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의적 임꺽정 3편

■ 의적 임꺽정 3편

■ 의적 임꺽정 3편

당시 왕이었던 명종은 이들을 ‘반적(叛敵)’이라 부르며 반란군으로 규정했다. 단순한 도적이 아닌 체제도 뒤엎을 수 있는 존재로 본 것이다. 왕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을 잡기란 쉽지 않았다. 신출귀몰한 임꺽정이 잡히지 않자 그에 대한 현상금은 높아만 갔다. 임꺽정 무리가 계속 횡행하면서 조정은 이들을 잡으러 여러 사람을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들은 벼슬아치의 이름을 사칭하고 감사의 친척이라고 가장하면서 관가를 출입하고 정보를 알아내기도 하였다.

1561년에는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 · 강원도 · 평안도 · 함경도 · 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5도의 군졸들이 도둑을 잡으려 내왕하는 동안 민심은 흉흉해졌고, 관군의 물자를 대느라 백성들의 원성이 들끓었으며, 무고한 사람들이 잡혀가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임꺽정이 이끄는 무리들은 구월산에 들어가 험한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정부는 남치근을 토포사(討捕使:도둑을 잡는 벼슬)로 삼아 재령에 진을 치고 머물게 하였다. 남치근은 많은 병사를 모아 산을 에워싸고 한 사람도 산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하였다. 당시 임꺽정에게는 번뜩이는 기지로 참모 역할을 하고 있던 서림(徐霖)이란 자가 있었다. 서림은 상황이 좋지 않게 되자, ‘관군이 이렇게 산을 막고 있으니 우리들도 어쩔 수 없게 되었다. 과연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혼자서 몰래 관군에게 투항하기로 했다. 임꺽정 측에서 본다면 배신이었다. 서림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배반을 택하였던 것이다.

서림의 투항으로 관군 측의 토벌작전은 가속도가 붙었다. 서림의 입을 통해, 임꺽정 일당이 장수원에 모여 있으면서 전옥서(典獄署)를 파괴하고 임꺽정의 아내를 구출할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서림을 내세워 임꺽정과 함께 있던 도적들을 유인해서 대부분 사살하였다. 이젠 임꺽정 혼자만 남았다. 임꺽정은 관군을 피해 산속을 헤매다가 마침 집 하나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숨어들어갔다. 그 집에는 노파 혼자 살고 있었다. 임꺽정은 노파를 볼모로 잡고 협박하여 임꺽정이 달아났다고 외치라고 하였다. 겁에 질린 노파는 임꺽정이 시키는 대로 “도적이 달아났다.” 라고 외치며 집 밖으로 나갔다. 임꺽정을 알아보지 못한 군사들은 일제히 노파가 가리킨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러는 북새통에 임꺽정은 군사가 탄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났지만 심한 상처를 입어 멀리 가지 못했다. 멀리서 임꺽정을 알아 본 서림이 “임꺽정이다”라고 외쳤고, 관군들은 수많은 화살을 그를 향해 날렸다. 그토록 믿고 형제처럼 지내던 서림이 임꺽정의 최후를 부른 것이다. 관군의 화살에 약 3여 년간 경기와 황해지역을 횡행하던 도적 임꺽정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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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임꺽정 2편

■ 의적 임꺽정 2편

■ 의적 임꺽정 2편

임꺽정은 힘이 천하장사였다. 그는 아마도 도적떼뿐만 아니라 수백 년 이래의 장사들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힘의 소유자일 것이다. 임꺽정은 십여 명의 의형제를 모아 휘하의 두령으로 삼았다.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은 신분이 다양했다. 상인, 대장장이, 노비, 아전, 역리 등 실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고, 임꺽정은 자신만의 리더십으로 이들을 이끌었다. 임꺽정의 활동 무대는 처음에는 구월산·서흥 등 산간지대였으나 점차 시간이 흐르고 따르는 무리들이 많아지면서 평안도와 강원도, 안성 등 경기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관군들이 임꺽정의 세력이 커질 때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은 황해도 일대의 아전과 백성들이 임꺽정과 비밀리에 결탁하여 관에서 잡으려고 하면 그 사실을 미리 알려줬기 때문이었다.

임꺽정 부대의 규모 · 전술과 활동 거점에 대해서는 《명종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창, 칼, 활, 도끼 등 단순한 무기로 무장했을 뿐 총포류 등의 화약 무기는 없었으므로, 관군에 비해 화력과 병력면에서 열세일 수밖에 없고, 관군과 맞대고 교전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기동력 면에서 탁월하였으므로 산악 지형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구사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임꺽정 부대가 수령들을 거리낌 없이 처단한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는 나라를 욕보이고 국가의 권위를 훼손시키는 행위이다. 임꺽정 부대는 단순히 물자를 약탈하는 도적떼인 ‘군도(群盜)’가 아니라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역집단인 ‘반적(叛賊)’으로 간주되었다.

1559년(명종14년)에는 개성(開城)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捕盜官) 이억근(李億根)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개성부 유수에게 도둑의 두목을 잡으라는 엄명을 내렸다. 한 달이 지나도 잡지 못하자 임금은 도둑잡기를 게을리 하는 수령에게는 엄벌을 가하고 공을 세우면 후한 상을 내리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작은 도둑무리만 잡았을 뿐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1560년 8월에는 서울까지 임꺽정과 그 일당이 출몰하였다. 장통방(長通坊: 종로구 종로2가 부근)에서 그들을 잡으려 하자 활을 쏘아 부장(部將)을 맞히고 달아났는데, 이 때 임꺽정의 아내와 졸개 몇 사람이 붙잡혔다. 임꺽정의 아내는 형조 소속의 종으로 삼게 하였다.

이 해 10월에 금교역(金郊驛)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고 연도를 삼엄하게 경비하였지만, 이들은 봉산에 중심 소굴을 두고 평안도의 성천·양덕·맹산과 강원도의 이천 등지에 출몰하며 더욱 극성을 떨었다. 이들은 황해도에서 빼앗은 재물을 개성에 가서 팔기도 하고 서울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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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적 임꺽정 1편

■ 의적 임꺽정 1편

■ 의적 임꺽정 1편

임꺽정은 조선 중기 명종 임금 대에 양주(楊州)의 백정(白丁) 출신으로 일명 임거정(林巨正) 또는 임거질정(林巨叱正)이라고 불리우던 인물이다. 조선시대의 백정은 도살업, 유기제조업, 육류판매업 등에 종사하여 신분적으로는 노비가 아니지만, 그 직업이 천하다하여 노비보다 더 심한 천대를 받았다.

임꺽정이 등장할 무렵의 조선사회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실제로 명종대의 진정한 대도(大盜)는 임꺽정이 아니라 실권자 문정왕후의 혈육 윤원형(尹元衡)이었다. 윤원형은 명종의 외삼촌이자 문정왕후의 동기간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고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었다. 임꺽정의 난이 기록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1559년 황해도 지역의 지방 관리들은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친정 식구들이었다. 당시 그 지역은 극심한 흉년과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할 지경이었다. 가난과 전염병으로 쪼들린 농민들은 살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다가 도적이 되는 것이 기본 수순이었다. 임꺽정 역시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사회의 지배 계급인 양반들의 등쌀로 농촌이 극도로 피폐해져서 농민들은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연산군 시대부터의 호화 방종한 생활은 백성들의 피와 땀을 짜는 착취를 불러왔고, 그 후로도 잔재가 여전히 남아 가중한 세금은 그대로 시행되어 오고 있었다. 이것을 개혁하고 시정하자는 논의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종(祖宗)의 법을 함부로 고칠 수 없다는 핑계로 조정신하들은 이를 그대로 두었다. 백성에 대한 고질은 이것뿐이 아니었다. 이 밖에 군역, 부역 등의 부담과 함께 여러 가지 세금과 국경 수비의 수자리 등등은 농촌사회를 거의 붕괴 직전의 위기에까지 몰아넣었다.

이러한 농촌 피폐 현상은 자연히 도적들의 발호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적으면 사오 명, 많으면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돌아다니면서 토호와 부자들을 습격해서 그들의 재산을 털어 가곤 하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집단이 황해도의 대적 임꺽정이었다. 임꺽정은 날쌔고 용맹한 리더십으로 불평분자와 무뢰배들을 규합하여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임꺽정은 청석골을 근거지로 황해도와 평안도는 물론 경기도까지 출몰하였다. 그들은 황해감사나 평안감사가 나라에 바치는 진상물을 털기도 하였고, 감사의 친척을 가장하여 수령들이 부정으로 축재한 재산을 빼앗기도 하였다. 임꺽정 무리들은 관청이나 양반, 토호의 집을 습격하여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인 재물을 도로 가져갔고, 심지어 과감하게 관청을 습격하는 등 공권력을 향해 항거하기도 했다. 이는 임꺽정 무리들이 일개 좀도둑이 아닌 농민저항 수준의 반란으로 세력이 커졌음을 말해준다. 민중들이 임꺽정에게 관군의 동향을 미리 알려주고 그들의 활약에 환호를 지른 것은 그들이 단순한 도적떼만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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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6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6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6편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은 당시 서인의 영수 정철(鄭澈)이 동인을 핍박하기 위해 확대 조작한 사건이다. 정철(鄭澈)은 이 옥사를 공정하게 처리한 것이 아니라 동인을 누르고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으며,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적인 감정이 그대로 표출됐다. 기축옥사(己丑獄事)를 주도하여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긴 정철(鄭澈)은 본격적인 당쟁 시대를 연 장본인이기도 했다.

단재 신채호의 정여립에 대한 평가를 보면, 『정여립(鄭汝立)은 400년 전에 군신(君臣) 강상론(綱常論:삼강과 오륜,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타파하려고 한 동양의 위인으로, 계몽사상가인 루소와 견줄 만하다. 하지만 루소와 같이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루소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으로 이어졌지만, 정여립(鄭汝立)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라고하면서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17세기 영조 때 남하정이 당쟁에 관해 쓴 책인 《동소만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정여립(鄭汝立)이 변승복의 꾐에 빠져 진안군 죽도에서 놀고 있을 때 선전관이 현감과 같이 두들겨 죽이고는 자살했다고 아뢰었다.』

정여립(鄭汝立)의 시체는 한양에 도착하여 능지처사 되었으며, 한 토막씩 잘린 다음 8도에 흩어졌다. 선조는 정여립(鄭汝立)의 집터를 파헤치고 숯불로 지져 그 맥을 끊고 연못으로 만든 다음, 제왕의 기운이 있다고 전해 오던 정여립(鄭汝立)의 조상 묘 터까지 파헤쳐 유골을 꺼내어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렸다고 한다. 연산군 때 유행했던 쇄골표풍(碎骨飄風)이 여기서도 등장했다. 1584년부터 정권을 잡지 못해 울분에 차 있던 서인들은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이 기회를 이용하여 동인의 싹을 자르려고 했던 듯하다.

기축옥사로 인해 김시민, 이억기, 신립, 이순신 등 임진왜란 당시 활약했던 장수들을 이끌고 이탕개의 난을 평정했던 우의정 정언신(鄭彦信)은 정여립과 9촌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였고,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은 정여립과 역모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묘향산에서 끌려가 선조에게 친히 국문을 받았으며, 사명당(四溟堂) 유정은 오대산에서 강릉부로 끌려가 조사를 받는 등 훌륭한 인사들이 고초를 겪었다. 역모 사건이 당쟁으로 까지 확대 되어 공안 정국으로 치닫게 되었고 피를 부르는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기축옥사는 조선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사건이다. 당시 조선의 인구가 500만이라고 하는데(노비와 천민을 합하면 1,000만명) 그 중 1,000여 명이 죽고 유배에 처해졌으면 엄청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를 계기로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사건을 조작한 서인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본 사람들은 북인(北人), 온건파는 남인(南人)이 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진실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진실은 역사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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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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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謨反)사건은 말 그대로 역모를 준비한 사건이지 실제로 모반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 또한, 확실한 증거는 없고 역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던 일부 사람의 자백만 있었다. 정여립(鄭汝立) 역모사건의 최정점에는 길삼봉이란 인물이 있었는데 정여립은 길삼봉 다음의 서열이라 했다. 전국에 비상망을 치고 괴수인 길삼봉 체포에 전력을 다했으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길삼봉은 체포되지 않았다. 그도 당연한 것이 길삼봉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정여립(鄭汝立) 하나만 가지고는 역모로 모함하기에 좀 모자란 듯하여 서인들이 조작해 낸 허구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정여립의 모반사건은 조선왕조 최대의 정치 미스터리라고 한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작이냐, 실재냐 하는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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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謨反)사건으로 야기된 기축옥사 당시 국문(鞫問:죄인 심문)을 지휘한 추국청(推鞫廳)의 책임자, 즉 위관(委官)이 서인 정철이었는지, 동인 류성룡이었는지를 두고도 현재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서인 정철과 동인 류성룡 두 사람 중 추국청의 위관이 누구였느냐에 따라 정여립 모반사건이 조작이냐 실재냐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인인 정철이 위관이었다면 서인과 동인 간의 권력 투쟁에서 비롯된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이 크게 의심되고, 동인 류성룡이 위관이었다면 진짜 역모사건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철이 위관이었다는 것이 정설(定設)이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추관은 정철(鄭澈)이었고, 백유함과 이춘영이 추국을 도왔다. 이들은 옥사를 주관하면서 서인(西人)인 자신들과 의논이 다른 자들을 모조리 연루시켜 죽였던 것이다. 억울하게 죽은 인물들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기축옥사(己丑獄事)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맑은 선비로 명성이 높았던 이발, 정개청, 최영경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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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이 서인에서 동인으로 돌아서면서 동인의 실세(實勢) 이발(李潑)과 친해졌다. 이발(李潑)은 임금 앞에서 실시되는 과거인 알성시에 장원급제한 인재인데다가 혁명가적인 기질을 지니고 있어서 정여립(鄭汝立)과 기질 상 잘 맞았다. 이발(李潑)의 부친은 전라관찰사를 지낸 이중호이고, 형제들이 모두 벼슬에 나아가 이발은 아주 괜찮은 집안 출신이었지만, 정여립과 가깝게 지냈다 하여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이발(李潑)의 친족이 모두 잡혀와 고문을 받았는데, 이발의 어머니 윤씨는 나이가 82세였으나 압슬형을 받고 죽었으며, 겨우 여덟 살이었던 이발(李潑)의 아들도 선조의 명으로 맞아 죽었다. 압슬형이란 널빤지 위에 날카로운 사기 조각을 깔고 그 위에 무릎을 꿇게 한 다음, 무릎 위에다 무거운 돌을 올려놓는 형벌이다. 죄인이 고문을 해도 죄를 불지 않으면 사람이 올라가서 밟기도 하는데 여섯 명까지 올라갔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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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4편

정여립(鄭汝立)이 대동계를 조직해 전주 지역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선조 20년, 전라도 해안지방에 왜구가 쳐들어왔다. 당시 전주부윤이던 남언경은 여러 고을에 병력파견을 요청했으나 여의치 않자,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정여립(鄭汝立)은 즉시 수백 명의 대동계 계원들을 집합시키고 믿을 수 있는 무사를 출정시켜 왜구를 물리쳤다. 뒤에 남언경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는데, 그는 대동계(大同契)를 왜구를 대비한 지역 방어조직으로 보았고, 허약한 국가의 방위체제를 보안하기 위하여 사병(私兵)을 양성한 것이었다고 진술했다. 진보 지식인이었던 정여립(鄭汝立)은 풍수와 천문지리, 병법에도 일가견이 있었는데, 당시의 성리학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것들은 모조리 이단이었다. 거기다가 대동계(大同契) 계원들까지 수백 명을 거느리고 있으니, 서인들이 보기에는 영 꺼림칙했으므로 역모로 몰아 죽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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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축년(1589년) 10월,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신천군수 한웅인 등이 고변을 했다. 정여립(鄭汝立)이 전라도에서 역모를 꾸미는 것을 안악에 사는 조구가 밀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선조는 즉시 금부도사를 보내 정여립(鄭汝立)을 체포하도록 했다. 그 무렵 황해도 안악에 있던 변승복은 조구가 정여립(鄭汝立)을 고변했다는 말을 듣고 금구까지 나흘만에 달려가 정여립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변승복은 별명이 호랑이라고 알려질 만큼 용맹한 인물로 정여립의 측근이었다. 소식을 들은 정여립(鄭汝立)은 아들 정옥남, 그리고 박연령의 아들 박춘룡을 데리고 밤을 틈타 도망쳤다. 이튿날 금부도사가 들이닥쳤으나 정여립(鄭汝立)은 이미 도망친 후였고, 그 집에는 승려 지영과 사장, 그리고 창고에는 백미 200석과 잡곡 100석 정도가 있을 뿐 이었다. 당시 정여립(鄭汝立)은 동인에 속해 있었고, 동인들은 아무도 정여립의 모반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금부도사가 정여립(鄭汝立)의 집에서 편지들을 모조리 압수해 한양으로 가져갔다. 이로써 정여립(鄭汝立)과 편지를 주고받은 자들은 모두 역모의 연루자로 몰려 애매한 죽임을 당한 자가 지천으로 생겨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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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구에서 도망친 정여립은 진안 죽도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나 진안 현감 민인백의 포졸들에게 발견되었다. 산골짜기에 들어가 마른 풀을 쌓아놓고 그 속에 숨어 있다가 관군이 사면으로 포위해 들어오자, 칼을 빼어들고 관군에게 달려들려 했다. 이에 변승복이 말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우리가 자결할 것이지 관군이 무슨 죄가 있소? 우선 나부터 죽여주시오." 이 말을 들은 정여립(鄭汝立)은 변승복을 칼로 쳐서 죽이고 아들 옥남이도 베었으나 칼이 빗나가 옥남이는 죽지 않았다. 진안 현감 민인백이 투항을 권고하자 정여립(鄭汝立)은 칼자루를 땅에 꽂아놓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 칼끝에 목을 찔러 죽었다고 한다. 근데 여기서 의문인 점은 칼자루를 어떻게 땅에 똑바로 꽂을 수 있었을까? 자살을 위장한 타살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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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3편

동인으로 전향한 정여립은 서인으로부터 비난 받았고 선조는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선조는 정여립이 당적을 바꾸고 이이를 비판하는 행동을 보고 건방지고 간사한 사람이라 하여 좋아하지 않았다. 선조가 자신을 꺼리자 정여립(鄭汝立)은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때 그의 나이 39세였다. 현재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동곡마을에 낙향하여 인근 지역의 관리나 선비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한동안 김제에서 지내던 정여립은 전라북도 진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지역에서 정여립의 이름이 점차 알려지자, 진안 죽도에 서실(書室)을 지어놓고, 자기 집을 드나들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체제에 도전하고 평등한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만민평등의 모임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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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대동계를 조직하면서 당시로서는 놀라운 사상을 주장했다. 정여립의 사상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가 보아도 놀라울 정도로 선진적이었다. 그는 신분혁파를 주장하고 인권을 중요시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이른바 천하공물설은 서양의 사회계약론 보다 더 앞서 나온 계몽사상인 것이다. 정여립은 유교로 지배하는 조선 사회에서 보기 드문 혁명가였다. 대동계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대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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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은 반상(班常:양반과 상민)의 귀천과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차별, 남녀의 차별도 없는 대동계(大同契)를 만들어 누구나 들어올 수 있게 하였고 무술을 연마하기도 했다. ‘천하는 만민의 것’이라는 대동사상(大同思想)은 당시의 정치 이념이자 사회통념인 유교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대동계의 대동(大同)이란 대동소이, 대동단결, 태평성세의 의미로 쓰인다. 즉 아무 차별이 없고 모두 같이 잘 사는 이상사회의 의미인 것이다. 당시 조선의 백성들은 그저 양반의 수탈 대상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 정여립은 이런 사회를 엎어버리고 싶은 생각을 가진 선각자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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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鄭汝立)은 기존의 신분질서에 도전하고 백성중심의 정치체제가 실현되는 길을 모색하다가 정치적 희생을 당한 불운한 진보적 지식인이었다. 그 시대에 왕권 세습에 문제 제기를 하기도 했던 그는 지나치게 시대를 앞선 지식인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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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2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2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2편

정여립(1546년∼1589년)의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仁伯)으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무예와 활쏘기에 뛰어나고 총명하여 한 번 배우면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밤을 새워 책을 읽을 만큼 책을 좋아하여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에 두루 능통했으며, 글씨와 시에도 능해 전주 일대에서는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난 호남(好男)인데다가 사리분별력이 있어 강직하고 비굴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수의 기록에 정여립을 조선 중기의 끔찍한 모반자(謀反者)로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를 두고 전주부윤이며 양명학자였던 남언경은 “정공(鄭公)은 학문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재주도 다른 사람이 가히 따르지 못할 바이다.”라고 하면서 정여립을 주자에 비유하였고, 이이 역시 “호남에서 학문하는 사람 중 정여립이 최고”라 하였다. 이렇듯 정여립은 당대의 뛰어난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그가 가진 남다른 재주와 개혁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비운의 주인공이 된 것은 아닐까.

정여립(鄭汝立)은 선조 3년 24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를 했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이른 성공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도성으로 올라간 정여립(鄭汝立)은 서인 이이(李珥)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이(李珥)의 문하에는 인재가 넘쳤으나 그 중에서도 정여립(鄭汝立)은 재주가 뛰어나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이(李珥)는 그의 재주를 아껴 기회가 닿는 대로 조정에 천거했다. 그런데 1584년 서인의 거두 이이(李珥)가 사망했다. 이이는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으며, 마음이 그리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경솔하고 편견과 아집이 있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생전에 이이(李珥)를 신뢰했던 선조도 이이가 죽고 나자 그에 대한 신뢰감이 점점 사라져갔다. 동인들은 이이(李珥)를 탄핵하며 공격했다. 정여립도 이에 가세하여 율곡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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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李珥)의 추천으로 조정에 발을 디딘 정여립(鄭汝立)이 스승을 공격하기 시작한 이유는 확실치 않다. 그가 이조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죽음 직전의 이이(李珥)가 한사코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이유와 그의 기질이 동인의 영수인 이발(李潑)과 좀 더 잘 맞았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어쨌든 이이(李珥)는 겉과 달리 속으로는 정여립(鄭汝立)의 과격성을 많이 걱정한 듯하다.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년 후 조정에 다시 들어온 정여립(鄭汝立)은 경연(經筵:어전에서 경서를 논함)에서 서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스승인 이이(李珥)를 나라를 망친 소인 이라고 혹평하며 스승을 배반했다. 동인으로 변신하여 당적(黨籍)을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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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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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1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1편

■정여립 모반사건과 기축옥사 1편

16세기 후반,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조선은 창건 이후 200여 년 동안 큰 전란(戰亂)없이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우리나라 역사 상 유례없이 긴 평화의 시대였다. 하지만, 선조가 즉위하고부터 시작된 붕당정치의 폐단은 날로 심해져 부국강병보다는 당리당략을 위한 당쟁을 일삼느라 아무 준비도 못한 채 임진왜란이라는 큰 국난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 1589년(선조 22년) 기축옥사(己丑獄事)을 촉발시킨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모반(謀反)사건이 일어났다. 1589년(선조 22년)에 시작하여 1591년(신묘년, 선조 24년)까지 약 3년 동안 계속된 기축옥사(獄事)는 서인에 의해 동인이 몰락하게 되는 피의 숙청사건을 말한다. 특히 정여립이 호남출신이라 동인 중에서도 호남출신 유학자들의 씨를 말릴 정도로 큰 피해를 주었다. 기축옥사는 조선 시대 4대 사화,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년),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년), 을사사화(명종 1년, 1545년)에서 희생된 500여 명의 두 배가 넘는 약 1천여 명이 희생된 조선왕조 500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대사건이었다. 기축옥사가 사화(士禍)로 불리지 않고 옥사(獄事)로 불리는 이유는 선비들이 주로 죽임을 당한 사화보다 피해 계층이 매우 넓고 다양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에서 위관(委官:조사관)으로 임명 된 송강 정철은 정승에서부터 천민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한 숙청을 하여 문인(文人)으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송강 정철은 왜 이리 잔인한 숙청에 앞장섰을까. 선조는 정철을 위관(委官)으로 삼아 옥사를 다스리게 했는데, 서인 중에서도 강경파에 속했던 정철은 동인 중 평소 과격한 언행을 했던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는 등 매우 가혹하게 다스렸다. 그 때문에 그는 사건이 끝난 후 동인들에게 ‘동인백정’이라는 말로 미움을 받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기축옥사는 그 실체가 아직까지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우리에게 많은 의문점을 던지고 있지만, 아마도 당시 조선왕조의 당쟁이라는 정치 구조 속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고, 지역 내 사림 사이의 갈등과 개인적인 감정 대립이 서로 얽혀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1천 명이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은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대동계와 당시로서는 위험한 정여립의 사상, 동서분당의 권력투쟁, 정철의 개인적 보복심리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섞여져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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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3편

■선조宣祖 3편

■선조(宣祖) 3편

정유재란이 끝난 후인 1600년 의인왕후 박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조(宣祖)는 2년 뒤 51세가 되던 해에 김제남의 딸(19세)을 새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녀가 인목왕후(仁穆王后)이다. 역사 드라마 속에서 ‘인목대비’로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4년 후 인목왕후(仁穆王后)가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낳으면서 후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선조(宣祖)의 맏아들 임해군과 둘째 광해군은 공빈 김씨 소생이었고, 셋째 아들 의안군과 넷째 신성군은 인빈 김씨 소생이었다. 그리고 인목왕후(仁穆王后)가 낳은 영창 대군이 바로 선조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정비 소생이었으니, 이때부터 선조(宣祖)의 마음은 광해군에게서 떠나기 시작했다.

선조(宣祖)는 재위 41년을 맞으면서 병세가 심해졌다. 가망이 없음을 안 선조는 전교(傳敎)를 내리기 위해 세 정승을 불렀다. 이때 영창대군의 나이는 겨우 2살이었다. 아무리 정비(正妃) 소생의 적자(嫡子)라 해도 세자의 직무를 16년이나 그것도 국난을 극복하고 전후 수습 등의 난제(難題)를 잘 수행해 온 34세의 세자가 있는데, 이를 폐하고 두 살배기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결국 선조(宣祖)가 죽고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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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의 죽음에 대해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던 북인(北人)이 기록한 선조실록에는 선조가 병으로 죽었으며, 마지막 임종을 왕비 인목대비가 지켰다고 했다. 그런데 광해군을 몰아낸 서인 측의 기록인 선조수정실록에는 선조(宣祖)가 승하하는 당일 미시에 광해군(光海君)이 찹쌀떡을 올렸는데, 선조가 이것을 먹고 갑자기 기가 막히며 위급한 상태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같은 상황을 두고 이렇게 기록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당연히 집권세력 당(黨)의 이해관계에 따른 것이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이 주도해서 다시 기록한 선조수정실록은 역시 승자의 기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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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도 ‘선조 독살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입시(入侍)했던 의원 성협이 “임금의 몸이 이상하게 검푸르니 바깥소문이 헛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