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일요일

문정왕후 3편

■ 문정왕후 3편

■ 문정왕후 3편

1545년 을사사화에 이어 벌어진 1547년의 ‘양재역 벽서(壁書)사건’으로 인해 사림파는 재기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1547년(명종 2년) 9월 18일의 《명종실록》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됐다』는 충격적인 것이었다.

문정왕후를 ‘여주(女主)’라 조롱하고, 그 아래에서 이기 등이 권세를 농간하고 있다는 벽서의 파장은 컸다. 중종의 아들(서자)인 봉성군 등 3명이 역모 혐의로 처형되는 등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다. 또 사림파의 중심 이언적, 백인걸, 노수신, 유희춘 등 20여명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갔다. 윤원형은 독재 권력을 유감없이 휘두르며 반대파의 씨를 말렸다.

상황이 계속 심해지다 보니 1555년 조식은 상소문을 올려 명종을 고아, 문정왕후를 과부로 표현하면서 나라가 심각한 위기 상태임을 지적했다. 1559년부터 3년간 전국을 휩쓴 임꺽정의 출현도 외척정치의 결과물로 농민 생활이 파탄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사건이었다.

문정왕후는 민생은 외면한 채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했다. 불교 중흥 정책이 대표적이다. 1550년(명종5년) 12월 문정왕후는 친서를 내려 선종과 교종 양종의 복립(復立)을 명하면서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本寺)로 삼았다. 사찰이 일방적으로 빼앗겼던 토지를 반환하게 하고,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 제도까지 부활시켰다. 조선이 취한 불교 탄압 정책을 정면으로 거스른 정책이었던 만큼 신하들의 반대는 물론이고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서 동맹휴학으로 맞섰지만 문정왕후는 뚝심 있게 불교 중흥을 추진했다. 특히 봉은사 주지로 임명된 보우는 온갖 비난의 대상이 되어, 보우를 죽이라는 장계가 75건이나 올라올 정도였다.

현재 서울 강남의 최대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는 봉은사는 450년 전 문정왕후가 보우와 함께 불교 중흥의 꽃을 피워보려 했던 공간이었다. 당시 사관들은 이렇게 문정왕후의 불교 중흥 정책을 비판했다.

『이때 세자(순회세자)를 잃자 요승 보우가 복을 기원해야 한다는 말을 떠벌려 무차대회(불교 법회의 한 종류) 베풀기를 청했는데, 문정왕후가 그 말에 혹해 그대로 따랐다. 승려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몇 천 명이나 되는지 모를 정도였으며, 조각이나 장식을 극도로 화려하게 해 옛날에도 보지 못하던 정도였다. (중략) 또 배위(拜位)를 마련해 마치 왕이 부처에게 배례하게 하는 것처럼 했으니, 그 흉악함과 패악을 형언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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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문정왕후 2편

■ 문정왕후 2편

■ 문정왕후 2편

사화(士禍)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윤임(尹任)을 사사한 직후 경기도 관찰사 김명윤이 윤임 일파(대윤)가 윤임의 조카인 계림군 이유(李瑠:월산대군의 손자로 장경왕후의 조카)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의를 했다고 모함했다. 계림군 이유(李瑠)는 행실이 바르고, 호학(好學)하는 군자(君子)라고 왕족 중에서도 명성이 자자했고, 서자(庶子)였으므로 왕위에 오를 꿈도 꾸지 않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사림(士林)을 제거할 좋은 기회로 본 소윤파는 이를 역모 사건으로 확대 조작했다. 즉시 체포령이 떨어지자 겁을 먹은 계림군이 도망치는 바람에 역모는 사실인양 되어버렸고, 계림군과 함께 교유했던 인물들과 윤임(尹任)을 사사(賜死)할 때 반대했던 신하들이 줄줄이 엮여 잡혀와 모조리 참형에 처해졌다.

아무튼 을사사화 이래 윤원형 일파인 소윤은 수년간 반대파 숙청을 위한 음모를 계속하였는데, 이 때까지 죽은 유력 인사들만 해도 100여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의 총감독은 당연히 문정왕후였다. 문정왕후는 죽는 날까지 국정을 장악하고 철혈정치를 펼치니, 실로 대단한 여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정왕후를 야사(野史)는 아주 표독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정사(正史)인 실록에서도 야사 못지않게 부정적인 평가가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이는 문정왕후가 사화를 통해 사림을 탄압함으로써 당대 유학자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고, 사관(史官)이 모두 유학자였던 점과 문정왕후가 사림파를 신임했던 인종을 배척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점, 그리고 유학자들이 결사반대하는 불교를 부흥시킨 점 등이 그 원인일 것이다. 또, 시대가 시대인 만큼 여기에 ‘여자’ 라는 이유가 부정적인 평가를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중종대 후반부터 세자인 인종을 견제하면서 자기 소생인 명종의 즉위를 이끌어낸 문정왕후. 그녀는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의 방식으로 국정의 최고 위치에 섰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낳지는 못했다. 문정왕후는 윤원형, 정난정과 함께 외척정치의 전성시대를 열었고, 권력유지를 위해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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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 1편

■ 문정왕후 1편

■ 문정왕후 1편

조선의 13대 왕 명종(1534~1567년)은 왕으로서 그다지 우리 기억에 남지 않는 존재감 0의 왕이다. 오히려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훨씬 강한 이미지로 남아있고, 사극드라마의 단골 주인공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 전 ‘여인천하’라는 제목으로 방영된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인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2세의 어린 나이에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는 수렴청정(垂簾聽政:발을 드리우고 왕의 뒤에서 하는 정치)에 나섰다. 이전에 예종과 성종이 정희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은 적이 있지만 거의 형식적인 선에서 그쳤다. 제대로 수렴청정을 받은 최초의 왕은 아마도 명종일 것이다. 명종 시대에는 문정왕후 이외에도 외삼촌 윤원형과 그의 정부 정난정, 그리고 문정왕후가 힘을 실어준 승려 보우(普雨)까지 막강한 인물들이 줄줄이 등장하면서 명종은 왕이면서도 늘 뒷전이었다.

조선의 왕비 중에는 특히 윤씨(尹氏)가 많았는데 중종의 두 계비(繼妃)도 모두 윤씨였다. 그래서 첫째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집안을 대윤, 둘째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집안을 소윤(小尹)이라 불렀다. 장경왕후는 다음 왕이 된 인종을 낳았고, 문정왕후는 인종을 이은 명종(경원대군)을 낳았다. 장경왕후가 일찍 죽자 당연히 문정왕후는 자기가 나은 경원대군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의 두 동생인 윤원로와 윤원형을 동원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당연히 왕의 외척으로 대윤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즉위 8개월 만에 후사도 없이 왕이 죽자, 인종의 죽음에 소윤(小尹)들의 음모가 있다고 믿은 대간들이 윤원로를 탄핵했다. 음모와 술수의 대가인 문정왕후(文定王后)는 할 수 없이 윤원로를 실각시키고(형식적인 조치) 대신 윤원형(尹元衡)을 내세웠다. 하지만, 인종의 뒤를 이어 자신이 나은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대세는 완전히 소윤 쪽으로 기울어졌다.

문정왕후(文定王后)는 앞서 윤원로를 실각시킨 배후에 죽은 장경왕후의 오빠인 형조판서 윤임(尹任)이 있다고 믿어, 몰래 윤원형을 시켜 윤임과 그 일당을 치죄하도록 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밀지와 윤원형 일당의 모함으로 윤임을 비롯한 대윤(大尹)들은 죄도 없이 억울하게 역모로 몰려 모조리 지방으로 유배되고, 드디어 윤원형(尹元衡)일파가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유배를 당한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이 유배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들을 사사(賜死)하라는 명종(明宗)의 어명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대윤(大尹)일파가 사그리 죽자 윤원형, 정순봉, 이기, 임백령, 허자 등 소윤일파가 공신으로 책봉되었다. 문정왕후(文定王后)와 간신들이 짜고 반대파를 숙청한 다음 저희끼리 공(功)을 나눠 먹은 것이다.

이것이 을사사화이다. 결국 을사사화는 사림파내에서 윤씨의 집안싸움으로 벌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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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여인 인순왕후

■ 명종의 여인 인순왕후

■ 명종의 여인 인순왕후

명종은 중종 27년(1532년) 5월에 청송 심씨 심강과 전주 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심씨와 결혼했다. 심씨는 12살, 경원대군은 10살이었다. 곧 이어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면서 14세에 왕비가 되었다. 명종은 왕비 외에 후궁을 6명이나 두었지만 슬하에 자녀는 인순왕후가 낳은 순회세자 뿐이었다.

인순왕후(仁順王后) 심씨! 글자그대로 어질고 순한 지혜로운 왕비였다. 세종 비 소헌왕후에 비견할 만한 보기 드문 왕비라고 칭송받았다. 시어머니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은 대단했고, 상대적으로 명종은 마마보이였다. 문정왕후는 자기 아들이 12살에 왕위에 오르자 8년간 수렴청정을 했다. 말이 수렴청정이지 외척의 세력을 끼고 하고 싶은 대로 다했으니 여왕이나 다름없었다.

남편 명종은 유약하고, 시어머니는 드세고, 조정의 실권은 시어머니의 친정집안인 윤씨 집안이 다 장악하고 있으니 며느리 인순왕후는 그야말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으리라. 더구나 명종과 인순왕후 사이의 외아들인 순회세자가 14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후 왕비 소생의 적장자 왕위계승은 없음) 순회세자는 가례를 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사도 두지 못했다.

엄마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한 마마보이 명종도 왕으로서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외가의 윤씨들이 하도 설치니 왕으로서 권위도 서지 않았다. 뭐라고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바로 문정왕후 귀에 들어갔다. "아니 주상! 이 애미와 외삼촌 윤원형이 없었다면 주상이 어찌 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겠소?"

이러니 찍 소리도 못했을 것이고, 나라꼴도 말이 아니었다. 안으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파가 대윤파를 몰아내고, 외척 윤씨 편에 붙은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수탈은 극에 달했다. 설상가상 홍수와 가뭄 등 자연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그래서 이 시절에 그 유명한 의적 임꺽정이 출현하게 된다. 아쉽게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만............

명종은 1567년(재위22년) 6월 아직 젊은 나이인 34세에 후사도 없이 죽었다. 지혜로운 인순왕후는 남편 명종이 죽자마자 바로 옥쇄를 감추고 친정의 도움을 받아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 사이에서 태어난 덕흥대원군의 막내(중종의 서손이며 명종의 이복 조카)인 하성군을 왕으로 임명했다. 이 분이 선조이다(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 당시 선조는 16살이었으므로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하지만 1년도 채 되기 전에 선조가 친정(親政)할 능력이 있다고 판단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났다. 대신들의 의견을 존중하고 자기 색깔을 고집하지 않으며 현명하게 처신한 인자하고 지혜로우신 인순왕후는 1575년(선조8년) 1월, 창경궁에서 44세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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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3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3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3편

조식 하면 당대에 늘 비교되곤 했던 인물이 퇴계 이황(1501~1570년)이다. 대부분 이황과 가장 선명하게 비교되는 인물로 율곡 이이(1536~1584년)를 꼽지만 이이는 이황과 조식의 후배 학자며, 이황의 가장 큰 라이벌은 조식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1501년) 영남 지역에서 태어나, 당대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을 형성했다. 경상도는 낙동강을 기준으로 경상좌도와 경상우도로 나뉘었는데, 이황의 근거지 안동과 예안이 경상좌도의 중심지였으며, 조식의 근거지 김해, 산청, 진주는 경상우도의 핵심 지역이었다. ‘좌퇴계 우남명’으로 지칭된 것도 두 사람이 지역을 대표한 학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두 학자는 기질과 학풍, 현실관 등에서 분명한 입장 차이를 드러냈다. 이황이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심화·발전시켜간 유학자로서 당시의 지적 수준을 높여갔던 학자라면, 조식은 경과 의를 바탕으로 성리학의 실천을 중시한 학자였다. 이황이 기대승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변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조식은 ‘사단칠정’ 논쟁에 대해 “이것이 백성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일침을 가함으로써 그의 가치관을 분명히 말해주었다.

18세기 실학자 이익은 조식과 이황을 영남파의 양대 산맥으로 인정하면서 ‘이황의 학문이 바다처럼 넓다면 조식의 기질은 태산처럼 높다’고 비교했다. 조식의 의(義)는 상벌에 엄격한 무인의 기질에 어울리며, 그가 차고 다녔던 ‘칼’과 맥락을 같이한다.

두 사람의 차이는 현실 인식에도 반영됐다. 이황과 조식은 사화를 겪으며 관직에 오르기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그러나 명종 대 이후 현실의 모순이 점차 해소됐다고 판단한 이황은 관직에 나아가 경륜을 펴는 것 또한 학자의 본분으로 여겼다. 하지만, 이황과 달리 조식은 자신이 살아갔던 시대를 모순이 절정에 이른 ‘구급(救急)’의 시기로 파악하고 끝까지 재야의 비판자, 처사로 남을 것을 다짐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왜적에 대한 입장도 서로 달랐다. 이황이 일본과의 강화 요청을 허락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등 주로 교린(交隣) 정책을 펼친 반면, 조식은 일본에 대한 강력한 토벌 정책을 주장했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왜적이 설치면 목을 확 뽑아버려야 한다’는 강경한 표현을 쓰기도 했다.

1501년 같은 해에 태어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활약하면서 명종 시대의 정국과 학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친 두 사람, 이황과 조식. 비록 왕의 측근에서 활약한 정치 관료는 아니었지만 당대는 물론, 후대 조선에 미친 학문적, 사상적 영향은 매우 컸다. 당대의 대표적 지성이고 학자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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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2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2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2편

조식의 상소문 파동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16세기 언관과 사관들의 언론 보호 시스템이 작동했다는 점이다. 조식 상소문에 대해 당시 조정에 포진해 있던 대신들이나 언관들은 조식을 적극 변호했고, 궁극적으로 명종의 불편한 심기를 완화시켜 조식이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조정 대신들과 언관, 성균관 유생들까지 나서자 조식에 대한 처벌은 왕의 언론 탄압으로 비화됐고, 결국 명종은 조식을 처벌할 수가 없게 됐다. 조식의 상소문 파문은 명종 시대에 재야의 언론까지 수용하는 정치 문화가 살아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왕 앞에서 당당하게 할 말을 한 재야의 선비 조식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조식의 호는 남명, 본관은 창녕으로, 1501년 외가인 경상도 삼가현 토동에서 아버지 조언형과 어머니 인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언형이 문과를 거쳐 판교에 오르고 숙부 언경이 이조좌랑에 올랐지만 사화의 여파는 강직한 선비 집안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1519년 기묘사화(중종)가 발생하자, 숙부 언경은 조광조 일파로 지목을 받아 죽음을 당했다. 조식의 처가는 일찍이 전라도에서 이주한 남평 조씨로 장인 조수는 김해에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부호였다. 조식은 한때 처가 소재지인 김해 탄동에 거주하면서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그가 학문에 매진할 수 있었던 데는 부유한 처가의 힘이 컸다. 조식은 젊은 시절부터 제자백가의 여러 학문과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노자나 장자의 문장에도 흥미를 느꼈다. ‘남명’이라는 호는 ‘장자’의 《소요유》 편에서 인용한 것이다.

조식은 어린 시절 부친의 임지를 따라 한양 장의동 부근에서 살았다. 30세에서 48세까지는 처가인 김해, 48세에서 61세까지는 합천에서 거처한 후 만년에는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진을 양성했다. 김해, 합천, 진주로 이어지는 경남 지역은 남명 학문의 산실이었다. 조식은 61세가 되던 해에 합천을 떠나 지리산 산천재에 마지막 터전을 잡았다.

조식은 무엇보다 학문에 있어서 수양과 실천을 동시에 강조했다. 경(敬)과 의(義)는 바로 조식 사상의 핵심이다. 조식은 ‘경’을 통한 수양을 바탕으로, 외부의 모순에 대해 과감하게 실천하는 개념인 ‘의’를 중요시했다. 특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제자들에게 늘 강경한 대왜관(對倭觀)을 심어줬다. 임진왜란 때 그의 문하에서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 최고 의병장이 배출된 것은 스승의 가르침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조식은 생전에 10여 차례 이상 지리산을 유람했고 지리산을 노래한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죽음도 말년까지 후학을 길렀던 지리산 산천재에서 맞았다. 묘소는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앞으로 덕천강이 흐르고 뒤로 천왕봉을 중심으로 한 지리산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그를 배향한 덕천서원도 인근에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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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운을 부르는 풍수인테리어 기법

풍수인테리어 기법 ⑯

풍수 인테리어는 기(氣)의 힘을 활용한 환경학이다. 사람이 자연 친화적으로 가장 영향을 많이 받는 곳이 주거 환경이며, 안락하고 편안한 주거 환경을 만들려면 불편함을 없애고 생활의 즐거운 공간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풍수인테리어 기법을 미신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의 상생 원리인 음양오행의 기초를 바탕으로 주거 공간을 정확히 진단하여 자신에게 맞는 건축 환경을 접목시켜, 삶의 질을 높이고 향상 시키는데 있다.

풍수인테리어를 활용하여 주택과 아파트의 공간을 윤택하고 편리하게 하여야 한다.

풍수인테리어는 이미 건축이 되어 있더라도 주어진 환경 속에서 활용하는 방법으로 나에게 맞는 공간을 풍수인테리어 원리에 맞게 인테리어를 하여야 한다.

풍수인테리어는 나에게 맞는 물품이나 소품 등을 적절한 장소에 배치하여 운을 상승 시키는 방법으로 최소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누릴 수 있는 것이 풍수인테리어 기법이다.

풍수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집이라도 사람의 선천 운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좋은 기운이 흉하게 변할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흉한 기운(氣運)도 좋은 기운으로 바뀔 수 있다.\xa0

풍수인테리어를 응용하고 항상 긍정적인 마인드로 행복하고 유쾌하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눈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좋은 기운이 상승한다.

♣ IFSA 국제풍수협회 선정 2018 대한민국 최고 풍수인테리어 전문가 / 문의 : 010-2432-5522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봉 잡았다

‘봉 잡았다’의 봉(鳳)은 봉황의 봉(鳳)이다. 봉황(鳳凰)은 상상 속의 새인데, 상서로운 새인 만큼 매우 귀하고 훌륭한 사람을 만나거나 일을 얻거나 횡재를 했을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나 봉이 김선달의 이야기에서처럼 속이기 좋고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가리킬 때도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런데 ‘봉황(鳳凰)’의 ‘봉(鳳)’은 수컷을 의미하고, 뒤의 ‘황(凰)’은 암컷을 의미한다. ‘봉 잡았다’는 말은 ‘운수 좋다’는 뜻으로 쓰고, ‘황잡았다’는 ‘운수 나쁘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이런 말 하나에서도 그 옛날 뿌리 깊은 ‘남아선호’ ‘남녀차별’을 엿볼 수 있다.

2. 아수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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阿修羅는 산스크리트 asur의 음역(音譯)으로 쓴 한자이다. 아소라, 아소락, 아수륜 등으로 표기하며, 약칭은 수라(修羅)라고 하는데 추악하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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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수라는 본래 육도 팔부중(八部衆)의 하나로서 고대 인도신화에 나오는 선신(善神)이었는데 후에 하늘과 싸우면서 악신(惡神)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증오심이 가득하여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전신(戰神)이라고도 한다. 그가 하늘과 싸울 때 하늘이 이기면 풍요와 평화가 오고, 아수라가 이기면 빈곤과 재앙이 온다고 한다. 인간이 선행을 행하면 하늘의 힘이 강해져 이기게 되고, 악행을 행하면 불의가 만연하여 아수라의 힘이 강해진다. 아수라는 얼굴이 셋이고 팔이 여섯인 흉칙하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는 비슈누신의 원반에 맞아 피를 흘린 아수라들이 다시 공격을 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아수라장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므로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끔찍하게 흐트러진 현장’ 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러 사람이 무질서하게 마구 떠들어대거나 덤비어 뒤죽박죽이 된 난장판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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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보세요

우리나라에서는 전화를 걸 때, 제일 처음 상대방에게 하는 말이 ‘여보세요’ 이다. 왜 “여보세요?”라고 했을까? 우리나라에 처음 전화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모두 신기하여 어쩔 줄 몰랐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데, 수화기를 귀에 대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렸으니까. 그래서 처음 전화기를 써 보게 된 사람들은 무슨 말을 먼저 할까 고민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데 혼자 떠드는 것 같아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래서 머뭇거리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 바로 ‘여기 좀 봐 주세요.’ 또는 ‘거기 누구 없소?’ 라는 뜻으로 ‘여보세요?’ 라고 하게 되었다. 옛날 사극을 보면 어느 집을 들어갈 때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라고 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여보시오’ ‘여보세요’ 라고 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까 “여보세요?”하고 조심스럽게 불러 본 것이다. 그 뒤로 전화를 걸고 받을 때는 습관적으로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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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1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1편

■ 남명(南冥) 조식과 퇴계(退溪) 이황 1편

1555년(명종10년) 조정에 한 장의 상소문이 올라왔다. 이 상소문의 주인공은 남명(南冥) 조식(1501~1572년)으로, 퇴계 이황과 함께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평생 관직을 사양하고 스스로 처사(處士)로 불리기를 원했던 선비학자 조식은 1555년 조정에서 제안한 단성현감을 마다했다. 이 과정에서 올린 당시 정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상소문은 명종 시대 정국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어떤 내용이었기에 이처럼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을까.

조식이 올린 상소문의 핵심은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이 정치를 잘 못하고 있어 민심이 떠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전하의 나랏일이 이미 잘못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고 하늘의 뜻이 가버렸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이미 말라버려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어느 때에 닥쳐올지 까마득하게 알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이 지경에 이른 지가 오래됐습니다.』

조식은 정치가 잘못된 원인을 무엇보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서 찾고 있었다. “자전(慈殿·왕의 어머니, 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기는 하나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다만 선왕의 외로운 후계자(孤嗣)이실 뿐이니, 천 가지 백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시겠습니까.”

문정왕후는 인종 승하 후 자신의 소생인 11세의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하면서 윤원형 등 친정집 세력을 대거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왕을 정점으로 하는 정상적인 정치가 아니라 소수의 외척 세력에게 권력이 집중됐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떠안게 되는 형국이 됐다. 조식은 잘못된 정치 현실에서 비판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을 선비의 책무로 여겼다. 왕에게 불경한 표현이 될지언정 이 상소문을 올린 것은 이런 생각에서였다.

이 상소문으로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특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표현한 대목에 대해 명종이 ‘군상불경죄(君上不敬罪)’로 역정을 낼 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에 대한 불만이 벽서 형태로 나타난 경우는 있었지만, 조식처럼 직언하는 상소문으로 비판하는 경우는 없었다. 조식에 대한 처벌이 제기되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대신이나 사관들이 “조식이 초야에 묻힌 선비여서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이지, 그 우국충정은 높이 살만하다”는 논리로 조식을 변호함으로써 파문은 가라앉았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인종의 여인 인성왕후 박씨

■ 인종의 여인 인성왕후 박씨

■ 인종의 여인 인성왕후 박씨

인종은 중종과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난 적자(嫡子)이다. 재위 8개월 만에 죽음으로써 앞서 1년 2개월을 재임한 예종의 기록을 깨고 조선 왕조 최단기간 왕위 기록을 세웠다. 좋은 왕이 될 충분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중종의 후궁 경빈 박씨가 먼저 복성군을 낳았으나 서자이므로 당연히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인종의 비(妃)는 인성왕후 박씨. 중종 9년(1514년) 10월에 나주 박씨 박용과 어머니 의성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성왕후 박씨는 중종 19년 3월에 11살로 10살인 인종과 결혼하여 20여 년간을 세자빈 생활을 했다. 친시어머니는 장경왕후이지만, 인종을 낳고 칠 일만에 산후병으로 돌아가시고, 대신 문정왕후가 시어머니 역할을 했다. 어질고 효성이 지극한 인종의 비(妃)로써 치맛바람의 대명사인 여장부 문정왕후 같은 시어머니의 며느리 역할이 그리 만만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스트레스로 마음고생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진 남편과 부창부수인 인성왕후는 긴 세자빈 시절을 별 탈 없이 조신하게 시어머니를 모신 듯하다. 그만큼 인성왕후 박씨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도 없고, 기록도 없다. 긴 세자빈 생활을 청산하고 인종이 즉위함에 따라 31세에 왕비가 되기는 했으나, 그것도 잠시! 인종이 일찍 죽음으로써 32세에 본의 아니게 대비마마로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최단시간 왕비에서 대비로의 승격일 것이다.

그 당시 조정의 모든 실권은 시어머니인 문정왕후가 가지고 있었으니 아마도 조용히 몸을 낮추고 살다가 선조 10년(1577년) 64세에 자녀도 없이 쓸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인종은 숙빈 윤씨, 귀인 정씨 등 두 명의 후궁도 두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보지 못하고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 아마도 인종에게 불임의 원인이 있었던 것 아닐까.

인종의 유언이다.

"내가 죽게 되었으므로 동생 경원대군(명종)에게 왕위를 전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그를 도와서 과인의 뜻에 부응토록 하라. 내가 죽거든 장례는 검소하게 하여 백성들의 짐을 덜 도록하라!"

참으로 인자하고 너그러운 왕이다. 훌륭한 왕과 왕비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도 한데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