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2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2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2편

거창군부인 신씨는 나름대로 남편 연산군에게 올바른 정사를 하라고 진심어린 청을 올리기도 했다. 오히려 신씨 부인이 적극적으로 연산군에게 간청을 드릴라 치면 신씨 부인의 안위(安慰)를 걱정하여 주변 상궁들이 가로막고 나섰다고 한다. 간신배에 둘러싸여 전국에서 모아온 천여명의 이쁜 운평과 그중에서도 뛰어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삼백여명의 흥청들과 날이면 날마다 연회를 베풀고 술과 향락에 빠져 지냈으니 부인의 잔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덕(?)에 연산군의 광폭한 행동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신씨 부인은 살아남아 63세까지 장수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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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패륜행위는 놀랄만한 것 들이었다. 장녹수와 사냥을 즐기고 오다가 술에 취한 연산군이 창덕궁 금호문 앞에 있는 정업원의 비구니 8명을 겁탈한 적도 있다. 치욕을 참지 못해 그 비구니들은 전부 목을 매어 자결했다. 가장 으뜸으로 꼽을 만한 패륜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 사건’이다. 판부사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장녹수 하고 어깨를 견줄만한 미인은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 뿐‘ 이라는 얘기로 부추긴 것이다. 월산대군은 아버지 성종의 형님이고 연산군에게는 큰아버지다. 큰어머니를 욕보이려 했다는 믿을 수 없는 패륜행위다. 연산군이 선물을 잔뜩 꾸려 백모(큰어머니)의 집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왕비 신씨는 깜짝 놀라 황급히 채비를 차려 말리러 나서자, 입시 상궁이 가로 막고 나섰다. 신씨의 안위를 걱정해서이다. 연산군은 결국 월산대군 부인을 집요하고 강압적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고, 박씨부인은 동생 박원종에게 유서를 남기고 자결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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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박원종은 피눈물을 쏟으며 이를 갈았을 것이다. 나중에 중종반정에 적극 가담하여 누나의 복수를 해내고 만다. (’연산군일기‘는 중종 때 쓰여진 것이므로, 반정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연산군의 폭정과 패륜은 일부 과장되거나 왜곡된 부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진위를 확실히 알 수 없는 내용도 있다.)

갑자사화가 있던 날, 연산군이 성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와 귀인 엄씨를 때려죽이고 장검을 뽑아든 채 대비전으로 쳐들어가자 울면서 그의 팔을 잡고 간하였는데, 그녀가 그날 연산군을 저지한 유일한 인물이었다. 연산군의 성격상 그 즉시 신씨르 베어버려도 이상할 것이 없었으나, 연산군은 말없이 칼을 꽂고 자리를 옮겼다. 1502년 아버지 신승선이 사망할 당시의 《연산군일기》 기록을 보면, 연산군은 "신씨는 만삭이라 친상 중이지만 고기를 못 먹게 할 수는 없다" 고 하였고, 아예 거애(곡하는 것)도 못하게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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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부인 신씨 1편

거창군부인 신씨의 아버지는 두 번에 걸쳐 장원급제하고 현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신승선이고, 어머니는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딸 전주 이씨로, 종친세력이었다. 워낙 연산군의 악명(?)이 높다보니 왕비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도 없고, 남편을 잘못 만나 우리 역사에서 거의 존재감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왕실 유례 상 간택 없이 세자빈으로 직접 뽑힌 인물이다. 13세가 되는 1487년 3월 신씨를 세자빈으로 삼으라는 성종의 교지가 내려진 뒤 이듬해 2월 14세에 두 살 어린 세자 이융(연산군)과 결혼했다.

결혼하는 날 몹시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이 날의 비바람은 앞으로 순탄하지 못한 그녀의 인생을 예고한 것은 아닐까. 왕세자(王世子)로 있던 융(연산군)과 가례를 치르고 세자빈(世子嬪) 신분으로 입궁하였으며, 1494년 연산군 즉위와 함께 왕비(王妃)에 봉해졌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인원덕왕비(齊仁元德王妃)”라는 존호를 받았으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폐비(廢妃)가 되어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으로 강등되었다. 연산군이 쫓겨난 왕이므로 죽은 뒤 시호를 받지 못한 것과 같이 신씨 부인도 역시 시호(〇〇왕후)를 받지 못하고 그냥 ‘거창군 부인 신씨’라 불리우고 종묘에도 위패가 모셔지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신씨(愼氏)는 온순하고 근면하여, 아랫사람들을 은혜로써 어루만지는 훌륭하고 덕이 있는 인품의 소유자였다. 왕은 비록 미치고 폭정을 일삼았지만, 왕이 총애하는 사람이 있으면 비(妃)가 또한 더 후하게 대해주어, 연산군마저도 그녀의 덕을 높이 사고 매우 소중히 여겼다고 한다. 신씨는 내명부를 이끄는 왕비였으면서도 궁녀와 후궁에게 존댓말을 사용했을 정도로 순진한 성격이었다. 오죽했으면 사관들마저 "중전이 너무 답답하다."라고 한숨을 내지을 정도였다. 왕이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음란하고 방종의 극치를 이루는 것을 볼 적마다 밤낮으로 근심하였으며, 때론 울며 간곡하고 절실하게 간하였다. 연산군도 그녀가 \궐내 야당\으로 직언을 해도 듣기만 할 뿐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칭찬했다. 중종반정 당시 울부짖으며 왕(연산군)을 따라 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남편인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를 갔지만, 별다른 죄가 없는 신씨는 폐비로 강등되기만 했을 뿐, 별다른 처벌없이 외가에서 지낼 수 있었다.

연산군은 강화 교동에서 31세(1506년)로 곧 죽은 반면, 폐비 신씨는 30여년을 더 살다가 1537년에 사망하였다. 슬하에 5남 1녀를 낳았는데, 이 중 폐세자 이황, 창녕 대군(昌寧大君) 이성(李誠), 휘순 공주(徽順公主)를 제외하고는 모두 요절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두 아들마저 중종반정 때 폐서인-위리안치 과정을 거쳐 모두 사약을 받아 죽고, 휘순공주만 남았다. 다른 후궁들의 자식들도 비명횡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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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척지다

‘서로 원한을 품고 미워하다’ ‘등을 돌리고 원수지다’ 는 뜻으로 사용되는 ‘척지다’는 원래 소송과 관련된 말이다. 소송이 제기되면 재판을 열어 옳고 그름을 가리게 되는데, 소송을 거는 사람을 원고, 상대방을 피고라고 한다. 조선 시대에도 개인 사이의 다툼이 해결되지 않을 때는 소송을 제기하고 재판을 열었다. 당시의 재판관은 각 고을의 수령(사또, 원님)이었다. 이때 소송을 당하는 피고를 ‘척’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척지다’는 ‘소송을 걸어 다른 사람을 피고로 만들다’는 뜻이다. 원고와 피고는 서로 자신이 옳다고 다투게 되므로 사이가 좋을 리가 없고, 심하면 원수지간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원수가 되거나, 사이가 나빠져서 등을 돌리게 되었을 때 ‘척지다’ 라고 하는 것이다.

2. 근사하다

요즘 ‘근사하다’는 말은 ‘그럴듯하다’ ‘괜찮다’ ‘좋다’ ‘멋지다’ 는 뜻으로 주로 쓰인다. 하지만 이 말은 원래 ‘근사(近似)’ 라고 하는 한자의 뜻 그대로 ‘거의 같다’ ‘별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학용어로도 ‘근사치(近似値)’ 라고 하면 ‘가까운 값’ ‘거의 같은 값’ 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라든지 ‘여러 사람의 작품이 근사해서 개성이 없다’는 식으로 쓰여지는 것이 원래의 단어 뜻이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뜻이 변하여 ‘그럴듯하다’ ‘멋있다’ ‘썩 좋다’ ‘괜찮다’ 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고 있다.

3. 숨바꼭질

요즘 아이들에게는 잊혀진 놀이일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 온 동네아이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놀이 중에 ‘숨바꼭질’이라는 것이 있다. 한 명이 술래가 되어 숨은 사람을 찾고, 술래에게 들킨 사람은 다음 술래가 되는 놀이이다. ‘숨바꼭질’이라는 말은 ‘물속으로 숨었다 나왔다 하는 것’을 뜻하는 말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옛날에 쓰던 말 중에 ‘숨박곡질’과 ‘숨박굼질’이 있는데, 숨을 바꾸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숨을 바꾼다는 것은 물속에 들어갔다가 숨을 쉬러 나오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도 남쪽지방 사투리에는 ‘숨바꿈쟁이’라고 해서 잠수부를 뜻하는 말이다. 이 ‘숨박곡질’이란 말이 소리가 변해 ‘숨바꼭질’이 되었고, 뜻도 원래의 뜻에서 더 넓어져, 무엇이 보였다 숨었다 하는 일이나, 숨고 찾는 아이들 놀이를 뜻하게 된 것이다.

숨바꼭질과 같은 말로 ‘술래잡기’가 있다. 숨은 아이들을 찾는 역할을 술래라고 하는데, 이것은 ‘순라’에서 온 말이다. 조선 시대에는 밤이 되면 도성 안에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도둑이나 화재를 막기 위해 포졸들이 도성 안을 살피며 돌았는데, 이 포졸을 ‘순라’ 또는 ‘순라꾼’이라고 했다. 이 순라가 ‘술라’로 소리 나다가 ‘술래’로 변한 것이다. 숨은 사람을 찾으러 다닌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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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과 금손金孫이

■ 숙종과 금손金孫이

■ 숙종과 금손(金孫)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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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주변에 개나 고양이를 반려동물로 키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개는 사람을 밥을 주고 돌봐주는 주인님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고양이는 사람을 자기에게 밥 주고 씻겨주고 시중을 들어주는 아랫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흔히 고양이 집사라고 부른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요즘 말로 고양이 집사라 칭할 만한 임금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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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왕 숙종(1661~1720) 때의 일이다. 숙종은 경기도의 아버지 현종의 묘에 갔다가 병든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하였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굶주린 고양이를 궁궐로 데려 와 치료를 해주고 옆에 두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다. 숙종은 고양이의 털이 금색으로 빛난다고 해서 금덕(金德)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애지중지하며 정을 주었다. 하지만, 금덕이가 새끼를 낳고 얼마 안 돼 죽어버리자, 숙종은 금덕이의 장례식을 잘 치러주고 그 새끼를 금손(金孫)이라 부르면서 더욱 더 아끼고 정을 쏟으며 기르게 되었다. 수라를 들 때도 곁에 앉혀두고 직접 먹이를 먹여 주었고, 정사를 논하는 자리에도 늘 곁에 두고 있을 정도였다. 숙종 곁에서 겸상까지 하며 임금님 수랏상의 고기까지 나눠 먹으며 사랑받았던 금손이는 장희빈 등 후궁들의 질투까지 유발하게 되었고, 임금님의 음식을 훔쳐 먹었다는 오해를 받고 산속의 어느 절로 보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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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60세의 나이로 숙종이 세상을 떠나자 금손이는 어쩐 일인지 식음을 전폐하고 울기만 하다가 끝내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숙종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금손이의 시신은 비단보에 싸여져 숙종 무덤인 명릉 곁에 묻혔다. 숙종이 고양이를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다는 것은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 김시민의 동포집 등의 당시 기록에도 실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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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 주도세력이 급변하는 환국(換局:시국이 바뀜)을 세 차례나 유발하여 수많은 신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과정에서 왕비였던 인현왕후를 내쫓았다가 복위시키기도 했고, 장희빈을 왕비로 삼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했다. 숙종은 이렇듯 어지러운 정쟁(政爭)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나마 고양이 금손이를 통해서 위로 받고 마음을 달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거 민간요법으로 신경통에 고양이 고기가 특효약이라는 소문이 있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꿎은 고양이를 잡아 약으로 쓰는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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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임사홍 4편

■ 간신 임사홍 4편

■ 간신 임사홍 4편

임사홍의 간교함은 자신의 아들마저 희생양으로 삼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희재는 임사홍의 둘째아들로 사림파 영수 김종직(金宗直)의 제자로 무오사화 때 유배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 임사홍이나 동생 임숭재와 달리, 연산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하루는 연산군이 임사홍의 집에 갔다가 병풍에 적혀 있는 시를 보게 되었다.

祖舜宗堯自太平(요순을 본받으면 저절로 태평할 것인데)

秦皇何事苦蒼生(진시황은 무슨 일로 백성들을 괴롭혔는가)

不知禍起所墻內(화가 집안에서 일어날 줄은 모르고)

虛築防胡萬里城(공연히 오랑캐를 막으려고 만리장성을 쌓았구나)

이 시는 임희재가 쓴 것으로, 겉으로는 진시황을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지만 실제로는 진시황에 빗대어 연산군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연산군은 불편한 심기를 내보이며 누가 쓴 것인지를 물었고, 임사홍은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연산군은 “경의 아들이 불충하니, 내가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그의 뜻을 물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지적에 바로 동의를 했고, 결국 임희재는 처형되었다. 혹자는 임희재가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그를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讒訴)한 것이라고 하는 설(說)도 있다. 설마 아무리 간신배 임사홍이라 해도 자신의 아들 목숨까지 내버릴 수 있었을까.

여하튼, 임희재 사건 이후 연산군은 그를 더욱 신임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더욱 잔인한 사람으로 여겨 매우 경계하게 되었다.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아들의 죽음 앞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잔치를 열었던 임사홍. 그에게 있어서 권력의 단맛은 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후 임사홍은 연산군의 입맛에 맞는 최측근으로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조선 팔도의 아름다운 여자를 뽑아 연산군에게 바치는 채홍사(採紅使)로 임명된 것이다. 임사홍은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운평(運平: 연산군 때에 여러 고을에 모아놓은 가무기생)과 흥청(興淸:운평 가운데서 대궐로 뽑혀온 기생)을 뽑아 연산군에게 바쳤다.

흥청들과 어울려 ‘흥청망청’하고 폭정(暴政)을 일삼던 연산군은 결국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종말을 맞았고, 최측근 임사홍 역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뒤 20여일 후 부관참시 당하고 가산(家産)을 몰수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몰수된 재산의 일부는 한때 함께 사화를 일으켰지만, 중종반정 공신으로 배를 갈아 탄 또 다른 간신 유자광에게 돌아갔다. 그리하여 임사홍에게는 조선시대 대표적 간신이라는 오명(汚名)과 낙인이 영원히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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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임사홍 3편

■ 간신 임사홍 3편

■ 간신 임사홍 3편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은 막강한 권력자가 되어 화려하게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그가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한 사람은 아들 임숭재와 며느리 휘숙옹주(성종의 딸)였다. 그 이유는 휘숙옹주가 많은 이복 여동생 중에서도 특히 연산군이 아끼는 여동생이었고, 그녀의 남편인 임숭재도 연산군은 특별하게 생각했다. 아들과 며느리 덕분으로 임사홍은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정계로 돌아온 임사홍은 자신을 쫓아냈던 이들을 향한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시작하였다.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문제를 100년이 지날 때까지는 아무도 논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겼지만,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문제를 일부러 끄집어내었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임사홍의 폭로로 시작된 사화가 바로 1504년(연산군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다. 갑자사화는 임사홍이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수단으로도 활용하였기 때문에 사림파뿐만 아니라 훈구파 내에서도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자신의 생모가 참소(讒訴)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산군의 분노는 폭주하기 시작했고, 그 사건에 연루된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극형에 처하거나 이미 죽은 자들은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베고(부관참시:剖棺斬屍),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쇄골표풍:碎骨飄風). 더 나아가 시체를 강물에 던져 물고기 밥이 되게 하거나, 그 자제나 사위들까지 죽이거나 먼 곳으로 귀양을 보내고 부인이나 딸은 종으로 삼았다. 천하의 한명회도 부관참시를 피하지 못할 정도로 연산군의 광기는 극에 달하였다.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이러한 잔인한 일들이 모두 임사홍이 사적인 감정을 품고 임금을 유도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평가했다.

임사홍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갑자년 이후로도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참시(斬屍)하는데 열을 올렸다. 당시에 사람들이 임사홍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두 신씨(愼氏: 당시 실세였던 왕비 신씨의 오빠들)들도 조심스럽게 섬겼다. 연산군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곧 그에게 쪽지로 통지하고, 임사홍은 바로 들어가 시행하여 명령이 내려지니, 그가 부도(不道)한 것을 유도한 일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국역조선왕조실록 중종 1년 병인(1506) 9월2일 기사에 이런 내용이 있다.

『연산군 시대의 간신 임사홍(任士洪)과 아들 광재(光載:공주의 남편), 숭재(崇載:옹주의 남편)등을 사람들이 미워했는데, 그때 사람이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읊었다.

小任崇載大任洪(작은 소인 숭재, 큰 소인 사홍이여!)

千古姦兇是最雄(천고에 으뜸가는 간흉이구나!)

天道好還應有報(천도는 돌고 돌아 보복이 있으리니, 알리라)

從知汝骨亦飄風(네 뼈 또한 바람에 날려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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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임사홍 2편

■ 간신 임사홍 2편

■ 간신 임사홍 2편

임사홍은 조정 공신들과 외척들이 권력을 남용한다고 비판하였으며, 당대 권신인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월권행위를 줄기차게 비난하기도 했다. 그래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소인배’라는 말을 들을 만큼, 임사홍은 조정 대신들의 공공의 적(敵)으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종친세력인 동시에 성종의 총애로 탄탄대로를 걷던 임사홍도 1478년(성종9년) ‘흙비사건’으로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게 되었다.

‘흙비’는 지금으로 말하면 ‘황사(黃砂)비’를 말하는데, 1478년 4월 초하루에 흙비가 심하게 내리자, 사람들은 이를 하늘의 변괴로 생각하여 모두 두려워하였다. 이에 사간원·사헌부·홍문관에서는 성종에게 이것을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근신해야 하며, 당분간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도승지 임사홍은 흙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겨 재앙(災殃)으로 보지 않았고,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이 시점에서 술을 금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에 삼사(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에서는 임사홍을 맹렬히 성토했다. 그들은 임사홍을 소인(小人)이라 하고,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아첨에서 나온 응큼하고 간사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사홍의 아버지인 임원준까지 탐오(貪汚: 욕심이 많고 하는 짓이 더러움)한 사람이었음을 언급하며, 가풍이 바르지 못하여 임사홍이 간사한 인간이라고 몰아갔다. 이처럼 대간들이 임사홍을 심하게 탄핵한 이유는, 임사홍이 성종의 총애를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꼴 보기 싫었을 뿐만 아니라, 왕실과 혼인으로 맺어진 연줄을 이용하여 권력을 누리고 국정을 농단(壟斷: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나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종은 처음에는 대간들의 탄핵을 제지하며 임사홍을 감싸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대간들의 탄핵이 점점 격화되자, 성종도 대간들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효령대군의 손녀인 임사홍의 부인이 남편의 무고함을 상소했다. 그리고 첫째 며느리인 현숙공주(당시에는 정숙공주라 함)는 아버지 예종이 돌아가신 후로 임사홍을 친아버지와 같이 의지하고 있다며 울면서 읍소(泣訴)했다. 이처럼 왕실의 여인들까지 나서서 만류하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임사홍은 의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임사홍의 당인(黨人)이었던 유자광(柳子光)도 동래로 유배를 갔다. 그 뒤, 유자광과 임사홍은 성종이 죽을 때까지 숨죽이며 복수의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성종 사후 연산군이 즉위하자, 마침내 그들은 연산군의 비위를 맞추면서 재기할 수 있었고, 각각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사화를 주도하는 주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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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임사홍 1편

■ 간신 임사홍 1편

■ 간신 임사홍 1편

1504년 연산군 때 일어난 비극적인 갑자사화(甲子士禍)의 신호탄을 올린 간신 임사홍(任士洪,1445~1506)은 두 아들을 부마(駙馬:임금 사위)로 만들어 왕실과 인연을 맺으면서, 세조에서 연산군 대에 이르기까지 정치적으로 탄탄대로를 걸었던 인물이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처형을 당했고, 연산군의 악행(惡行)과 패륜(悖倫)적 행동을 부추긴 간신의 대명사로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 당대에 정치적 출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했으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함은 물론, 우리 역사에 영원한 간신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임사홍의 본관은 풍천(豐川)이고, 자는 이의(而毅)이다. 처음 이름은 사의(士毅)였으나 뒤에 사홍(士洪)으로 개명하였다. 효령대군의 손녀딸이자 보성군 이합의 딸인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임사홍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 아들 중 두 명을 왕실의 사위로 만들었다. 첫째 아들 임광재(任光載)는 예종(睿宗)의 딸인 현숙공주(顯肅公主)와 결혼하였고, 넷째 아들 임숭재(任崇載)는 성종(成宗)의 딸인 휘숙옹주(徽淑翁主)와 혼인하였다. 이렇게 임사홍은 왕실과 이중으로 혼인관계를 맺어, 부마 집안으로써 권력의 핵심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에도 이러한 왕실과의 정략적 혼인관계로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좋게 보진 않았던 것 같다.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가 휘숙옹주와 혼인한 것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한 사관(史官)의 기록이 남아있다. 두 사람이 혼인하는 날 밤 임사홍의 집에서 불이 났는데, 사관은 이것을 복이 지나쳐 재앙이 발생한 것이라고 비평했다. 『임사홍은 소인(小人)이다. 불의(不義)로써 부귀를 누렸는데도, 그 아들 임광재가 공주와 혼인을 했고, 지금 임숭재가 또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여 그 집에 불이 난 것이다.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니, 천도(天道)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임사홍은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았고 글을 잘 지었다. 그 뒤 한성부의 저명한 문인에게 수학하였으나 그가 후일 간신의 대명사로 몰렸으므로 그의 스승이 누군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1465년(세조11년)에는 알성문과에, 1466년(세조12년)에는 사재감사정(司宰監司正)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그는 시문과 서예 솜씨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기도 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하여 관압사(管押使)·선위사(宣慰使) 등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던 성종은 임사홍이 종친(宗親:임금의 친족)임에도 불구하고 관직에 등용하여, 홍문관교리·승지·도승지·이조판서·대사간·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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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3편

■ 황희 3편

■ 황희 3편

황희는 조선 초기에 활동한 훌륭한 정치가로 첫손가락에 꼽힌다. 또 청빈과 근면을 생활지표로 삼았다. 오늘날 공직자들이 본받아야할 대표적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무골호인(無骨好人)으로 보일 행동을 많이 했다. 그가 순하고 사람 좋기로 알려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자기 집 계집종들이 싸움박질을 하고 있었다. 그중에 한 계집종이 황희 앞으로 달려와 고자질을 하자,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러자 다른 계집종이 억울하다는 듯이 달려와서 울며 말했다. “대감마님, 거짓말입니다.” 하자, “그래, 네 말도 옳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황희의 아들이 물었다. “어찌 아버지께서는 이 말도 옳고 저 말도 옳다고 하십니까?” 황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네 말도 옳구나!”

그러나 그는 결코 무골호인(無骨好人)만은 아니었다. 그는 세상 자질구레한 일들에 대해서는 무심한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한 치의 빈틈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는 작은 일에는 너그럽고 큰일에 엄격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청렴결백했다. 벼슬자리에 오르면 그 권세로 재물을 늘리는 도구로 삼는 자들이 많다. 하지만 그는 녹봉(祿俸:나라의 봉급)만으로 가족과 종들의 생활을 꾸려 나갔다. 그러다 보니 늘 살림은 쪼들렸고, 그의 집은 지붕을 제대로 잇지 못해 늘 비가 샜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비 오는 날이면 방 안에서 우산을 받치고 책을 읽었다고 하는 웃지 못할 일화도 있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몸가짐을 철저히 했고, 친척이나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코 벼슬자리를 주지 않고, 과거시험이나 능력에 따라 정당하게 벼슬을 주도록 했다.

그는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그가 죽자, 임금은 3일 동안 조회를 중지했다. 『조정에서나 민간에서나 모두 놀라고 탄식하면서 조상(弔喪)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여러 관청의 아전들과 종들도 모두 제물을 차려놓고 제사 지냈으며, 이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오늘날 그의 유적은 파주 일대에 보존되어 있다. 특히 임진강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伴鷗亭:기러기와 벗하는 정자)은 그가 만년에 임진강 철새들을 바라보면서 유유자적했던 곳이다.

황희의 초상화는 불행하게도 일본의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는데, 초상화를 보면 무골호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한다. 체격이 크고 가슴과 어깨가 벌어져 있으며, 수염과 짙은 구렛나루가 무인(武人)과 같은 인상을 주기까지 한다. 실제로 그의 행적과 조선 전기의 야사를 보면 그는 도량이 크고 선이 굵은 인물로, 소소한 일에 구애 받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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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2편

■ 황희 2편

■ 황희 2편

황희는 관직에 들어선 뒤, 한 번의 유배와 두 번의 가벼운 파직을 겪었다. 그가 유배당한 것은 양녕대군의 폐위와 충녕대군(세종)의 세자책봉을 크게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양녕대군이 적자이므로, 적자를 제치고 다른 아들로 세자를 삼으면 후세에 큰 환란의 불씨가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는 또 양녕대군의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고, 양녕의 두터운 친구이기도 했다. 이때 그는 파주 교하에 유배되었다. 가까운 곳에 두려는 태종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에게 죄를 주어야 한다고 대신들이 거듭 주장하자, 그의 조상 고향인 남원으로 유배지를 바꾸었다. 태종은 그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유배생활을 하도록 특전을 베풀었다. 그는 남원 유배지에서 3년을 보내면서 문을 닫아걸고 친구도 만나지 않으며 글 읽기에만 열중했다.

또 그가 파직된 것은 좌의정으로 있을 때, 그의 지인 태석균(太石鈞)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투옥되었을 때였다. 그는 사헌부에 태석균의 감형을 부탁했다는 죄로 잠시 파직되었다. 이 두 가지 경우 말고는 탄탄한 길을 걸은 셈이다.

세종은 자신의 세자책봉을 반대한 황희를 왕위에 오른 지 3년 뒤인 1422년 좌참찬으로 발탁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떠난 인사였다. 그 뒤 두 사람은 평생을 두고 공적으로는 군신의 관계였고, 사적으로는 둘도 없는 친구의 관계였다.

세종은 말년에 궁내에 부처를 모시는 내불당(內佛堂)을 조성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선은 유교정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이므로 세종의 내불당 조성은 큰 반대에 부딪쳤다. 집현전 학사들은 일제히 업무를 접고 귀가하는 요즘으로 치면 파업을 벌였다. 이에 마음이 상한 세종은 텅 빈 전내(殿內)를 휘둘러보며 옆에 있던 황희(黃喜)에게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했다. 이에 황희는 집현전 학사들을 달래 끝내 내불당을 조성할 수 있게 하였다. 세종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헤아렸고, 세종의 정책에 둘도 없는 조력자가 되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즈음 선비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을 때에도, 또 천첩 소생들에게 비천한 일을 면제하는 조치를 내리려 하여 양반들이 반발할 때에도 세종을 돕고 이해하고 감쌌던 인물이었다.

황희가 죽었을 때 사관은 이렇게 평가했다. 인물평가에 짠 사관이 남다른 찬사를 한 것이다.

『성품이 관후하고 신중하여 재상으로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다. 모습이 풍만해 특출하였고 뛰어나게 총명했다. 가정을 다스림에는 검소했고 기쁨과 노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일을 따질 때에는 공명정대하여 원칙을 살리기에 힘썼으며 마구 뜯어고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 《문종실록》 권12, 2년2월조 -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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