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4일 일요일

성종과 소춘풍 1편

■ 성종과 소춘풍 1편

■ 성종과 소춘풍 1편

조선 왕 중에 대표적인 호색한이라 하면 당연히 연산군을 꼽지만, 연산군의 그런 성정(性情)은 성종으로부터 유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성종은 술을 몹시 즐겼고, 색도 밝혔다. 성종은 열세 살에 왕위에 올라 25년간 용상에 있다가 서른여덟 살에 죽었다. 여색을 좋아했음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38세에 요절하면서도 왕비가 셋이나 되고, 후궁은 무려 14명, 28자녀(16남 12녀)를 두었던 성종은 ‘주요순 야걸주(晝堯舜 夜桀紂)’라는 말도 들었다고 하니 소춘풍과의 염문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

조선 중기의 문신 차천로의 야담집인 《오산설림》엔 성종과 함경도 영흥의 이름난 기생인 소춘풍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다. 봄바람에 웃는다. 는 뜻의 소춘풍은 기명일 뿐, 그의 본명과 정확한 생몰 년대(生歿年代)는 전하지 않는다. 그녀의 탄생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

함경도 두메산골에 홀로 사는 과부가 있었는데 얼굴이 박색이라 아무도 찜하는 남자가 없어 무지무지 외롭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석양 무렵 칠십이 다 된 늙은 탁발승이 과부의 집에서 머무르기를 청했다. 그날 밤 노승은 과부와의 동침을 요구하며 어젯밤의 꿈 얘기를 했다. 꿈에 만경창파(萬頃蒼波)가 눈앞에 전개되고 잠시 후에 그 망망대해 한 복판에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오르더니, 그 꽃을 보고 있는 동안에 꽃이 자꾸만 커져서 바다 전체가 꽃 한 송이로 가득 차버렸다는 것이었다. 기이한 것은 그 과부도 그 전날 저녁에, 산 속에서 웬 백발노인이 과부에게 연꽃 한 송이를 주며 집에 가지고 가 정성스럽게 키우라면서 홀연히 사라지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과부는 그날 밤 노승을 받아들였다. 다음 날 아침 노승은 떠나면서 애가 태어 난 후에는 상관없으나, 애가 태어나기까지는 일체의 외간 남자를 삼가하라는 다짐을 했다. 과부는 떠나는 탁발승에게 이름이라도 알려 달라고 하였으나, 떠도는 몸이라고 이야기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이 후 태어난 아기가 소춘풍이다.

성도 이름도 모르는 늙은 탁발승에게서 태어난 소춘풍은 태어나면서부터 미모가 뛰어났고 총명하기까지 했다. 5살 때부터 쌍용사의 선원에서 글을 배우고 불경을 배웠는데, 열 살이 지났을 때에는 불경에 무불통지(無不通知)했다 한다. 그녀가 12 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쌍용사의 중들이 입적하기를 권유하는 것을 뿌리치고 있다가, 어느 날 불공을 드리러 왔던 어느 기생의 수양딸이 되어 영흥으로 오게 되었다. 이름에서 풍기듯 인생을 봄바람에 웃듯 유유자적하게 살다 가기 위하여 스스로 기생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안달복달

별것도 아닌 일에 공연히 속을 태우며 조급하게 굴고, 스스로를 조급하게 몰아치는 것을 ‘안달복달’ 이라고 한다. ‘안달’은 동사 ‘안달다’의 어간이 그대로 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안달다’는 명사 ‘안’과 동사 ‘달다’가 결합된 구성인데, ‘안’은 ‘內’의 뜻으로 ‘안달다’에서는 ‘속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달다’는 ‘안타깝거나 조마조마하여 마음이 몹시 조급해지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단단한 물체가 열로 몹시 뜨거워지다’의 ‘달다’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안달다’는 ‘속마음이 타서 몹시 조급해지다’가 된다. 우리는 현재 ‘안달다’ 대신 ‘안달’에 접미사 ‘-하다’가 결합된 ‘안달하다’를 많이 쓰고 있다. ‘안달’을 강조해서 말할 때 ‘복달’을 결합해 ‘안달복달’이라 한다. 여기서 ‘복달’은 본래 ‘눈치코치’에서 ‘-코치’와 같이 단순히 운(韻)을 맞추기 위한 첩어 요소인데, 굳이 첩어 요소로 ‘복달’을 취한 것은 안달을 심하게 하여 조급하게 볶아친다는 의미를 가지기 위함이다. 그래서 ‘안달복달’은 ‘안달’을 단순히 강조하는 의미를 넘어 ‘안달하며 볶아치는 일’로 재해석된다.

2. 미봉책(彌縫策)과 고육책(苦肉策)

말이나 행동에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아 고쳐야 한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서는 발전이 없다. 또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해서 다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문제가 있는데도 대충 덮어놓고 지나가고, 그때그때 때워 넘기면 나중에는 겉잡을 수없이 문제가 커질 수도 있다. 이렇게 임시변통 식의 문제 해결 방식을 미봉책(彌縫策)이라 한다. 미봉(彌縫)이란 옷감의 터진 부분을 깁고 꿰매는 것을 말한다.

미봉(彌縫)이란 말은 원래 나쁜 뜻이 아니다. 춘추 시대 정(鄭)나라 장공(莊公)이 주(周)나라 환왕(桓王)과 싸울 때 둥근 진을 벌여 놓고 전차를 앞세우고 보병을 뒤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일부 병력을 보내 그 사이를 채우게 하였다. 이것을 두고 미봉책(彌縫策), 즉 터진 부분을 메우는 계책이라고 하였다. 이 미봉책을 써서 수적 열세를 딛고 환왕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봉책이라는 말은 본질적인 문제를 덮어둔 채 그때그때 눈가림 식의 해결로 대충대충 넘어가는 태도를 나무라는 부정적인 의미가 크다. 미봉책으로는 당장의 위기를 모면할 수는 있지만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

고육책(苦肉策)이라는 말도 있다. 고(苦)는 쓰다 또는 괴롭다는 뜻이고, 육(肉)은 고기 또는 살을 말한다. 말 그대로 육체를 괴롭게 하는 계책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赤壁大戰)에서 오나라 주유(周瑜) 진영이 조조(曹操)의 백만 대군과 싸울 때였다. 주유 진영의 황개(黃蓋)라는 장수가 조조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은 뒤 일부러 거짓으로 항복하여 신임을 얻었다. 황개는 조조에게 배를 묶게 하는 계략을 써서 마침내 오나라가 화공(火攻)으로 전쟁에 이기도록 하였다. 이렇듯 어떤 큰일을 이루기 위해 괴로움이나 손해를 감수하면서 쓰는 계책을 고육책(苦肉策)이라고 한다.

",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 황진이의 남자들 7편

지족선사는 깊은 산중 암자에서 불도(佛道)만 닦고 살았기에 참으로 이런 절색은 본 적이 없는지라 마치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여 자신의 수행을 시험해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지족선사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해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이것이 필시 관세음보살이 아니라 둔갑한 여우가 틀림없어! 두려운 생각에 지족선사는 열심히 염주를 굴리며 속으로 쉴 새 없이 염불을 했다. 그런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지족선사의 30년 면벽수행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황진이에게 순식간에 30년 공든 수행의 탑이 무너져버린 지족선사는 그 뒤 실성한 사람이 되어 산을 내려와 황진이를 다시 만나려고 송도 거리를 미친 사람처럼 방황하다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황진이와 지족선사와의 이야기는 허균이 지은 <성웅지소록>에 "30년 면벽의 지족선사도 나에게 무너졌다"는 황진이의 회고가 전부이다. 야사에 나오는 이 짧은 이야기로 사실 진위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황진이가 정말로 존경하고 사랑한 화담 서경덕이다. 당시 화담은 개성 영통동에서 북쪽인 박연폭포로 가는 길가 오른쪽 화담이라는 연못가 서사정(逝斯亭)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며 은거하고 있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승부욕(?)이 발동하여 서경덕에게 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서경덕은 끝까지 의연하였다. 그래서 황진이는 이에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聖人)이다."라고 말하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되었고 후대 사람들은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 이 세 사람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서경덕이 세상을 떠나자, 황진이는 기생 일을 접고 은둔하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곡을 하지 말고 상여가 나갈 때 풍악을 울릴 것이며, 살아생전에 세상을 어지럽히고 남자들을 애태우게 한 죄가 있으니 관을 쓰지 말고 자신을 송도 밖의 모래밭에 그냥 던져서 까마귀밥이 되게 해 방탕한 여자들에게 경계로 삼으라고 했다는 유언이 있다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설"일 뿐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설이든 실제든 황진이가 까마귀밥이 되는 것이 안타까웠던 송도 사람들이 시신을 고이 안장하여, 현재 북한 장단 남정현 고개에 황진이의 묘가 있다. 묘비명은 한글로 "명월 황진이의 묘"라고 되어 있고, 북한에서 일반유적으로 지정되어 묘역도 비교적 잘 정돈되어 있다고 한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회석(宴會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진 것이 많고, 기생의 작품이라는 점 때문에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사라진 것이 많을 것이다. 현전하는 작품은 5, 6수에 지나지 않으나 기발한 이미지에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라는 시조라든지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베어내어> 같은 시조들은 교과서에도 실리고, 수능에도 출제된 바가 있다. 황진이의 삶은 남성위주시대에 오히려 당당히 맞서며, 사랑은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다. 시화에 능하고 풍류를 알아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다른 미인들하고는 차원이 다른 女人인 듯 하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6편

■ 황진이의 남자들 6편

■ 황진이의 남자들 6편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蒼海)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시조의 뜻을 풀어 보면 『벽계수님아, 그렇게 급히 가지 마세요. 여기를 한 번 지나가 버리면 (혹은 인생이란 한 번 지나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언제 다시 자신과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 내가 이렇게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데 함께 즐겨봄이 어떤가요?』 라는 뜻이다.

"

시조를 읊는 황진이의 아름다운 모습에 그냥 갈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다 놀란 벽계수가 타고 가던 나귀에서 떨어졌다. 큰소리 친 것과는 달리 별로 군자답지 못한 벽계수를 보고 실망한 황진이는 “이 사람은 명사가 아니라 단지 풍류랑일 뿐이다”라며 다시는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하고 현재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사실은 이는 좀 과장된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황진이가 벽계수를 만난 것이 이사종과 동거하기 이전인지, 그 뒤의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그때는 이미 황진이의 명성이 온 나라 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

여섯 번째 남자는 이생이다. 아버지가 정승을 지냈다는 이생은 황진이를 만나자 함께 금강산 유람을 가자고 권했다. 황진이가 좋다 하여 함께 유람길에 올랐다. 그렇게 길을 떠난 두 사람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샅샅이 누비고 다니며 빼어난 경관에 넋을 잃었는데, 금강산 구경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만 노잣돈이 떨어지고 말았다. 두 사람은 이 절 저 절을 찾아다니며 얻어먹어야 했고, 나중에는 황진이가 몸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고 두 사람은 미련 없이 헤어졌다.

일곱 번째 남자는 지족선사(知足禪師)이다. 황진이 때문에 가장 대표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면벽(面壁) 수련 30년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눈웃음 한 번에 넘어가 파계(破戒)를 했다고 사람들은 비웃는다.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개성 교외의 천마산 청량봉 기슭에 지족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곳에는 30년 동안 면벽수행을 하여 생불(生佛) 소리를 듣는 지족선사라는 고승이 있었다. 사람들은 지족선사는 아무리 어여쁜 황진이가 와서 유혹해도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어느 비오는 날 황진이가 소복을 하고 지족암을 찾아갔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5편

■ 황진이의 남자들 5편

■ 황진이의 남자들 5편

네 번째 남자는 양곡(陽谷) 소세양이다. 소세양은 중종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나중에 대제학을 지냈는데, 그 또한 당대의 풍류남아를 자처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황진이를 만나기 전에는 평소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그렇게 큰소리치고 송도에 내려가 황진이를 만났는데, 과연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두 사람은 한 달을 기약하고 동거를 했다. 어느덧 그날이 다가와 이별의 술잔을 나누는데, 소세양은 안절부절하고 황진이는 시 한 수를 읊었다.

‘내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라도 그리는 정은 푸른 물결처럼 끝없으리니’

이 애절한 시 한수에 소세양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그녀와 한동안 더 머물러 살게 되었다.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써 사랑했던 이는 바로 소세양이라고 한다. 황진이가 소세양을 그리워하며 쓴 시를 가수 이선희가 노랫말로 불렀던 ‘알고 싶어요(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 생각 하세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 소세양과 황진이의 사랑 이야기는 소세양의 신도비(神道碑: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는 비석)에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사대부 가문의 인물이 한낱 기생을 연모(戀慕)했던 사실을 신도비에 각인(刻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

다섯 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이다. 벽계수의 본명은 이종숙(李琮淑). 세종대왕의 17번째 아들인 영해군의 아들 이의(李義)의 셋째 아들이므로, 세종대왕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이런 종실(宗室)의 벽계수가 황진이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풍류명사(風流名士)가 아니면 어렵다기에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이 “그대가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 말대로 해야 하는데 따를 수 있겠소?”라고 물으니 벽계수는 “당연히 그대의 말을 따르리다”라고 답했다.

",

이달이 말하기를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황진이의 집 근처 루(樓)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재빨리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라고 했다. 벽계수가 그 말에 따라 작은 나귀를 타고 소동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들게 하여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한 곡 탄 후, 일어나 나귀를 타고 가니 황진이가 과연 뒤를 쫒아왔다. 취적교에 이르렀을 때 황진이가 동자에게 그가 벽계수임을 묻고 시조 한 수를 읊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황진이의 재주와 미모가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찬미하고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자, 벽계수는 자기는 그런 기생 따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벽계수의 사람됨을 시험하기 위해 송도로 내려온 그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이 시조를 읊었다고 한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4편

■ 황진이의 남자들 4편

■ 황진이의 남자들 4편

두 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이었다. 개성 유수 송공(송염 또는 송순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부임했을 때 관아에서 조그만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 황진이가 불려왔는데, 풍류깨나 즐길 줄 아는 송공은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한눈에 반했다. 황진이가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아보고 좌우를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름을 헛되이 얻지 않은 것이로군!” 하고 칭송했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황진이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원근을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자칭 타칭 풍류호걸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송도에 새로 나타난 기생 황진이를 꺾어보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명기에게 허신(許身)은 있어도 허심(許心)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황진이는 웬만한 사내에게는 허심은커녕 허신의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재주와 미모가 빼어난 만큼 황진이는 호락호락 아무 사내에게나 헤프게 정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 황진이는 이처럼 자신을 찾아오는 양반의 자제들이나, 잘난 척 거드름이나 피우는 당대의 명사들을 마음껏 농락하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듯 했다. 황진이의 이런 태도는 신분차별, 남녀차별이 극심했던 시대적 모순과 사회적 병폐에 대한 자기 나름대로의 저항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빼어난 용모와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천한 신분의 어미 몸에서 태어난 탓에 보통 여자들과는 달리 정상적인 혼인은 물론, 떳떳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었기에 그런 한을 이런 식으로 풀어보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세 번째 남자는 선전관(宣傳官) 이사종이다. 황진이와 선전관(宣傳官) 이사종과의 러브스토리는 야사를 모아놓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온다. 웬만한 남자는 눈에 차지도 않았던 황진이와 6년간이나 함께 동거한 행운의 사나이다. 이사종은 당대의 소문난 명창이요 풍류객이었다. 황진이와 이사종의 만남에 대해 야사에서는 천수관 근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이사종을 황진이가 발견하고 먼저 접근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황진이가 이사종에게서 강한 인상을 받는 반면, 이사종은 시종일관 무뚝뚝한 태도로 황진이를 대한다. 그러나 이사종의 그러한 태도로 인해 황진이는 더욱 그의 눈빛을 흔들어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서 처음에는 서로의 노래에 반하고 다음으로는 서로의 인물에 반해 더불어 살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매우 기발했다. 6년간 함께 살 되, 3년씩 상대방의 집에서 번갈아가며 살기로 하고, 그 동안의 생계 또한 집주인이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까 황진이와 이사종은 이미 500여 년 전에 계약동거를 실행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황진이는 스스로 짐을 꾸려 한양 이사종의 집에 가서 첩살이를 자청했다. 이사종의 가솔(家率)을 극진히 돌보면서 3년을 보내고, 다음 3년은 이사종이 황진이의 집으로 와서 함께 살았다. 6년이 지나자 처음 약속대로 깨끗이 미련 없이 헤어져 남남으로 돌아갔다.

- 5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3편

■ 황진이의 남자들 3편

■ 황진이의 남자들 3편

야담(野談)과 야사(野史)는 대체로 황진이를 음탕한 요부(妖婦)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것은 다분히 유교양반사회에서 기생이라는 그녀의 신분으로 인해 생겨난 편견이기도 하다. 황진이는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생으로서의 이미지가 아닌 시와 글, 춤에 능한 예인(藝人)으로서의 역사적 인물로도 재해석해야 할 것 같다.

황진이의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이름의 아전의 딸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눈이 맞아 버렸다. 둘은 서로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미모는 날로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의 첫 번째 남자는 옆집 총각이었다. 황진이의 나이 15세 무렵, 그녀의 미모에 반한 이웃집 총각이 홀로 황진이를 연모하다 상사병으로 죽는 일이 발생했다. 총각의 부모는 창졸지간에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죽은 아들의 장례를 치러야했다.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상여에 관을 싣고 장지까지 운구를 했다. 성인의 장례에는 대부분 화려한 꽃상여를 썼는데, 결혼하지 않은 총각이나 처녀는 흰 종이와 천으로 만든 백상여에 태워 장례를 치렀다. 총각을 태운 백상여를 장지까지 운구하기 시작하였는데, 집에서 출발한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 다다르자 꼼짝없이 멈춰서는 것이었다. 상여를 맨 상두꾼들이 아무리 발을 떼려고 해도 땅에 찰싹 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때, 상여를 인도하던 선소리꾼(종구잽이)이 총각의 죽은 이유를 알았는지라 황진이 집을 향해 애절하게 만가(挽歌:상여를 멜 때 부르는 노래)를 불렀다.

방에서 이 소리를 들은 황진이는 마음이 짠해 왔다. 황진이도 이 총각이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입고 있던 치마를 벗어들고 대문까지 나와 상여 위로 던졌다. 황진이의 치마가 상여 위에 걸쳐지자 거짓말처럼 상여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후, 황진이는 스스로 기생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물론 그녀가 기생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녀(孽女)라는 신분과 여성의 사회활동이 제약받던 사회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통로로써 기생의 길을 택했을 지도 모른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 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 4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2편

■ 황진이의 남자들 2편

■ 황진이의 남자들 2편

개성 명기 황진이는 시와 노래에 능하고, 용모도 빼어나게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고루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왕조시대에 그것도 천대받던 기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명사들과 거리낌 없는 교분을 나누며 자유분방하게 살다간 비범한 여인이었다. 시‧서‧화‧창‧무(詩‧書‧畵‧唱‧舞)는 물론 아름다운 용모에 가야금과 거문고 등 악기연주능력 그리고 음주와 손님 접대 등 뛰어난 재능과 교양을 갖춘 개성이 낳은 만능 연예인이며, 당대 대표적인 예술인이었다.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지만,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을,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4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50대에 죽었다고도 하고, 믿기 어렵지만 60이 넘어 죽었다는 설도 있다. 틀림없는 사실은 황진이보다 30년쯤 연하인 백호 임제가 그녀의 무덤을 찾은 해가 선조 16년(1583년)이니, 그 이전에 죽었다는 점이다. 임제는 명종 4년(1549년)에 나주에서 태어나 29세 때인 선조 10년(1577년)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다. 35세 되던 선조 16년에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개성을 지나게 되었다. 임제 또한 당대의 풍류 호걸이라 평소에 황진이를 만나고 싶었으나, 그는 너무 늦게 태어났고 황진이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닭 한 마리와 술 한 병을 사 들고 그녀의 무덤을 찾아간 임제는 술을 부어놓고 한바탕 통곡한 다음 그녀를 그리워하는 시 한 수를 읊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듸 두고 백골만 무첫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업스니 그를 슬허하노라.

이 소문이 금세 퍼져 임제는 선비의 몸으로 일개 천한 기생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통곡까지 했다는 점에서 사대부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부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일설(一說)에 불과하고 부임 1년 뒤에 서울로 돌아와 예조정랑을 지냈다고 한다. 어쨌든, 황진이는 그때까지 사회적으로 천대받기만 하던 기생의 존재를 존중의 대상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황진이를 가리켜 기생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기생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든 명기 중의 명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황진이의 남자들 1편

■ 황진이의 남자들 1편

■ 황진이의 남자들 1편

조선시대에 기생으로 이름을 날린 인물로는 황진이 외에도 성종 앞에서 문무백관을 쥐락펴락하는 시를 남겼던 소춘풍이 있고, 황진이 버금가는 실력으로 이름을 날린 매창도 있다. 그렇지만 인지도로 봤을 때 황진이만 한 인물을 찾기는 힘들다. 기생을 일컬어 흔히 ‘누구나 꺾을 수 있는 꽃’이란 뜻으로 ‘노류장화’라 부르고,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라고도 부른다. 하지만, 황진이는 재능이 있으면 천민인 기생이라도 이름을 드높일 수는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황진이는 역사에 이름을 날린 것은 물론 후대에도 끊임없이 우리나라 대중문화에서 재해석되어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에 등장함은 물론 대중가요로도 재탄생되고 있다.

개성(송도) 출신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본명은 황진(黃眞), 기명(妓名)은 명월(明月)이다. ‘–이’는 이름을 부를 때 붙는 접미사로 ‘황진이’가 된 듯하다. 그녀가 남긴 시조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 문학사에 커다란 족적(足跡)을 남겼다. 화려한 절경의 박연폭포, 고매한 인품과 절개를 가진 서경덕과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리는 그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고, 간접사료인 야사(野史)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야사가 전하는 각양각색의 이야기는 많지만, 너무 신비화시킨 흔적이 많아 그 진위(眞僞)를 가리기가 매우 어렵다. 실존 인물인지 여부조차 불분명한 논개와는 달리 황진이는 그래도 실존 인물인 것은 분명하나, 어디까지가 진짜 황진이의 모습이고, 어디부터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를 가릴 길이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당시 권세가들의 족보가 잘 보존되어 있는 것과 달리 황진이는 한 시대를 풍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출생과 사망 연도 기록조차 없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하여는 황진사(黃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다고도 하고, 맹인의 딸이었다고도 전하는데, 황진사의 서녀로 다룬 기록이 숫자적으로는 우세하다. 타고난 절색에 명창이었으며, 시재(詩才)에도 능해 당대 최고의 명기로 많은 일화를 남긴 그녀는 당시로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여인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천부적 미모와 재주를 타고 났건만, 남녀차별과 신분차별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해 명월이라는 기생으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황진이였다. 남자 못지않게 빼어난 글재주를 지녔건만 여자로 태어나 과거를 보고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고, 신분이 천한 여자의 사생아로 태어났으니 정상적인 혼인으로 평온한 가정생활을 꾸려갈 수도 없었다. 이러한 숙명(宿命)이 황진이를 자존심 강한 당대의 명기로 만들고, 숱한 남성편력의 길을 걸어가도록 만들었으니, 이 또한 일종의 세상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고 스스로에 대한 보상심리가 아니었을까.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열어보지 않은 선물

열어보지 않은 선물

열어보지 않은 선물

우리가 맞이하는

하루 하루는 `열어보지 않은 선물` 입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마음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 하나 그것을 열어 봅니다.

무엇이 담겨 있는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내 눈과 귀와

손 끝이 발걸음이 그 것을

좋아하면 기쁨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이고

사랑이라 느끼면 사랑이라는

이름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마음으로 열면

그 것은 불평과 불만의 상자가 될 것이고

걱정과 후회의 마음으로 열면 그 것은

당신에게 힘들고 괴로운 날을 안기게 될 것입니다.

하루 하루 그 것은 당신에게 스스로 내용물을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귀한 선물입니다.

당신의 하루 하루가

사랑과 기쁨의 선물이 되면 좋겠습니다.

"

-부름과 대답이 있는 삶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