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7일 일요일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여성에게 좋은 건강음식 베스트6

1. 딸기, 블루베리 등 각종 베리

베리에는 노화를 방지하는 항산화성분이 어떤 다른 음식보다 많이 들어있어요. 이 성분들은 단순히 성인병의 위험을 낮출 뿐만 아니라, 기억력 감퇴도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한 컵 분량이 적당해요. 딸기이건 라즈베리이건 블루베리이건 상관없어요. 최소 1주일에 3번은 먹어야 효과가 있어요. 간식을 베리로 대신한다면 섬유질 섭취량이 늘어 변비를 해소하고 체중 증가도 막을 수 있어요.

2. 연어

연어는 건강에 유익한 지방 성분인 오메가3지방산을 공급하는 주요 식품. 오메가3지방산은 암의 발병 위험을 줄이고 기억력을 높이는 한편, 혈압 조절과 노화 방지에도 효과적이에요. 알약으로 만들어진 오메가3제를 먹는 것보다는 생선을 통해 자연적으로 섭취하는 것이 좋아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두번은 식탁위에 올리도록 해요.(연어 대신 참치를 먹어도 좋아요).

3. 푸른잎 채소

시금치와 상추, 케일 등 적녹색 채소를 많이 먹으라는 이야기는 수없이 들어보셨죠? 이같은 채소에는 섬유소와 비타민C와 K, 엽산, 칼슘과 마그네슘, 아연과 철 등의 미네랄 성분도 풍부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두끼 이상 섭취 하면 좋아요.

4. 땅콩 등 견과류

단백질과 마그네슘, 비타민 B와 E를 공급하며 심장병과 암을 예방하는 데 효과가 있어요. 물론, 견과류는 열량이 높다는 단점이 있어요. 그러나, 견과류 속 지방은 건강에 이로운 성분으로 적정량만 섭취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5줌 정도.(땅콩과 아몬드, 호두,캐슈넛 등을 섞어 한 번에 1/4 컵씩 먹기)

5. 당근, 살구, 고구마

진한 노랑이나 주황빛을 띈 야채들은 암발생 위험을 낮추는 베타 카로틴 성분을 잔뜩 함유하고 있어요. 또한 감기를 예방하고 자외선으로 손상된 피부를 치유하는 기능을 해요. 혈압을 낮추고 심장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기도 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하루에 반 컵 정도 분량을 먹는 것이 좋아요. 고구마 1개 또는 당근 큰 것 1개, 살구 12개 등을 번갈아 가며 먹어요.

6. 요거트

반드시 설탕 첨가물이 없는 플레인 요거트여야 해요. 이런 요거트에는 비타민 B와 칼슘, 유익한 유산균이 들어있어 위를 튼튼하게 하고 면역력을 길러줘요. 변비 치료에도 좋으며, 효과적인 다이어트 식품이기도 해요.

▶얼마나 먹어야 할까? 1주일에 4컵 이상 먹는 것이 효과적이에요.

방귀가 자주 나오는 이유와 대처 법

방귀가 자주 나오는 이유와 대처 법

방귀가 자주 나오는 이유와 대처 법

방귀는 인체의 생리 현상이지만 때와 장소에 따라 곤란한 일을 겪을 수가 있다. 국립보건원에 따르면 하루 방귀의 횟수는 개인차가 있지만, 알게 모르게 보통 평균 하루\xa014~20회 정도 방귀를 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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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귀가 자주 나오는 원인은 \xa0대부분 음식물 섭취가 주범이다. 방귀는 장 속의 공기가 항문을 통해 빠져 나오는 현상이다. 평소에도 소장과 대장에는\xa0200㎖\xa0정도의 가스가 항상 들어 있는데 이 가스의 일부는 위에서부터 내려온다. 주로 음식물을 먹을 때 같이 삼켜져서 대부분 트림으로 배출되며, 일부만이 장으로 내려가 항문을 통해 빠져나간다. 그 외에 대부분의 가스는 대장에서 발생하는데, 소장에서 미처 흡수되지 않고 내려온 음식물이 대장 내에 살고 있는 세균에 의해 발효되면서 가스가 생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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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귀 대처 법 >

1. 밥을 국이나 물에 말아먹지 않기

물이나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 음식물이 빠르게 식도로 넘어가서 저작작용이 생략돼 소화에 장애를 주게 되고, 위 속에 있는 소화액이 물에 희석돼 두 번째 단계인 위에서의 소화 능력도 방해 받아 가스 및 방귀를 동반한 소화불량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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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유 및 유제품 섭취 삼가 하기

우유에 들어있는 유당이 소화가 되지 않아 장에 있는 세균이 발효되면 부글부글 가스가 생기고, 발효가 안 된 것은 설사로 배출되기도 한다. 단,\xa0요구르트는 유산균이 소화되면서 유당을 분해하는 효소가 분비되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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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음식 천천히 먹기

음식이나 음료수를 마실 때 공기를 같이 삼키게 되면 배 속 가스를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음식을 빨리 먹거나 빨대를 이용해 음료수를 마시거나 병의 입구가 좁은 음료를 병째 마시는 경우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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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잡곡 밥 섭취 조절하기

밥을 할 때 잡곡을 지나치게 많이 섞을 경우, 뱃속이 더욱 불편할 수 있으므로 잡곡의 양을 보통 사람보다 줄여 혼합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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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취침 전 식사 삼가 하기

음식을 소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xa04시간, 적어도 잠들기\xa04~5시간 전에는 음식 섭취를 끝내야 하고, 식사 후\xa02시간 이내의 취침은 삼가는 것이 좋다.

사직단社稷壇

■ 사직단社稷壇

■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은 토지신인 사(社)와 곡물 신인 직(稷)의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종로구 사직동에 있다(사직동이라는 지명이 붙은 이유).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의 제도를 따라 경복궁 동쪽(왼쪽)에 종묘가, 서쪽(오른쪽)에는 사직단이 대칭되게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종묘가 양 (陽)에 해당하는 사람人의 신주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음(陰)에 해당하는 땅의 신주를 모신 곳이기 때문이다.

사직은 사단과 직단이라는 두 개의 사각형 제단으로 구성되었는데, 동쪽에는 사단이 서쪽에는 직단이 있다. 사직단의 제단이 사각인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전통적인 관념에 따른 것이었고,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원구단(圜丘壇:환구단)의 모양이 둥근 모양인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네모반듯한 단의 4면에는 3층의 돌계단을 설치하였고 단상 네 귀퉁이에는 구멍 난 돌이 박혀 있고 큰 쇠고리가 꽂혀 있는데, 이는 제사 때 필요한 기둥을 세우고 차일을 치도록 설비하였던 것이다.

종묘는 서울에 하나만 있었으나, 사직은 지방의 각 군현에 하나씩 설치되어 있었다. 지방의 사직도 음(陰)의 방향에 배치했기 때문에 관아 건물의 서쪽에 자리했다. 서울의 사직 제사는 국왕이 주관했으나, 지방에 있는 사직 제사는 국왕 대신 지방의 수령이 주관 했다. 현재 규장각에 있는 조선 후기 지방 지도를 보면 지방 관아 근처에 있는 사직단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농업이 주된 산업인 조선시대에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신 사직은 서울과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국가적인 차원에서 종묘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사직단의 사방에는 홍살문(紅箭門)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북쪽에만 3개의 문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신이 출입하는 곳이 북쪽이므로 북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종묘에는 국왕의 신주가 계속해서 추가되었으므로 여러 번 건물이 증축해야 했다. 종묘의 증축이나 제도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종묘의궤’가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본이 전해진다. 반면 사직단은 1395년 완공된 이후 제도상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내려져 왔고 임진왜란 때 불 탄 이후 한 차례 중건되었을 뿐이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종묘宗廟

■ 종묘宗廟

■ 종묘(宗廟)

성리학적 예학禮學)정치를 이상(理想)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국가를 구성하는 오례(五禮)가 있었다. 오례 중에서 국가의 제사는 길례(吉禮)에 속했으며, 사직과 종묘는 길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제사 즉 대사(大祀)였다. 사직과 종묘의 제사는 조선이 농업을 주신으로 하고 전주 이씨(李氏)를 왕실로 한 국가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행사였다. "종묘사직"이라 함은 바로 국가와 왕실을 말하는 것이다. 국왕은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하는 경우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神主)는 반드시 모시고 가서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했다. 왜나 하면 제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바로 국가가 멸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종묘는 조선의 역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으로 현재 종로구 훈정동에 위치해 있다. 종묘의 건물은 본묘(本廟)인 정전(正殿)과 별묘(別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구분된다. 정전은 현(現) 국왕으로부터 위로 4대까지의 조상과 국가를 창업하거나 중흥시킨 공적이 있는 국왕들의 신주를 모셨고, 영녕전은 본묘에서 옮겨진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곳이었다. 조선은 건국 초기에 개경에 있던 고려의 종묘에 조선의 종묘를 세웠다가, 1309년 서울로 도읍을 옮기면서 현재(사직동)의 자리에 종묘를 건설하였다. 태조가 서울에 도성을 건설하면서 종묘와 사직을 궁궐과 함께 제일 먼저 건설한 것은 종묘와 사직이 차지하는 위상을 잘 보여 준다.

국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국장을 치르고, 국장이 끝나면 가신주(假神主)를 만들어 혼전(魂殿)에 모셨다. 1년이 지나면 가신주를 묻고 새 신주를 만들어 혼전에 모시며, 삼년상이 끝나면 길일을 골라 혼전에 모신 새 신주를 꺼내 본전인 정전에 모신다. 정전의 신주는 4대(4代)가 내려갈 때까지 모셔지며, 4대가 지나면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진다. 정전에 있는 신주를 꺼내서 영녕전으로 옮기는 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하는데, 생전에 국가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국왕은 불천위(不遷位)라 하여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고 정전에 그대로 두었다.

이후 종묘에 후대 국왕과 왕비의 신주가 계속 추가됨에 따라 본묘와 별묘의 건물도 계속 증축 되었다, 왜냐하면 본묘에는 4대가 지나도 신주를 옮기지 않고 그대로 두는 불천위가 늘어났고, 별묘에는 본묘에서 나온 신주들이 계속 추가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현재 종묘에 있는 건물은 모두 옆으로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수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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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수저’를 사용한다. ‘수저’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다. 숟가락의 숟은 쇠를 뜻하고, 가락은 손을 뜻한다. 그러니까 숟가락은 쇠로 된 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쓰던 숟가락이 처음부터 모두 쇠로 된 것은 아니었다. 숟가락은 청동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출토되었는데, 당시의 숟가락은 뼈로 만든 것도 있었다고 한다. 젓가락은 숟가락보다 늦게 발달하여 우리 조상들도 처음에는 숟가락만으로 식사를 했다. 그러다 삼국 시대에 와서 비로소 젓가락을 함께 사용하게 되어, 이때부터 수저라는 말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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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일본도 이쯤부터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쓰기 시작했는데, 음식의 특성상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점차 숟가락의 쓰임이 줄어들고 젓가락이 중심이 되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주로 젓가락을 사용해서 식사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물요리가 많다보니 숟가락과 젓가락을 여전히 함께 사용하고 있다. 재료도 철이 많이 생산되는 우리나라는 자연히 쇠로 수저를 만들어 쓰게 되었고, 일본은 쇠 대신 나무로 수저를 만들어 쓰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2. 야단법석

‘야단법석(野壇法席)은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사월초파일 같은 날에는 많은 신도들이 절을 찾아오기 때문에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하는 것이다. 그처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여러 사람이 한데 모여 서로 다투고 떠들고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야단법석’이라고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야단법석을 떤다”라고 할 때의 야단법석은 ‘惹端법석’ 으로 한자 한글의 복합어이다. 한자 자체의 뜻이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굴다’는 의미의 야단(惹端)이다. 사전에 따라서는 이때도 법석을 法席이라는 한자로 쓰기도 한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정난정鄭蘭貞 5편

■ 정난정鄭蘭貞 5편

■ 정난정(鄭蘭貞) 5편

의금부에서는 구슬이를 비롯한 10여 명의 여종들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그들이 거부하자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다. 결국 장독을 이기지 못한 여인들이 모두 죽고 한 사람만 살아남았다. 짜 맞추기 수사와 고문에 의한 자백이 증거로 인정되던 시절의 공식적인 악행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도된 결과가 나오지 않자, 그해 10월 14일 좌부승지 홍인경은 명종에게 정난정을 잡아 가두고 추국하기를 청했다

의금부는 사건의 진상 파악보다는 정난정 한 사람에 대한 공격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명종은 어머니 문정왕후의 국상도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외삼촌과 외숙모를 죽이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으므로 차일피일 시간을 끌었다. 막다른 상황을 감지한 정난정은 냉정하게 최후를 대비했다. 그녀는 국청에 마소처럼 끌려가 뭇 양반들의 망신과 조롱 속에 목숨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정경부인이 되었어도 천비는 끝내 천비인가 보다. 그래도 나는 정경부인으로 죽으련다.”

1565년(명종 20년) 11월 3일 마침 금부도사가 죄를 지은 평안도 장수를 체포해 오던 도중 금교역에서 말을 바꾸어 탔다. 그 장면을 오해한 노비가 정난정에게 금부도사가 오고 있다고 알렸다. 그러자 정난정은 갖고 있던 비상으로 미련 없이 목숨을 끊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에 넋을 잃은 윤원형도 그로부터 5일 후 같은 방법으로 자살했다. 윤원형 부부의 동반자살 소식을 들은 신료들은 쾌재를 부르며 정난정을 천민으로 환원시켰지만 아들 윤효와 윤충원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은 부모가 죄안에 오르기 전에 죽었으므로 공식적으로 죄인의 자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양반들은 사서(私書)에서 정난정을 남편 윤원형을 사주하여 국정을 파탄 내고 강상을 어지럽힌 요녀로 묘사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정난정의 동복 둘째 오빠는 담(淡)인데, 그는 언젠가는 정난정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이라 예상하고, 일체 그녀와 왕래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가 찾아올까봐 집 입구의 담을 꼬불꼬불하게 쌓아 한 사람만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통로를 만들었다. 정난정은 늘 가마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때문에 정난정은 그의 집에 가볼 수가 없었고, 덕분에 윤원형과 정난정이 몰락한 뒤에도 화를 입지 않았다. 정난정에 대한 기록은 이처럼 정사나 야사 모두 정난정을 조선의 질서를 어지럽힌 타락한 여성으로 묘사하였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정난정鄭蘭貞 4편

■ 정난정鄭蘭貞 4편

■ 정난정(鄭蘭貞) 4편

1565년(명종 20년) 4월 6일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사림파는 기다렸다는 듯 척신세력의 상징인 보우와 윤원형을 탄핵했다. 명종이 경연에서 한나라 문제가 외삼촌 박소를 죽인 사례를 언급하자, 그 신호에 맞춰 8월 3일 대사헌 이탁과 대사간 박순이 윤원형의 죄악을 26조목으로 적시하며 처벌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 중에 첫째는 관비의 소생인 정난정을 부인으로 삼았고, 그녀의 딸을 덕흥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 죄였다. 천출의 자식을 감히 왕가에 들여보내려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실부인 김씨의 재산을 빼앗아 굶어죽게 했고, 도망노비들을 비호했다는 죄목도 포함되었다. 혐의의 대부분이 정난정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사림의 시각에서는 윤원형보다 보우대사와 함께 불교 부흥에 앞장섰던 그녀가 더 미웠던 것이다.

그해 8월 21일 윤원형은 파직되어 황해도의 강음 땅으로 방귀전리(放歸田里)되었다. 방귀전리(放歸田里)란 유배형보다 한 등급 가벼운 조치로 벼슬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는 형벌이었다. 그러자 정난정도 그와 동행했다. 그들은 명종이 자신들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천출에 대한 양반들의 집요한 공세를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1565년(명종 20년) 8월 27일,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이구동성으로 명종에게 정난정의 부인첩을 회수하여 정처와 첩실의 명분을 바로세우라고 상주했다.

그렇다고 명종은 외삼촌을 기다렸다는 듯이 내칠 수는 없었다. 임금과 신료들의 형식적인 상소와 거절이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결국 명종이 못이기는 척 그들의 청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정난정은 졸지에 첩실로 강등되었다. 한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9월 8일 윤원형의 전부인 김씨의 계모 강씨가 정난정을 김씨 독살 혐의로 고소했던 것이다.

“사위 윤원형은 젊었을 때 딸 김씨와 결혼하여 여러 해를 함께 살았는데, 정윤겸의 서녀 정난정을 얻은 이후 임금을 속여 내쫓았습니다. 게다가 김씨의 종들로 하여금 원주인을 능멸하고 모욕하게 했고, 가산을 모두 빼앗고 마침내 종적을 없애 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김씨가 매우 굶주려서 정난정에게 먹을 것을 구하자, 정난정이 음식 속에 독약을 집어넣고 가져다주었는데 김씨가 먹고 즉시 죽었습니다. 온 집안이 모두 그 원통함을 알고 있었으나 대단한 위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소장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소장을 접수한 형조에서는 강상(綱常:삼강오륜)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자신들이 처리할 수 없다며 역모 등 체제사건을 다루는 의금부로 이첩했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정난정鄭蘭貞 3편

■ 정난정鄭蘭貞 3편

■ 정난정(鄭蘭貞) 3편

을사사화를 계기로 조정을 완전히 장악한 윤원형은 사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한 데 이어, 정적으로 돌아선 친형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낸 뒤 목숨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는 윤원형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권력에는 부모형제도 없다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그 무렵 문정왕후는 정난정을 통해 보우대사를 소개받고, 그를 통해 고려시대의 선종과 교종을 부활시켰으며, 전국에 3백여 개의 사찰을 공인하고 도첩제를 부활시켰다. 이에 정난정은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다양한 불교 행사를 마련하여 그녀의 노력을 뒷받침했다. 정난정의 깊은 불심에 감동한 문정왕후는 1549년(명종4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그의 첩인 정난정의 소생인 자녀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은전을 베풀었다.

기세가 오른 윤원형은 1551년(명종6년) 2월 명종에게 조강지처 김씨의 악행을 고발하며 집안에서 내치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명종이 이 청원을 받아들이자 윤원형은 즉시 조강지처 김씨를 쫓아내고 정난정을 정실(正室)로 삼았다. 일찍이 그녀를 소실(小室)로 들일 때의 서약을 지킨 것이었다. 그 후 김씨는 가난과 모멸 속에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정난정이 보낸 음식을 먹고 죽었다고 한다. 그녀에게 요녀이자 독녀라는 그녀의 별명이 붙은 이유였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기 넉 달 전인 1553년(명종8년) 3월 명종에게 ‘윤원형의 첩에게 직첩을 주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게 했다. 그리하여 정난정은 합법적으로 윤원형의 부인이 되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고, 자식들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하지만 정난정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윤원형으로 하여금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처지의 백성들을 구원하려고도 했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올린 이 상소는 서얼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조 판서 안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호통법이 통과되자 숨죽이고 있던 서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정난정鄭蘭貞 2편

■ 정난정鄭蘭貞 2편

■ 정난정(鄭蘭貞) 2편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고 하던 조선 양반들의 유교적 가치관에 도전했던 여인들은 하나 같이 악녀로 몰리게 마련이다. 정난정(鄭蘭貞)은 합천 출신의 무관 정윤겸과 소실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당당한 무반이었지만 어머니는 군영에 소속된 관비 출신이었으므로 정난정은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천민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고관이었으므로 신역몸값을 치르면 평민처럼 살아갈 수 있었지만, 언제라도 상황이 바뀌어 나라에서 부르면 여종으로 살아야 할 처지였다. 게다가 혼인하여 자식을 낳으면 그들 역시 천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정난정과 윤원형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문정왕후의 수태 불공을 드리러 봉은사에 갔던 윤원형이 보우대사의 소개로 그녀를 알게 되었다. 정난정을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린 윤원형은 아버지 정윤겸에게 그녀를 첩으로 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정난정은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었다.

“당신의 후사를 이어주면 나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는 서약서를 써주세요. 평생 무시당하는 소실로 살 바에야 차라리 비구니가 되겠어요.”

이미 정실이 있었던 윤원형은 정난정의 당찬 태도에 매우 당황했지만, 이미 내친걸음이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서약서를 써 주고 말았다. 당시 정난정은 윤원형이 유교의 근본주의에 물들지 않고 양반사대부들이 경멸해 마지않는 불교를 신봉한다는 점에 매력을 느꼈다. 그의 불심은 독실한 불교도였던 누이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정난정은 그리하여 원치 않던 소실이 되었지만 집안에서 당당하게 행동했다. 전통적인 반가의 여주인답게 질서를 잡으려 했던 본처 김씨가 오히려 기가 죽었다. 김씨로서는 집안의 대를 잇지 못한 것이 커다란 약점이었다. 억울한 심정으로 남편에게 소실의 건방진 행태를 고발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남편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인종이 즉위한 뒤 윤임이 이끄는 대윤이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기용하는 등 기세를 떨쳤지만 명종이 즉위하면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수렴청정을 맡은 문정왕후 윤씨가 자신의 정책에 사사건건 딴죽을 거는 사림에 철퇴를 휘둘렀던 것이다. 당시 소윤의 대표자였던 윤원형은 중종 사후 윤임이 중종의 여덟 째 아들 봉성군 이완에게 왕위를 옮기려 했으며, 인종이 죽었을 때는 성종의 셋째아들 계성군 이순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빌미로 문정왕후는 유관과 유인숙을 사사하고 이들과 손잡았던 사림 세력을 숙청했다. 명종 즉위년인 1545년에 일어난 을사사화이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정난정鄭蘭貞 1편

■ 정난정鄭蘭貞 1편

■ 정난정(鄭蘭貞) 1편

조선 명종 때의 여인 정난정은 천민이었지만 타고난 미모와 재기를 발휘하여 정경부인의 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친정동생으로 20년 동안 권력의 실세로 군림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인물이다. 사시사철 전국 각지에서 뇌물을 실은 수레가 올라왔고, 곳곳에 농장이 있었고, 한양에만 대저택이 1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윤원형의 주변 인물 중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 정난정이었다. 정난정은 부총관을 지낸 정윤겸과 관비(官婢) 사이에서 태어난 서녀(庶女)로 엄청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남자를 유혹하는 묘한 매력을 가진 여자였다고 한다. 윤원형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그의 첩이 되었고, 한 발 더 나아가 정실부인을 내몰아 죽인 후 스스로 정실이 되어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난정(蘭貞)이 낳은 서자들을 적자로 만들었으며, 서자들도 벼슬에 나갈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등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을 누렸다.

정난정은 문정왕후의 사랑도 듬뿍 받아 궁궐을 수시로 드나들었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商權)을 장악하여 전매(專賣), 모리(牟利)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하였다. 당시 윤원형과 정난정 부부와 사돈을 맺고 싶어 하는 자들이 줄을 섰다고 한다. 대저택을 지어놓고 비단 휘장을 치고 금은 그릇으로 밥을 먹었으며, 궁궐에서처럼 팔진미(八珍味)를 넣어 끼니마다 1만 전을 썼다고 한다. 더구나 형인 윤원로(尹元老)가 대우에 불만을 표하자 죽여버렸다. 철의 여인 문정왕후를 보필하고 보우대사를 막후지원하면서 불교 중흥과 신분타파를 시도하여 강고한 유교 사회에 일대 변혁을 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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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부패와 패륜에 조정신료들과 온 백성들이 모두 치를 떨었고, 사관들도 윤원형을 개만도 못하다 벌레나 다름없다 등으로 악평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잘 나가던 윤원형(尹元衡)도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으며, 3사에서는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평소에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행실을 거슬려하던 명종(明宗)은 윤원형을 파직하고 낙향시켰다. 윤원형이 힘을 잃고 낙향하자 윤원형의 처소에 돌이 날아들고 화살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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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이 난 윤원형은 정난정(鄭蘭貞)과 노비 몇 명만 데리고 산으로 숨어들었다.

언제 자신들을 잡으러 금부도사(禁府都事)가 내려올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살던 어느 날, 옆 동네에 다른 죄인을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가 내려왔다. 그러자 자신들을 잡으러 온 것으로 착각한 정난정은 늘 소지하고 다니던 독을 마시고 자살했고, 윤원형(尹元衡)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다가 5일 뒤 자신도 뒤를 따랐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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