년)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 사림세력들을 대거 등용했는데, 이로부터 정치·경제·사상 등 여러 면에 걸쳐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깊어갔다.

훈구세력은 예종과 성종 초반에 걸친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수렴청정기간 동안 남이(南怡), 구성군 준(龜城君浚)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장악하고, 벌족(閥族)을 이루면서 적폐의 무리가 되어있었다. 한편 길재(吉再)로부터 학문적 계통을 이어받은 사림파는 경제적으로 지방의 중소지주적 기반을 지니고 있으면서 훈구파의 대토지사유화를 시정하려고 했다. 또한 이들은 사상적으로 경학(經學)에 충실하고, 기본정신을 성리학에서 찾고 있었다.

성리학적 질서로 향촌을 정리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 이 같은 사림세력의 정치·경제·사상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결합되면서 김종직을 필두로 김굉필·정여창·김일손 등의 사림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림파가 급속히 성장하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은 이에 위협을 느끼고 사림파에 대한 숙청을 꾀하게 되었다. 그 갈등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 1498년의 무오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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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파는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3사(三司)에 진출하여 언론과 문필을 담당하면서 당시의 집권세력인 유자광·이극돈·윤필상 등을 비판했다. 김종직은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무고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김일손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소릉(昭陵)을 복구할 것을 주장하고 세조의 실정을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이목은 윤필상을 불교숭상을 주장하는 간귀(奸鬼)로 지목하며 탄핵했다. 사림을 중용한 성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효과적인 반격을 하지 못했던 훈구파는 연산군의 즉위를 계기로 중앙정계에서 사림세력을 제거하고자 본격적으로 칼을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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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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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각축전(角逐戰)을 벌이다

‘서로 이기려고 다투어 덤비는 싸움’을 표현하는 말이다. 실력이 비슷해서 막상막하인 경우 서로 이기기 위해 다툴 때 ‘각축전(角逐戰)을 벌인다’ 고 하는데, 이 말은 동물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에서 따온 말이다. 동물들은 자기의 영역을 다투거나 짝짓기 상대나 먹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싸움을 벌인다. ‘각(角)’은 동물의 뿔을 뜻하는데, 사슴이나 염소 같이 뿔이 있는 동물은 그 뿔을 맞대고 싸우므로, ‘각(角)’은 다툰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또 ‘각(角)’은 면과 면이 만나는 뾰족한 모서리를 뜻하기도 하는데, ‘각을 세운다’고 하면 모서리를 날카롭고 뾰족하게 만든다는 것으로, 날카롭게 대립한다는 뜻이 된다. ‘축(逐)’은 ‘쫓다. 쫓고 쫓기면서 다투다. 경쟁하다’ 는 뜻의 한자로 ‘우리를 뛰쳐나온 돼지를 잡기 위해 뒤쫓아 간다’는 의미의 글자이다. 그러므로 각축(角逐)은 글자 그대로 뿔을 맞대고 다투며 쫓아다니는 모습을 나타낸다. 그래서 ‘서로 이기려고 다투는 것’을 의미할 때 쓰인다.

2. 자웅(雌雄)을 가리다

암컷 자(雌), 숫컷 웅(雄)으로 구성된 ‘자웅’은 글자 그대로 수컷과 암컷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본디 자웅은 역(曆)에서 나온 말로서, 자(雌)는 밤은 나타내고 웅(雄)은 낮을 가리키는 말이다. 낮과 밤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고, 서로 번갈아 가면서 자기 세상을 만든다. 즉, ‘자웅(雌雄)’은 승부, 우열, 강약 따위를 나타내는 말로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자웅을 가리다’ 혹은 ‘자웅을 겨루다’ 는 막상막하의 비등한 힘을 가진 상대끼리 서로 승부를 겨루어 승자를 가릴 때 쓰는 말이다.

3. 샅샅이

‘샅샅이 뒤지다’

‘샅샅이’는 ‘샅’이라는 말이 두 번 반복됨으로써 그 뜻이 강조되어진 말이다. 그럼 샅은 어떤 뜻일까? ‘샅’은 두 다리 사이나 또는 두 물건 사이의 틈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이를 뜻하는 다리와 다리 사이를 가리키는 옛 글자로 ‘삿ㅎ’이 있는데, 이것이 ‘샅’으로 변한 것이다. 그러므로 샅샅이는 물건 사이사이 틈을 뜻하는 글자인 샅이 반복되어 ‘틈이라는 틈 모두 다’ 또는 ‘조금이라도 틈이 있는 곳은 모조리’라는 뜻으로 쓰여서, ‘구석구석, 빈틈없이’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다리사이라는 의미의 ‘샅’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단어로 ‘샅바’가 있다. 샅바는 씨름할 때 허리와 다리에 둘러 묶어서 손잡이로 쓰는 천을 말한다.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이나 또는 좁은 골짜기 사이를 ‘고샅’이라고 하는데, 이것도 ‘골샅’에서 앞글자의 받침에 있는 ‘ㄹ’이 떨어져 나가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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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이런 꿈 자주 꾼다면..

노년에 이런 꿈 자주 꾼다면..

노년에 이런 꿈 자주 꾼다면..

▶ 파킨슨병 경고 신호

노년에 꾸는 잦은 악몽이 파킨슨병을 예고하는 경고 신호일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외신에 연구진에 따르면 67세 이상 노인 3818명을 최장 12년간 추적 조사한 자료를 분석한 끝에, 악몽을 자주 꾸는 사람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을 확률이 더 높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파킨슨병은 뇌 속 신경전달물질 중 운동에 필요한 ‘도파민’(dopamine)을 분비하는 신경세포가 원인 모르게 서서히 소실되어 가는 질환이다. 치매 다음으로 흔한 대표적인 퇴행성 뇌 질환으로 알려져 있다. 보통 근육 경직, 몸 떨림, 느린 동작, 자세 불안정 같은 운동장애 증상이 나타난다.

연구진은 악몽을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 꾸는 노인(4.3%)은 그렇지 않은 노인(2.2%)보다 파킨슨병 발병률이 약 2배 더 높았다고 설명했다. 또 연구 기간에 91명이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는데, 이들 대부분 연구 시작 5년 이내에 증상이 발생했다. 잦은 악몽이 파킨슨병의 진행을 알리는 전조 증상일 수 있음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이같은 상관관계를 두고 연구진은 파킨슨병 초기 단계에서 수면 중 부정적인 감정을 억압하는 뇌 부위의 퇴행이 시작되기 때문일 수 있다고 추측했다. 그러면서 악몽이 파킨슨병을 일찍 발견하게 되는 지표가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렘(REM) 수면장애가 파킨슨병 위험 증가와 연관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수면은 렘수면과 비렘(non-REM)수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렘수면은 꿈을 꾸는 수면으로 몸은 마비 상태이나 뇌는 활발히 활동한다. 반면 비렘수면은 몸은 움직일 수 있지만 뇌는 활동하지 않는 상태다.

렘수면 장애는 꿈속 내용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와 싸우는 꿈을 꾼다면 발로 벽을 차거나 옆 사람을 때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경우다. 이같은 렘수면 장애의 70%는 파킨슨병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