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6일 토요일

중종의 여인들-단경왕후 신씨 2편

■ 중종의 여인들-단경왕후 신씨 2편

■ 중종의 여인들-단경왕후 신씨 2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반정 공신들이 끈질기게 요구했다.

“거사할 때 먼저 신수근을 제거한 것은 대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신수근의 친딸이 궁중에 있습니다. 만약 왕비로 책봉한다면 인심이 불안해지고, 인심이 불안해지면 종묘사직에 관계될 터이니, 은정을 끊고 밖으로 내치소서.”

종묘사직을 위해 이혼하라는 뜻이었다. 중종은 “아뢰는 바가 심히 마땅하지만 조강지처인데 어찌 그리하랴?” 라고 되물었다. 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도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신들은 “종묘사직의 대계를 위해서는 주저하지 마시고 쾌히 결단하소서”라며 중종을 압박했다.

결국 중종반정 직후 8일 만에 신수근의 딸인 왕비 신씨는 신하들의 강권에 의해 궁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중종은 신하들의 강압에 못 이겨 신씨를 사저로 폐출하기는 했으나, 그녀에 대한 정은 잊을 수가 없었다. 잠을 잘 때나 조석을 들 때나 매양 신씨가 곁에 있는 것만 같았고, 폐출되었다는 사실이 느껴질 때마다 허전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리움이 더욱 더 짙어만 갔다. 신씨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던 젊은 중종은 그녀가 나가 있는 집이라도 바라보리라는 일념으로, 자주 높은 누각에 올라 망연히 신씨가 있는 집을 바라보곤 하였다. 신씨는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인왕산에 살며 아침마다 집 뒤 바위에 궁중에 있을 때 잘 입던 분홍치마를 걸어놓아 자신의 안부를 알렸다. 그래서 전설로 전하는 이 바위를 치마바위라고 한다.

이후 중종 역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곳인 모화관에 행차할 때마다 자신의 말을 신씨에게 보냈는데, 그때마다 신씨는 죽을 쒀서 보냈다. 비록 강제로 이혼을 당하기는 했지만 부부간의 애정은 여전했던 것이다. 그렇게 50여년을 살던 신씨는 71세 때 세상을 떠났다.

그 애절한 사연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죽은 지 180여년이 지난 영조 때 단경왕후로 책봉되었다. 권력의 비정함이 불러온 비극이었다. 비록 폐위되었지만,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연산군의 장인(신승선)의 일족이자 신수근(신승선의 아들)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폐위되었기 때문에 나중에 정상 참작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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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여인들 단경왕후 신씨 1편

■ 중종의 여인들 단경왕후 신씨 1편

■ 중종의 여인들 단경왕후 신씨 1편

단경왕후 신씨는 중종의 첫째 왕비이자 신수근의 둘째딸이다. 열세 살 되던 해에 한살 연하의 중종과 혼인해 7년을 부부로 살았다. 겁 많고 소심한 중종은 신씨를 엄마처럼 의지했다. 반정(反正)이 일어나던 날, 박원종은 군사를 보내 중종(진성대군)의 집을 호위하게 했다. 아무런 사전 통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군사들이 들이닥쳐 집을 포위하자 중종은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 이복형인 연산군이 보낸 군사들이 아닐까하고 의심했기 때문이다. 만약 연산군이 군사들을 보냈다면 자신을 역적으로 몰아 고문할 것이 분명했다. 중종은 고문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살하겠다고 했다. 그때 신씨가 애써 말리며 말했다.

“군사들의 말 머리가 집을 향해 있다면 우리 부부가 죽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말 꼬리가 집을 향하고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다면 분명 우리를 호위하려는 뜻입니다. 그러니 알고 난 후에 죽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생사를 함께 하겠다는 신씨의 설득에 중종은 자살 소동을 멈췄다. 그 사이 신씨는 사람을 내보내 무슨 일인지 살펴보게 했다. 과연 말 머리가 밖을 향해 있었다. 그래서 중종은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날로 중종은 경복궁으로 들어가 왕이 되었다. 신씨 역시 중종을 뒤따라 입궁해 사실상 왕비가 됐다. 그런데 조선시대 왕비는 책봉의식을 거쳐야만 정식 왕비로 인정됐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중종 즉위에 뒤이어 왕비 책봉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씨는 왕비에 책봉되지 못했다. 연산군의 측근(처남)으로 반정에 가담하지 않은 신수근의 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신승선-아들(신수근), 딸(연산군의 아내)-신수근의 딸(중종의 아내 신씨)

중종반정을 일으키기 전에 유순정(柳順汀), 박원종(朴元宗), 성희안(成希顔) 등이 신수근에게 접근해서 연산군을 폐위하자는 의사를 전했다. 그런데 중종의 장인이기 전에 연산군의 처남이기도 한 신수근은 이런 제안을 거절하게 되고,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신수근은 반정군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중종은 반정 과정에서 아무런 기여가 없던 터라 발언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신씨를 왕비에 책봉하겠다는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반정 주역들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런데 반정 다음날, 공신들은 신수근을 비롯한 연산군 측근의 자손들을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라고 요구했다. 후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중종이 왕비 책봉을 거론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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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2편

선조가 1567년 왕위에 오르면서 유성룡은 선조 재임 기간 동안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등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며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1589년 이조판서 재임 시절 정여립 역모 사건이 일어나 그 여파로 동인(東人)내에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당파가 분리되었는데, 이때 북인과 맞서는 남인의 영수(領袖)가 되었다. 붕당의 대립이 계속되는 가운데서도 1590년 5월 우의정을 거쳐, 1591년 좌의정과 이조판서를 겸한 것으로 보아 선조의 신망이 두터웠던 듯하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발발(勃發) 1년 2개월 전 정읍현감으로 있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권율을 의주목사로 천거한 것만 보아도,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도 탁월한 것 같다. 류성룡의 결단과 위기 때마다 그의 지혜로움과 리더십으로 인해 어려운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류성룡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지 덕분에 해상에서는 이순신이 불리한 전세를 이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여 왜구를 해상에서 물리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평양성 사수를 포기하고 피난하려는 선조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신의주까지 간다면 다시는 서울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선조는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류성룡은 순찰사 이원익 등과 함께 명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해 평양에 머물렀다. 이후 류성룡은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평양성 탈환을 계획했다. 1593년 1월 평양성을 탈환한 후 이여송이 왜군과의 강화(講和) 협상에 나서자, 이에 반대하고 왜군에 대한 총공세를 주장했다. 1594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선조에게 ‘전쟁에서서 마땅히 지켜야 할 10조목’ 등을 올리면서 전쟁대비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난 후에도 류성룡은 왕명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을 순시하면서 전쟁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서애집(西厓集)에는 이런 류성룡의 활약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하지만, 참으로 답답하게도 선조와 대신들은 전란 중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누군가의 공이 커지는 것을 질투해서 모함하는 일 들이 일어난다. 의병을 일으켰던 합천의 곽재우나 이순신 장군이 대표적인 예이다. 류성룡까지도 사사로운 이유를 들어 파직시키려 한 선조를 보면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류성룡같은 재상과 이순신같은 장군이 있었기에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조정 대신들이 득실거리던 조선이 왜군에게 망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파직 당한 후 류성룡은 1599년 2월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왔고, 형 유운룡과 옥연정사에서 뱃놀이를 하는 등 여유자작한 생활을 하면서 징비록 집필에 들어갔다. 1604년 7월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을 인정받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녹훈됐지만, 그럼에도 그는 주로 집필활동에만 전념하다가 1607년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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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2편

“처음에 남곤이 조광조 등에게 교류를 청했으나 조광조 등이 허락하지 않자 남곤은 유감을 품고서 조광조 등을 죽이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뭇잎의 감즙(甘汁)을 갉아 먹는 벌레를 잡아 모으고 꿀로 나뭇잎에다 ‘주초위왕’ 네 글자를 많이 쓰고서 벌레를 놔 갉아 먹게 했는데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이 만들었다. 남곤의 집이 백악산 아래 경복궁 뒤에 있었는데 자기 집에서 벌레가 갉아 먹은 나뭇잎을 물에 띄워 대궐 안의 어구(御溝)에 흘려보내어 중종이 보고 매우 놀라게 하고서 고변(告變)해 화를 조성했다.”

어찌 됐건 남곤은 기묘사화를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좌의정에 이어 영의정이 됐다. 문장에 능해 정승감이 되리라는 예상은 맞았지만, 문장력으로 얻은 정승이 아닌 정치 공작으로 얻은 지위였다. 중종 22년 남곤이 사망하자 중종은 깊은 애도를 표시하며, 조참(朝參)·경연(經筵)·열무(閱武) 등의 일을 정지하고, 소찬(素饌·고기나 생선이 들어 있지 않은 반찬)을 올리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중종을 도와 역모를 차단하고 그 공으로 최고의 지위에 올랐지만 역사는 남곤을 ‘간신’으로 규정하면서, 그와 같은 인물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야 됨을 경계하고 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남곤이 젊어서는 글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출세에 급해 역모를 조장했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남곤도 자신이 행한 죄를 이미 파악하고 있던 정황도 나타난다. 남곤은 옥사를 주도한 후에 친척과 후배들에게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던졌다. “응당 소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라는 답을 듣고는 하인을 시켜 평생 쓴 초고를 모두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중종 시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의 작품이 대부분 사라져버린 이유다.

최소한의 명예라도 지키기 위해서일까? 죽기 직전 남곤은 자제들에게 “내가 허명(虛名)으로 세상을 속였으니 너희들은 부디 이 글을 전파시켜 나의 허물을 무겁게 하지 말라”고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 비단으로 염습(殮襲)하지 말 것과 평생 마음과 행실이 어긋났으니 부디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남곤은 죽은 뒤 사림파가 다시 권력을 잡고 조광조가 신원 복권되는 과정에서 관작을 모두 추탈(追奪)당했다.

남곤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였지만, 그런 장점은 모두 사라진 채 역사는 그를 간신의 전형으로 기억하고 있다. 권력 때문에 자신의 명성과 원고까지 잃어버린 남곤의 사례는 현 정치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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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1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1편

■ 오명(汚名)을 남긴 남곤 1편

‘중종의 참모’라고 하면 대부분 조광조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지만, 조광조는 한때 중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 결국 중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조광조를 제거하는 데 1등 공신이자, 영의정까지 지냈던 남곤(南袞, 1471~1527년)이야말로 진정한 중종의 핵심 참모였다.

남곤의 자는 사화(士華), 호는 지정(止亭)이요, 본관은 의령이다. 1489년(성종20년)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1494년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남곤이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한 것은 연산군 시대였다. 1496년(연산군2년) 홍문관 수찬에 임명됐으며 이어 사간원 정언(正言·사간원에 속한 정6품 관직)을 지냈다. 실무에도 상당히 능한 관료였고, 특히 문장력을 인정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남곤은 서변(西邊)으로 유배됐으나,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연산군 시대의 유배는 오히려 훈장이 됐다. 1509년에는 황해도 관찰사에 올랐으며, 1511년 4월에는 대사헌이 됐다. 남곤은 뛰어난 문장력과 정치적 감각으로 중종의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지내면서 미래 정승 후보로 떠올랐다.

이런 남곤의 순탄한 행보에 강력한 정치적 라이벌이 등장했으니 바로 조광조였다. 중종 10년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이 올린 상소문은 정국의 이슈가 됐다. 중종의 첫 왕비(단경왕후)로 반정 후 7일 만에 폐위된 신씨의 복위를 청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각각 남평과 보은으로 유배됐다. 그런데 조광조가 이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면서, 박상과 김정의 유배를 묵과하면 자신이 사직을 하겠다고 청했다. 이 발언은 정치 신인 조광조의 이름 석 자를 널리 알리는 큰 계기가 됐다.

우참찬으로 있던 남곤은 조광조의 의견에 동의하며 박상과 김정의 처벌에 반대했다. 이처럼 남곤은 조광조가 정계에 처음 등장했을 때는 우호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이후 조광조가 중종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으면서 신진 세력의 리더로 급부상하자 이를 시기하여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조광조가 정국의 중심에 자리 잡으면서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다양한 개혁 정책이 진행되고, 급기야 기득권 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는 ‘위훈삭제’를 감행하자 남곤은 이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지 않았다.

친구인 심정을 끌어들이고 중종 즉위에 공을 세운 홍경주를 포섭했다. 이들은 중종과 잦은 면담을 통해 조광조의 전횡을 알렸으며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시작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주도하였다. 실록뿐 아니라 ‘연려실기술’ 등 거의 모든 기록에 남곤이 기묘사화의 주모자임을 적시하고 있다. “중종이 조광조와 같은 선비들을 싫어하는 기색이 있는 것을 짐작하고 꾀를 내어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는 기록에서는 조광조 제거라는 중종의 의중을 파악한 남곤이 결국 해결사로 나섰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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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열귀나무】

【생열귀나무】

【생열귀나무】

희귀식물입니다. 이명으로 붉은인가목이라고도 합니다.

잎은 뒷면에 선점이 있고, 가지는 드문드문 갈라지며 열매는 둥글다.

유사종으로

1. 해당화 : 잎에 선점이 없고, 가시에 털이 있고, 잎에 주름이 많음

2. 인가목 : 잎에 선점이 없고, 소화경에 선모가 밀생하고 턱잎 가장자리에 털이 있으며 열매는 타원형

3. 흰인가목 : 꽃이 흰색이고, 열매는 길다

4. 둥근인가목 : 꽃이 흰색이고, 열매는 둥글다.

▷ 학명 : Rosa davurica

▷ 분류 : 장미과

▷ 분포지역 : 한국·일본·사할린·중국 동북부·시베리아 동부·아무르 등지

▷ 서식장소 : 산지 숲 속이나 골짜기

▷ 특징 :

높이는 1∼1.5m이고, 줄기는 적갈색이며 털이 없고 가지가 많이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고 5∼9개의 작은잎으로 구성된 깃꼴겹잎이다. 작은잎은 타원 모양 또는 긴 타원 모양이고 양끝이 뾰족하며 길이가 1∼3cm이다. 잎 표면에는 털이 없고 뒷면에는 주맥을 따라 잔털이 있으며 가장자리에 잔 톱니가 있고 잎자루 밑 부분에 턱잎이 변한 한 쌍의 가시가 있다.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창피하다

체면을 구기거나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창피하다’는 말을 쓴다. ‘창피(猖披)’의 ‘창(猖)’은 ‘날뛰다’ ‘어지럽다’ 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다’ 처럼 안 좋은 현상이 커지고 번질 때 쓰인다. ‘피(披)’는 ‘풀어헤친다’는 뜻이다. 풀어헤치면 속이 드러나고, 속에 감추어진 것을 남들에게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처럼 ‘창피(猖披)’라는 말은 옷은 입었으나 제대로 갖추지 못해 헝클어진 모습을 뜻하는 말이고, 옷매무새를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 너저분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게 되어 부끄럽다는 것이다. 간혹 ‘챙피하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겉모습 뿐 아니라 일을 제대로 못했다거나 양심에 거리끼는 게 있을 때나 떳떳하지 못할 때도 ‘부끄럽다’는 의미로 ‘창피하다’ 는 말을 쓰고, 수줍어서 부끄러울 때도 쓰인다.

2. 동장군

추운 겨울 ‘기상예보’에서 ‘동장군(冬將軍)이 기승을 부린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하는 추위를 용맹하고 무서운 장군의 모습에 의인화시킨 말이다. 이 말은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쳐들어갔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됐다. 1812년 나폴레옹은 6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에 쳐들어갔다. 러시아 군대는 별 저항을 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군대는 쉽게 모스크바까지 갔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도시는 텅 비어 있고 러시아 황제는 항복은커녕 보이지도 않았다. 나폴레옹은 결국 전투다운 전투는 해보지도 않고 후퇴를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추위와 굶주림 때문이었다. 그래서 전투에 진 것이 아니라 추위에 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일로 러시아의 추위를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추위를 의인화해서 나폴레옹 군대마저 물리친 ‘동장군(冬將軍)’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3. 딴전을 피우다

할일이 있는데도 제쳐 두고 다른 일을 하거나, 엉뚱한 일을 할때 ‘딴전 피운다’고 한다. 여기서 딴전은 무엇일까? 옛날에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를 ‘전(廛)’이라고 했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할 때 ‘어물전’은 ‘어물을 파는 가게’ 이다. 면포를 파는 가게는 면포전, 종이를 파는 가게는 지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딴전’이란 다른 전(廛), 그러니까 다른 가게를 말한다. ‘딴전을 피우다’ 는 것은 자기네 가게가 있는데도 남의 장사를 봐주거나 다른 곳에 또 일을 벌이는 것이다. 정작 필요한 일은 하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하는 것이다. ‘딴청’을 피우다, 또는 ‘한눈 팔다’도 비슷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한눈’이란 볼 데를 보지 않고 딴 데를 보는 눈이란 뜻으로, ‘한눈 판다는 것’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일에 관심을 갖는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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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1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1편

■ 류성룡과 징비록(懲毖錄) 1편

임진왜란의 일등공신(一等功臣)을 물어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을 첫 번째로 꼽을 것이다. 하지만, 백성과 조정을 버리고 살길을 찾아 피난을 간 선조를 대신해서 영의정으로 전쟁 현장에서 중요한 상황을 판단했던 전시(戰時) 최고 참모로 활약한 류성룡과 그가 남긴 징비록(懲毖錄)의 가치를 간과(看過)해서는 안 된다. 선조실록을 통해서 본 류성룡의 공과(功過)에 대해 기록은 대체로 부정적인 기록이 많다. 이는 당시 집권세력인 서인(西人)의 관점에서 기록되었으므로 남인의 영수(領袖)인 류성룡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왜곡되고 폄하되었을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은 임진왜란이 끝난 뒤,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의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원인과 경과, 전황, 상황에 대한 반성 등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징비록(懲毖錄)에서 ‘징비’는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문장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즉 “미리 징계해 후환을 조심한다” 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징비록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전란(戰亂)의 발단과 원인을 규명하고 경과를 밝힘으로써 전란에 대한 반성과 재발을 방지하기 위함인 것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임진왜란을 경험한 류성룡은 1598년 11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와 ‘징비록(懲毖錄)’을 남겼다.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은 징비록 외에도 오희문의 ‘쇄미록’, 정경운의 ‘고대일록’, 이노의 ‘용사일기’, 조경의 ‘난중잡록’ 등 여러 가지가 있다. 류성룡이 전란 당시 좌의정과 병조판서, 영의정, 도체찰사 등 최고 직책을 맡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하면 류성룡이 남긴 징비록의 가치는 매우 크다. 구체적인 전개 과정과 명나라 군대의 참전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위치에서 저술한 기록이란 점에서 객관성과 신뢰성이 큰 자료이며, 임진왜란의 역사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징비록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의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인해 극도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생활상, 이순신, 신립, 곽재우 등 전란 당시 활약했던 인물의 공적과 인물평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징비록은 1633년(인조 11년) 아들 유진이 류성룡의 문집인 서애집을 간행하면서 그 안에 처음 수록하였고, 이후 1647년 그의 외손자인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16권으로 구성된 징비록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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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6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6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6편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개혁을 추진하던 조광조가 눈에 거슬리던 중종은 조광조를 당장 투옥시켰다. 조광조의 죄목 중 가장 큰 것은 붕당을 맺어 자신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다.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 정책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혜성처럼 등장한 조광조는 중종에게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참모였다. 왕과 신하가 아닌 정치적 동지로서 두 사람은 결합했지만, 왕과 신하라는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의 동거는 언젠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비록 반정에 의해 추대된 왕이었지만 점차 자신의 왕권을 확대해가려는 중종과 성리학에 입각해 왕권을 견제하려는 조광조의 입장이 충돌한 셈이다.

조광조는 사사(賜死)의 명을 받았으나 영의정으로 있던 정광필의 적극적인 변호로 목숨만은 건진 채 능성(綾城, 오늘날의 화순 능주)에 위리안치되었다. 신진사류들의 상소가 연일 이어져 조정 안팎이 시끄러웠다. 조광조는 유배지에 있으면서 다가올 운명을 알아차렸는지 불평 한마디 없이 조용히 지냈다. 훈구파의 끈질긴 공격으로 마침내 조광조에게 사약이 내려졌다. 금부도사가 사약을 들고 오자, 조광조가 조용히 물었다.

“주상께서 신에게 죽음을 내리신다면 합당한 죄명이 있을 것 아니요? 그 죄명을 듣고 싶소.”

도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조광조는 뜰에 내려와서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사약의 교지를 받았다. 그리고 허락을 받고 집에 편지를 써서 조상의 무덤 옆에 자신을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광조는 사약을 들이켰으나 죽지 않았다. 포졸들이 목을 묶으려 하자 “성상이 미신(微臣)의 머리를 보호하려 약을 내렸는데 너희들이 어찌 감히 이 따위 짓을 하려 하느냐?”고 질책하면서 독약을 탄 소주를 마시고 누워서 피를 쏟으며 죽었다. 그의 묘소는 용인 심곡에 자리를 잡았고, 그 언저리에 그를 기리는 심곡서원이 후에 세워졌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사사되고, 김정, 김식, 김구, 정광필 등 핵심 사림세력은 유배되거나 파직되었다. 조정의 사림세력은 급격히 위축됐다. 그러나 조광조세력의 개혁은 선조 이후 다시금 정계에 진출한 사림세력의 이념적 지주로 자리 잡으면서 조선 후기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남겼다. 조광조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했다. 때문에 그는 후대 사림들로부터 붕당과 정파를 초월하여 추앙받았다. 조광조는 선조 초에 마침내 영의정에 추증(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문묘에 배향(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심)되었다.

조선 중기에 태어나서 그 이상을 맘껏 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이상 정치는 후세 선비들의 귀감이 되었다. 16세기 초반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5년 만에 좌절된 그의 정치 행적은 당시에도 보수와 현실 정치의 벽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5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5편

■ 조광조의 등장과 죽음 5편

조광조와 신진사류는 개혁정책을 눈치 없이 끝까지 밀어부친다. 이에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위훈삭제를 일부 받아들이지만 중종은 조광조에 대해 마음 속 깊이 앙심을 품게 되었다. 공신 재조사가 이뤄졌을 때 위훈자의 숫자는 70명이 넘었다. 조광조는 가짜로 훈작을 받은 자들을 조사해 이들에게 준 관직, 토지, 노비와 저택 등을 몰수하면서 정치권 대변혁을 준비해나갔다. 조광조의 입장에서 훈구파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대상이자, 적폐 세력이었다. 이 조치로 117명 중 초기에 거짓이 적발된 12명 말고도 76명이 공신 명단에서 삭제됐고, 당연히 직책과 재산도 몰수되었다.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한 반발을 야기시킬 게 뻔한 일이었다. 훈구파들은 중종의 마음이 조광조에게서 이미 떠나있음을 눈치챘다. 중종은 용렬한 자질을 지닌 범상한 인물이었다. 임금에게 도학정치를 끊임없이 설파했으나 임금은 지루하고 귀찮아했다. 더욱이 임금은 조광조 앞에서 자세를 흐트릴 수도 없어 오랜 시간을 꼿꼿하게 앉아 있어야 했고, 눈을 들어 조광조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으며, 무식이 탄로 날지 몰라 질문도 마음 놓고 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떤 때에는 조광조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훈구파 기득권을 박탈하려는 조광조의 움직임에 훈구 세력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았다. 이들은 왕실이나 정치권에 심어둔 정치 세력을 적극 활용해 반격의 기회를 엿봤다. 훈구파는 왕에게 수시로 조광조의 위험성을 알렸다. 경연을 통해 왕을 압박하는 조광조가 왕권까지 넘보는 인물임을 강조했다. 남곤, 심정, 홍경주 등 훈구파들은 후궁인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를 통해 중종에게 조광조를 모함하는 한편, 궁중 나인을 시켜 나뭇잎에 ‘주초위왕(走肖爲王:走와 肖를 합하면 趙가 되므로 조 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씨를 새겨, 거기에 꿀을 발라 벌레가 글자대로 갉아먹게 한 것이다. 그리곤 글자가 새겨진 나뭇잎을 역모의 증거로 중종에게 바치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또 조광조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고 무고했다. 곧 공신들을 헐뜯어 몰아내고 권력을 잡으려 한다고 끊임없이 모략질을 해댄 것이다.

한때 최고의 참모였지만 왕을 압박할 만큼 강한 개혁 드라이브에 지친 중종은 더 이상 조광조의 후원자가 될 수 없었다. 중종 역시 개혁조치를 한 치의 양보 없이 강도 높게 요구하는 조광조 등의 사림세력에 부담을 느꼈다. 모든 상황은 조광조 일파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1519년 11월 조정은 조광조를 전격 체포하고, 그의 죄상을 알렸다. 중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였다. 기묘사화(1519년)였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