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배추 따서 쌈 싸먹고…신비주의는 가라, 유튜브 데뷔한 재계 총수들

◇배추 따서 쌈 싸먹고…신비주의는 가라, 유튜브 데뷔한 재계 총수들

◇배추 따서 쌈 싸먹고…신비주의는 가라, 유튜브 데뷔한 재계 총수들

“올해 채널 구독자가 50만이 된다면 와이제이(YJ)의 밸런스 게임 도전해보겠습니다! 질문을 댓글 달아주세요.”

여느 유튜버의 흔한 구독자 달성 공약같다. ‘밸런스 게임’은 짧은 시간 안에 선택하기 어려운 둘중 하나를 골라 대답하는 요즘 인기 있는 게임.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좋냐’같은 거다. 요즘엔 ‘100억 받고 50살까지 살기, 그냥 100살까지 살기’같은 질문을 여러개 던지는 식이다. 이런 흔한 공약이 화제가 된 건, 여기서 ‘와이제이’가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공약은 지난 11일 이마트 공식 유튜브 ‘이마트 라이브(live)’에 정 부회장이 등장한 두번째 영상에 게재됐다.

이번 영상은 앞서 지난해 12월17일 정 부회장이 이마트가 거래하는 해남 땅끝마을 배추 산지에서 배추를 수확하고 직접 배추쌈 등을 요리한 첫번째 영상이 3주 만에 120만뷰를 찍으면서, 그 뒷 얘기를 담았다.

이 영상에서 정 부회장은 배추 2행시(배고파, 추워)를 하는 ‘아재 개그’를 선보이고, 촬영 스태프들을 위해 전통시장에서 호떡을 사서 하나씩 나눠주는 모습 등이 담겼다. 12일 오후 기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조회수는 12만을 넘겼다. 이마트 유튜브는 정 부회장이 등장한 영상을 ‘YJ로그’라는 별도의 탭에 넣어, 향후 추가로 영상이 올라올 수 있다는 점을 예고했다.

최근 재계 총수들의 ‘유튜브행’이 화제다. 베일에 싸인 신비주의 리더보다도, ‘소통하는 리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는 반영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흔히 최고경영자의 포괄적인 홍보·이미지 전략을 가리키는 ‘피아이(PI, President Identity) 방향’이 기존 ‘리스크 관리’ 중심에서 ‘적극적인 소통’으로 무게가 옮겨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튜브는 정제된 언론보도 등으로 딱딱한 이미지의 재벌 총수를 인간적이고 소탈한 면모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최적화된 매체다. 그중 가장 돋보이는 건 정 부회장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 팔로워만 50만명이 넘는 대표적인 기업인 인플루언서인 정 부회장은 지난달부터 유튜브로도 영토를 넓혔다.

지난해 12월초 스타벅스커피코리아 유튜브에 나와 자신이 가장 즐겨 마시는 스타벅스 음료(자몽 허니 블랙 티, 제주 말차라떼, 나이트로 콜드브루)를 언급해 화제가 된 바 있다. 실제로 나이트로 콜드 브루는 12월 한달간 전달보다 3배가량 더 팔렸다. 이마트 배추밭 영상도 전년 대비 20% 매출이 증가하는 등 톡톡한 홍보 효과를 냈다.

배추쌈 레시피 아이디어도 정 부회장이 직접 내는 등 영상 제작에 마케팅 부서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냈다. 특히 이번 영상에선 자사 홍보를 넘어, 대형마트 대표가 직접 전통시장에서 장을 보는 장면까지 포함돼 상생 이미지에 ‘플러스’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마트 관계자는 “이마트의 강점인 신선식품을 알리는 동시에 보수적인 유통업계 이미지를 젊은층에게 친근하게 바꾸는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최태원 에스케이(SK) 회장도 다양한 형태로 유튜브에 나서고 있다. 에스케이는 최 회장이 지난해 12월22일 30년 근속한 그룹 직원들을 초청해 육개장을 만들어 대접한 영상을 유튜브로 공개했다. 베레모를 쓰고 앞치마를 두른 최 회장은 “좀 짜다”는 직원의 반응에 “좀 짜요? 엔초비만 넣었는데…”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이어 “(리더로서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70~80% 문제가 풀리더라”며 소통 방식에 대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최 회장은 2019년 직원들과 소모임으로 대화하는 ‘행복토크’를 100회 진행한 뒤, 지난해에도 이어가려 했지만 코로나19로 대면이 어려워지자 차선으로 동영상을 선택했다. 에스케이 관계자는 “특히 사내방송에 나온 자연스러운 회장님의 모습에 젊은 직원들의 반응이 좋았고, 외부로도 공개하자는 얘기가 있었다”며 “외부에 노출되는 것도 회장님이 전혀 꺼리시지 않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지난 8일엔 함영준 오뚜기 회장이 장녀와 함께 유튜브에 등장하기도 했다. 함 회장의 딸은 뮤지컬 배우 함연지씨로, 본인 유튜브 채널을 운영 중이다. 영상에서 함연지씨는 “요즘 아빠가 집콕 생활 중 쇼핑에 빠졌다”며 함께 쇼핑한 아이템을 소개했다.

크리스마스 의상을 함 회장이 즉석에서 옷을 갈아입고 만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오뚜기 홍보팀 관계자는 “회장님이 영상에 나오시더라도 저희도 나중에 알게 된다”며 “(함연지씨의) 이미지도 좋고 워낙 유튜브를 잘 하셔서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기업 총수들의 이런 유튜브 행보에 전문가들은 ‘득과 실’을 모두 지적한다. 기업 최고경영자들의 홍보 컨설팅을 진행한 김기훈 코콤포터노벨리 대표는 “소비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는 점에 대해선 나쁠 게 없지만, 영상이 의도하지 않게 구설수에 휘말리면 이미지가 한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를 외부 관점에서 바라보면 “법정 이슈와 같은 부정적인 과거 등을 가리고 본인의 이미지를 새로 입힌다고 볼 수도 있다”고도 덧붙였다. 노영우 피알원 소장은 “최근 피아이의 추세는 최고경영자가 본인의 이미지 파워로 회사 마케팅에 기여하는 것인데, 더 나아가 전문성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메시지까지 담을 수 있다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겨레-

◇ 파탄 난 스웨덴 집단면역

◇ 파탄 난 스웨덴 집단면역

◇ 파탄 난 스웨덴 집단면역

1923년 영국 맨체스터대 연구팀은 생쥐를 이용해 장염균 실험을 하다 감염 비율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집단에서 질병 확산이 멈추는 것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이 현상을 ‘집단면역(herd immunity)’이라고 불렀다. 과학자들은 신종 코로나의 경우 항체를 갖는 주민 비율이 60% 이상이면 집단면역을 형성할 것으로 보고 있다.

스웨덴은 코로나 초기부터 아이들은 등교하고 직장인은 출근하는 일상을 유지했다. 국경 통제를 하지 않았고 마스크 착용마저 강제하지 않았다. 스웨덴 공공보건청장은 “봉쇄 조치가 전염병을 막는 데 효과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맞벌이가 대다수여서 학교가 문을 닫으면 의료진의 4분의 1이 일하기 어렵다는 점도 고려했다. 사실상 집단면역을 추구한 것이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복지국가의 대명사인 스웨덴이기에 뭔가 계산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스웨덴의 코로나 확진자는 10일 현재 48만9471명, 사망자는 9433명이다. 인구가 우리나라의 5분의 1 정도인데, 확진자 수는 우리의 7배, 사망자 수는 8배가 넘는다. 이웃 노르웨이와 비교해도 확진자는 9배, 사망자는 20배에 이른다. 지난 11월엔 칼 필립 왕자 부부가 양성 판정을 받고 자가 격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칼 구스타브 16세 국왕은 크리스마스 메시지에서 “우리는 실패했다. 세상을 떠난 이가 너무 많아 처참한 심정”이라고 했다. 스테판 뢰벤 총리의 지지율은 급락해 정권마저 휘청거린다.

자연 감염에 의한 집단면역은 코로나 초기에 영국 등도 검토해본 방안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환자가 쏟아지면 의료 시설이 감당하지 못해 희생이 너무 크다는 결론을 내리고 포기했다. 사망률을 2%만 잡아도 스웨덴 인구(1000만 명)의 60%에 면역이 생기려면 12만 명의 희생을 치러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지난해 코로나로 큰 타격을 입은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주 베르가모시는 검사 결과 주민들의 항체 형성 비율이 57%였다. 그 수치에 이르기까지 인구 11만 명 중 무려 1만6000여 명이 숨졌다.

스웨덴은 뒤늦게 지난달 대중교통 이용 시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했고, 중등학교에 온라인 수업으로 대체하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했다. 북유럽 복지국가의 모델을 만든 스웨덴이 어떻게 이런 위험한 실험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과학을 믿지 않는 지도자를 만나면 국민들이 막대한 희생을 치를 수 있다는 점을 스웨덴 사례는 보여주고 있다.

-조선일보-

◇ 코로나 시대, "시댁과 비대면...부부싸움 줄었어요”

◇ 코로나 시대, "시댁과 비대면...부부싸움 줄었어요”

◇ 코로나 시대, "시댁과 비대면...부부싸움 줄었어요”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남편이 승용차로 데리러 와요. 코로나 걸리면 어쩌느냐면서. 얼핏 들으면 애처가 같죠? 더 들어보라니까요. 행여 제가 걸렸다간 자기 회사 동료까지 민폐 줄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대요. 내 걱정인지 자기 걱정인지.” 자랑인가 핀잔인가. 맞벌이 직장인 A(여·51)씨가 웃으며 말했다. 코로나 시대의 부부 사랑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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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이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20~60대 남녀 5111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코로나 이후 1년간 ‘가족 갈등이 줄었다’가 30.46%로 ‘늘었다(17.02%)보다 두 배가량 많았다. 불가항력의 바이러스 외침(外侵) 속, 툭 하면 짜증 내뱉던 가족이 표면적으론 휴전에 들어간 모양새다. 세대가 낮을수록 마찰이 적어졌다는 비율이 높았다. 20대에선 ‘갈등이 줄었다’가 45.50%. ‘늘었다(12.20%)보다 4배 가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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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이 줄어든 이유를 주관식으로 물은 결과, 가장 많이 나온 답은 ‘가족과의 거리 두기 덕분’이었다. 취업·결혼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20~30대에서 두드러졌다. 부모님과 떨어져 서울에 사는 20대 응답자(여·28)는 “부모님과 만나면 취업 걱정을 많이 하셔서 스트레스가 쌓이는데 코로나 감염을 이유로 자주 안 보게 되니 오히려 관계가 좋아졌다”고 했다.

주부에겐 ‘비대면 시댁’이 호재였다. 경기도에 사는 50대 주부(57)는 “코로나를 핑계로 시댁에 안 갈 수 있어 좋다. 주 갈등 원인이 없어지니 남편과 싸울 일도 줄었다”고 했다. “저녁 약속이 줄어 부부 싸움을 덜 한다”(남·51) “소비가 줄어 잔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남·62)는 남편도 적잖았다. “모두 힘든 상황이라 웬만하면 이해하고 넘어가려 한다” “집밥 먹으면서 대화가 늘어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답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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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재택근무가 잦아지면서 살림 분담·육아 참여도에 따라 관계가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한다. “‘집콕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집안일을 많이 하게 돼 마찰이 줄었다”(남·69)는 답이 있는가 하면, “재택근무 하는 남편이 육아를 안 도와줘 말싸움이 늘었다”(여·35)는 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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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별로는 40대와 50대에서 ‘갈등이 늘었다’는 답이 각각 20.20%, 19.00%로 1, 2위를 차지했다. 사춘기 자녀를 둔 연령층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한 주부 응답자(45)는 “집에 있는 것만도 갑갑한데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와 있으려니 스트레스가 두 배”라고 했다. ‘TV 채널 싸움’ ‘안 치워서’ ‘잘 안 씻어서’ 등도 사소한 갈등 원인으로 꼽혔다.

-아무튼 주말-

◇' 한국인의 밥상' 10년 진행 최불암 “남은 막걸리 버려 뺨맞은 뒤, 뭐든 안 남기고

◇ 한국인의 밥상 10년 진행 최불암 “남은 막걸리 버려 뺨맞은 뒤, 뭐든 안 남기고 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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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의 밥상 10년 진행 최불암 “남은 막걸리 버려 뺨맞은 뒤, 뭐든 안 남기고 먹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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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거제도의 겨울 대구를 알리고 10년이 지났다. KBS 1TV ‘한국인의 밥상’이다. 노배우 최불암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지역의 향토 음식을 맛보는 이 방송은 명실상부 한국의 대표 교양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느릿하면서도 정겨운 그의 목소리로 풀어내는 요리와 지역에 얽힌 이야기가 이 프로그램의 매력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 시간. KBS에 따르면 방송 기간 국내와 해외까지 이동 거리는 35만여㎞, 1400여 곳의 8000여 가지 음식을 선보이는 동안 프로그램을 거쳐 간 제작진은 100명이 넘는다. 여든을 바라보는 망팔(望八·71세)에 방송을 맡은 그는 이제 90세를 바라보는 망구(望九·81세)가 됐다.

그는 “이 나이까지 방송 일을 하며 복에 겨운 밥상을 받으러 다닌다. 전국의 우리 어머니들이 나 때문에 굽은 허리, 무릎 관절 아픈 것도 참고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며 “10년 동안 받은 그 사랑을 어떻게 다 갚나. 방법을 아직도 못 찾고 있다”고 했다.

7일부터 4주에 걸쳐 방영되는 10주년 기념방송을 앞두고 5일 그를 서면으로 만났다. 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인의 밥상’을 정의하면.

“우리나라 밥상은 참 남다른 것 같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보면 밥상 대부분이 어려운 시절에 가족을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궁핍한 식재료를 갖고 지혜를 짜내 만든 것이더라. 나의 어머니는 김치에 꼭 생선을 넣어서 담그셨다. 조기도 넣고, 낙지도 넣고 밴댕이도 넣고 제철에 나오는 싼 생선을 넣었다. 그게 익으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맛이 난다. 김치가 익으면 생선을 골라 내 밥 위에 얹어 주시곤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한창 성장기였던 아들한테 고기를 먹일 돈은 없으니 그걸로 단백질을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최불암의 밥상’에는 무엇이 있나.

“무짠지, 오이지를 좋아한다. 일곱 살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갓집에서 자랄 때 많이 먹었다. 무짠지가 밑천이 안 드는 반찬이다. 무를 소금에 절이기만 하면 된다. 가난한 살림살이 때문이었는지 외할머니가 무짠지를 그렇게 먹였다. 지금도 밥상에 무짠지가 있어야 한다. 입안을 시원하게 하고 밥맛을 나게 한다.”

-10년 방송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과 음식은.

“기억에 남는 건 음식보다는 사람들이다. 언젠가 남원에서 추어탕을 촬영하던 때였던 것 같다. 맛을 보면서 ‘산초(山椒)’가 좋아서 추어탕도 맛있는 것 같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촬영을 마쳤는데 어르신이 동네 느티나무 아래에서 날 기다리고 있다가 내 손을 잡고는 ‘줄 게 없다’며 그 산초를 신문지에 정성스럽게 싸서 주더라. 그런 분들이 있어서 1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꼭 다루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가.

“북한 음식을 현지에서 못 다룬 게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다. 송해 선생은 ‘전국노래자랑’이 평양 갔었다는 걸 가장 큰 자랑으로 삼는다. 우리도 하고 싶었는데 못했다. 만약 북한에 갈 수 있다면 황해도 해주를 꼭 가보고 싶다. 거기가 아버지 고향이다.”

그의 어머니(이명숙 여사)는 서울 명동에서 ‘은성’이라는 주점을 운영했다. 시인 김수영, 변영로, 박인환 등 단골손님인 당대 문인들의 사랑방으로 유명했다. 일찍부터 최씨가 문화에 눈을 뜬 계기이기도 했다.

-어머니 가게에 오간 문인들에 대해 기억나는 게 있나.

“문인들이 ‘은성’에 오면 그렇게 김치만 달라고 그랬다. 돈이 없어 안주를 시킬 수가 없으니까. 어머니가 11월에 김치를 담그셨는데, 큰 항아리 두 개에 담그시면 12월을 못 넘겼다. 그래서 나는 어디 가서 김치 더 달라는 말을 못한다. 어머니가 김치 떨어질까 봐 하도 노심초사하시던 걸 봐서다. 또, 단골 중에 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변영로 시인이 있었다. 내가 대학에 합격한 날 그분이 축하한다고 막걸리를 한 잔 주셨다. 그런데 술을 마시고 잔을 돌려드리려다 술지게미가 남았길래 잔을 털었더니 대뜸 뺨을 때리며 호통을 치시는 거다. 귀한 쌀로 만든 술을 버렸다고. 그때부터 술이든 음식이든 남기지 않고 먹으려는 습관이 생겼다.”

-중앙일보-

◇ 보쌈에 소맥 '화상 한식투어'...코로나에 살아남은 여행사 사람들

◇ 보쌈에 소맥 화상 한식투어...코로나에 살아남은 여행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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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쌈에 소맥 화상 한식투어...코로나에 살아남은 여행사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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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가 해를 넘겼다. 근근히 버텼던 여행업계도 이젠 한계에 다다른 듯 보인다. 겨울에 들면서 배달업체로, 보험회사로 출근한다는 여행사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반면에 시련에 굴하지 않고 새 꿈을 벼리는 여행사 사람들도 있다. 자신의 전공과 주특기를 살려 새로운 여행 콘텐트를 만드는 사람들. 달라진 세상, 달라진 여행을 시작한 세 명의 코로나 극복기를 소개한다.

-일본 소면 문화를 여행하다

‘엔타비’는 일본 전문 여행사다. 서울·부산은 물론이고, 일본 오사카·후쿠오카·삿포로에도 지사를 뒀던 탄탄한 여행사다. 지난 1년 사이 31명(한국인 24명, 일본인 9명)이었던 직원이 4명으로 줄었다. 그래도 간판은 내리지 않았다. 김윤중(42) 대표가 지난 16년간 1년의 절반 가까이 일본에 머물면서 쌓았던 인맥과 콘텐트를 총동원해 새 활로를 찾아냈다. 일본 소면 문화다.

김 대표는 일본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에서 생산하는 전통 소면을 수입한다. 미나미시마바라는 소면의 고장이다. 인구 5만 명 도시에 소면 공장 300여 개가 있다. 이 마을에선 350년째 손으로 늘여 면을 뽑아 소면을 만든다. 김 대표가 이 소면과 인연을 맺은 건, 제주올레가 일본에 낸 올레길 ‘규슈올레’ 덕분이다. 2015년 미나미시마바라에 규슈올레 코스가 들어섰고, 그때부터 엔타비는 미나미시마바라 여행상품을 운용했다.

“작년 8월 본격적으로 소면 사업을 시작했어요. 아는 사람은 아는 명품이어서 입소문이 금방 났어요. 이치류, 옥동식, 효계, 부산 젠스시 등 쟁쟁한 맛집 예닐곱 곳이 우리 소면으로 메뉴를 개발했어요.”

소면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김 대표는 사업을 확장했다. 11월 아고다시(날치 조미료), 12월 아리타 도자기를 수입했다. 소면과 천연 조미료, 그리고 식기, 이로써 김 대표의 일본 전통 소면 밥상이 차려졌다. 8월 50만원이었던 매출이 12월 1500만원을 넘었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여행업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행은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거니까요. 다시 여행할 수 있기를 고대합니다. 이미 50여 개 상품을 기획해 놨습니다.”

-화상회의에서 재현하는 한국의 맛

‘오미요리연구소’ 김민선 대표(36)는 요리사다. 코로나 사태 전에는 방한 외국인 대상으로 푸드 투어와 요리 강습을 진행했다. 2019년에는 한 달에만 외국인 약 500명이 김 대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대학원에서 ‘전통식생활문화’를 전공하고 각종 음식 자격증을 딴 경력을 바탕으로 2015년 음식관광 회사 오미요리연구소를 창업했다. 연구소는 한국관광공사와 서울관광재단으로부터 관광벤처기업으로 선정됐고, 2019년 한식진흥원 최우수 음식관광기업으로 꼽혔다.

김 대표도 코로나 사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해 3월 이후 외국인 입국이 사실상 금지되면서 연구소 손님도 뚝 끊겼다. 손 놓고 있을 순 없었다. 김 대표는 에어비앤비의 ‘온라인 체험’ 프로그램을 주목했다. 5월부터 화상회의 프로그램으로 실시간 요리 강습(사진 위)을 진행했다.

요리 영상은 큰 인기를 끌었다. 전 세계에서 강습 프로그램에 들어왔다. 아시아는 물론이고 지구 반대편 콜롬비아와 멕시코에서도 참여했다. 온라인 강습 주 3회 기준으로 한 달에 외국인 200~300명이 방문했다. 요리 강습을 가족 모임, 회사 워크숍으로 활용하는 참가자도 많았다. 메뉴는 비빔밥·잡채·보쌈부터 ‘소맥’까지 폭넓게 다룬다. 반응도 좋다. 김 대표의 프로그램 점수는 5점 만점에 4.97점. 에어비앤비의 여느 요리 강습에 뒤지지 않는다. 열 번 넘게 들어온 단골도 여럿 생겼다.

김 대표는 요리만 가르치지 않는다. 서울 동대문 약령시장, 인천 차이나타운 등지에서 촬영한 푸드 투어 영상도 보여준다. 김 대표는 “전 세계 참가자들이 ‘한국을 여행한 것 같다’ ‘나중에 반드시 한국을 찾겠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며 “이렇게라도 한국의 매력을 알려야 여행이 재개되면 한국의 관광산업도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캠핑카 여행을 주도하다

코로나 사태가 이어진 2020년. 한국에서도 캠핑 열풍이 불었다.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의 캠핑 문화, 특히 차박 문화는 독특하다. 굳이 비좁은 승용차에서 잠을 자고, 해수욕장이나 유원지 공짜 주차장을 찾아가 캠핑을 한다. 차박이 유난히 인기인 이유 중엔 지나치게 비싼 국내 캠핑카 가격도 있다. 캠핑카 대여 사업에 여행사 ‘비욘드코리아’가 뛰어든 이유다.

비욘드코리아는 중남미·미국·아프리카 전문 여행사다. 하나투어와 남미 항공사 ‘라탐’ ‘아비앙카’ 한국 총판을 거친 김봉수(51) 대표가 2009년 창업했다. 김 대표는 2016년 미국 캠핑카 회사 ‘크루즈 아메리카’ 한국 예약 업무를 맡으면서 캠핑카에 관심을 갖게 됐다. 온 가족이 주방·침대·화장실을 갖춘 캠핑카를 빌려 느긋하게 여행하는 문화가 언젠가는 한국에도 정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올해 코로나 사태가 발발했고, 김 대표 예상대로 캠핑 문화가 확산했다. 2월 말 중남미 단체 여행팀을 끝으로 완전히 일이 끊기자 김 대표는 국내 캠핑카(사진 아래) 대여 사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스타렉스 캠핑카 두 대를 마련해 7월부터 인터넷에서 예약을 받았다. 캠핑 시즌인 7~11월 예약이 꽉 차는 걸 보며, 캠핑카 대여 시장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해외여행이 재개돼도 캠핑카 사업은 계속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캠핑카 공유, 콘도 개념의 회원제도 선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비욘드코리아 직원은 올해 10명에서 5명으로 줄었다. 여전히 캠핑카만으로는 수익이 부족하다. 온라인몰 ‘봉상회’를 만들어 터키 건강식품 같은 해외 특산물 판매도 시작했다.

김 대표는 “요즘에야 여행업을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반성하고 있다”며 “직원들과 달라진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앙일보-

항왜降倭:투항왜병 6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6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6편

여여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선조실록》 1597년(선조 30년) 9월8일 기록을 보면 ‘사백구’라는 항복한 왜인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공적이 대단했다. 항왜에 지극히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선조 임금에게 사백구의 포상을 건의하면서 올린 상소문이다.

『금년(1597년) 3월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서 사백구라는 왜인이 투항했는데, 지성으로 왜병을 토벌하는 것을 보니 지극히 가상합니다. 상급을 내려야 합니다.』

김응서는 항복한 왜인 사백구에게 줄 상급이 없어 일단 김해부사 백사림에게 보냈다. 마침 일본군이 경상도 함양의 황석산성을 공격했다. 이때 김해부사 백사림도 출전했는데, 사백구 또한 전장에 나섰다. 사백구의 활약은 남달랐다. 조총으로 왜병을 4명이나 쏘아 죽였다. 하지만 황석산성은 함락되었고, 살이 쪄서 거동이 불편했던 백사림은 꼼짝없이 포로가 될 운명이었다. 이때 사백구가 왜병 흉내를 내어 백사림 가족을 성 밖으로 탈출시켰다. 사백구는 백사림을 산속에 숨겨놓고는 왜병이 점령한 산성으로 숨어들어갔다. 백사림은 사백구가 자신의 위치를 왜적에게 알려 공을 세우려는 줄 알고 두려움에 떨며, 사백구가 배신할 까 두려워 몸을 잠시 피해있었다. 그러나 사백구는 성안으로 들어가 왜병들에게 “먹을 것 좀 달라”고 해서 쌀 한말과 간장, 무우, 옷가지 등을 구해왔다.

사백구는 백사림이 보이지 않자 발을 구르고 ‘어디 갔느냐’고 불러댔다. 백사림이 겨우 몸을 드러내자 사백구는 백사림의 허리를 끌어안고 “대체 어디 갔다가 왔느냐”고 반가워했다. 백사림 가족은 사백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사백구는 부사 백사림에게 옷을 입혀주고 밥을 먹이면서 눈물을 흘렸다. 백사림이 밥을 다 먹은 뒤에야 사백구는 수저를 들었다.

사백구와 백사림의 일화를 전하던 김응서의 한탄이 심금을 울린다.

『조선의 유식한 무리도 처자식을 구제하지 못하는데, 무식한 오랑캐 무리의 지성이 사백구와 같으니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백구에게 상급을 내려 위로하소서. 그리고 사백구에게 성씨를 하사하여 조선 사람으로 영원히 살도록 하소서.』《선조실록》

여여문과 사백구 외에도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에서 한몫 단단히 한 준사(俊沙)라는 항왜도 유명하다. 이순신 장군이 단 13척이 배로 일본 수군을 격파할 때 장군의 배에는 안골포에서 투항한 항왜 준사가 타고 있었다. 준사는 바다에 빠진 왜군들을 내려다보면서 “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은 자가 적장 마다시(馬多時)라고 지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이 마다시의 목을 내다걸어 왜적의 사기를 꺾었고,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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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降倭:투항왜병 5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5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5편

여여문의 말대로 『쳐들어올 때는 반드시 소수의 군사로 유인하여 적이 매복한 곳에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잇따라 일어나 공격한다.』는 왜군의 전법은 칠천량 해전에서 입증되었다. 이때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법에 말려 단 12척의 전선만 남긴 채 사실상 전멸했던 것이다.

여여문은 전쟁터로 달려가 한목숨 바칠 각오가 있음을 피력하기도 했다.

『제가 현장으로 내려가서 산성을 다시 쌓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면 저를 요해처로 보내 주십시요. 죽음으로 보답하겠습니다.』《선조실록》1597년 1월4일

여여문은 “후한 이익을 좋아하는 일본인을 유인하기는 쉽다”면서 “일본군을 꾀어 적장을 모살하도록 계획을 세우면 아마도 성공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책을 올렸다. 과감하게도 ‘적을 이용한 적장 모살 작전’을 아뢴 것이다. 여여문은 이때 조선을 ‘우리(我) 조선’이라고 표현했다. 여여문은 뼛속까지 조선인이 됐음을 알 수 있다.

‘항왜’ 여여문이 ‘우리 조선’ 운운하면서 계책을 논하고, 조선군의 약점을 설파했을 때, 선조 임금의 반응은 어땠을까. “부끄럽다”는 반성이었다. 선조는 “그가 말한 대로 시행하라. 여여문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 일이 부끄럽기도 하다.”라고 했다.

이 뿐이 아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5월17일 여여문은 적진에 정탐꾼으로 밀파되어 왜군의 정세를 상세히 보고하는 임무를 맡는다. 여여문은 머리를 깎고 왜인의 옷을 갈아입고 적진에 잠입했다. 여여문은 울산, 즉 성황당·도산·태화강 등 3곳의 적병숫자를 파악해서 손수 형세도를 그린 뒤 빠져나왔다. 여여문의 형세도를 본 명나라군 양호 총사령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은 10냥을 내려주었다. 물론 여여문의 형세도대로 작전을 짰다. 명나라군의 마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자 여여문을 다시 적진에 침투시켰다. 여여문은 전투가 벌어지자 왜군 4명의 수급을 베어 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명나라 마귀 제독은 여여문을 죽이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왜적의 수급마저 다 빼앗아 그의 공을 가로채 버렸다.

《선조실록》에는 1598년(선조 31년) 3월 27일 여여문의 죽음을 알리면서 『여여문이 베어낸 왜적의 4수급을 마귀가 빼앗는 것을 똑똑히 본 사람들이 많다. 여여문 말고도 소운대(小云大)라는 항왜 역시 아군을 위해 공을 세웠고, 왜적을 여러 명 유인했다.』고 기록했다. 여여문이 죽은 지 두 달이 지난 1598년(선조 31년) 5월 17일 우의정 이덕형은 항왜 여여문의 공적을 일거한 뒤 반드시 상급을 내려야 한다고는 주청을 올린다. “여여문은 임진란 이후로 종군하지 않은 날이 없었고, 처자식도 모두 적의 손에 죽었습니다. 가상한 일입니다. 여여문을 논상함으로써 격려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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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降倭:투항왜병 4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4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4편

그렇다면 선조의 말처럼 ‘제 몸 돌보지 않고 싸운 항왜들’ 가운데 첫손으로 꼽히는 인물은 실록(선조실록)에도 등장하는 바로 여여문(呂汝文)일 것이다. 사실 여여문이 어떤 경로로 항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595년(선조 28년) 6월19일 《선조실록》을 보면 매우 의미심장한 기사가 보인다.

『과인이 항왜(降倭:항복한 왜인) 여여문을 각별히 후대하라고 전날에 전교하였는데 실행하는지 모르겠다. 요사이 듣건대, 이 자가 병이 났다가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이는 보통 왜인이 아니다. 대우를 후하게 하지 않아선 안 된다.』

훈련도감은 선조의 특명에 따라 “여여문은 집중치료를 통해 회복됐지만 주상의 하교대로 특별히 더 후대하겠다”고 보고했다. 그저 왜적 가운데 항복한 자일뿐인데, 선조임금이 나서서 “후대하라”는 특명을 내린 것도 모자라 “그 자의 병에 차도가 있는지 알아보라”고까지 했을까. 훈련도감은 왜 고분고분 선조의 명을 받들어 여여문의 건강상태까지 다시 체크했을까. 여여문이 조선에 매우 중요한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무슨 역할이었을까.

《선조실록》에 여여문의 임무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즉 훈련도감이 이른바 아동대(兒童隊)를 선발하여 검술을 익히게 하고 사수를 양성하게 하는데, 그 책임자를 여여문에게 맡겼다.

『(여여문이 훈련시킨) 아동대 인원들을 어제 모아놓고 시험을 치렀는데, 50여명 중 합격자가 19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음식을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여여문에게 아동대를 전적으로 맡겨….』 《선조실록》

이뿐이 아니었다. 조선은 여여문으로부터 일본군의 진법과 전술을 전수받았다. 이것은 조선군과 명나라군이 일본군과 맞서 싸울 때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여여문이 일러준 왜군의 전법은 매우 상세했다.

『왜군은 깃대를 진 군사는 양쪽으로 에워싸고 나아가 좌우의 복병과 함께 적의 후미를 포위합니다. 싸우면서 흩어질 때 많은 복병을 좌우에 배치하고, 조총과 창검으로 각각 하나의 부대를 삼아 숲속에 흩어져 매복하기를 마치 새와 짐승이 은복하듯 합니다.』 《선조실록》1596년 2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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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降倭:투항왜병 3편

■항왜降倭:투항왜병 3편

■항왜(降倭:투항왜병) 3편

포악한 왜장의 휘하 장졸들일수록 귀순·투항자가 많았다. 즉 1597년(선조 30년) 조선은 항복한 왜인 세이소(世伊所)와 마다사지(馬多時之)를 다시 적진에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등청정)의 휘하 군관을 5명이나 귀순시켰다. 왜장 가운데는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포악하다는 평을 듣고 있는데, 《선조실록》을 보면 그 평가가 맞는 듯하다.

『사역이 너무 과중하고 장수의 명령이 너무도 혹독하여 그 노고를 견디지 못하고 몸을 빼어 도망쳐 왔습니다. 우리(5명) 외에도 귀순하려는 자가 많습니다. 계속 유인하면 청정(가토 기요마사)의 형세는 자연히 고단해질 것입니다. 요즘 청정(가토 기요마사)이 사졸들의 마음을 크게 잃어 일본으로 귀국하려는 군졸이 하루에 100명에 이릅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1596년 7월 이순신 진영에 왜인이 5명 항복했는데, 투항이유가 ‘장수가 너무 포악했고, 그 역도 과중했기 때문(將倭性惡 役且煩重)”이라 했다.』

항복한 왜인들을 후대한 조선 조정의 ‘항왜 정책’도 왜인들의 항복을 가속화시켰다. 조선 조정은 투항하는 왜적에게 첨지(정3품 무관), 동지(삼군부의 종2품) 등의 고위관직을 내렸다. 처음엔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왜병들이란 교활하여 믿을 수 없는 자들이며, 그들을 먹일 식량 또한 여의치 않다”는 의견들도 많았다. 그러나 경상우병사 김응서 등은 매우 긍정적으로 항왜를 바라보았고, 무엇보다 선조 임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선조는 1595년(선조 28년) 승정원에 “왜병의 항복을 적극 유치하라”면서 “그들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줘라”는 명을 내린다.

『항왜를 유인하는 일은 손해될 게 없다. 다방면으로 환대하고 상을 주어 투항을 유도하라. 그 중에 검술을 할 줄 알거나 병기를 잘 만들거나 하는 자를 꾀어내면 파격적인 상을 내려야 한다고 비변사에 일러라.』

심지어 선조는 항왜 유치를 반대한 신료들에게 『자네들은 투항한 왜병들을 의심하고 그들을 대접해준다고 불평해왔다. 원래 과인이 항왜들을 많이 유치하려 했지만 자네들 때문에 제대로 시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가. 지금 항왜들 만이 충성을 제대로 바치고 있다. 먼저 성 위로 올라가 죽을힘을 다해 적병을 죽이고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싸운다. 이들에게는 모두 당상관(정3품 이상)의 직책을 내리고, 은(銀)을 상급으로 하사하라.』《선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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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 항왜(降倭:투항왜병) 2편

선조는 비변사에 “항복한 왜군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명나라 파병군에게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비변사는 이를 제지했다.

『전하의 말씀은 맞습니다. 저 왜적들은 만세의 후라도 반드시 복수해야 할 원수이고, 저들의 살점을 베어 먹고 가죽을 벗겨 깔고 자도 시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중국 장수들은 ‘조선은 어찌 그리 속이 좁으냐’고 힐난하고 있습니다.』《선조실록》

당시 중국군은 ‘오랑캐가 아침에 쳐들어와서 저녁에 항복하기만 하면 다 받아준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군에게 아무리 말을 해봐야 속 좁다는 소리만 들을 것이 뻔하니 전하께서는 참으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에는 전쟁을 일으킨 왜적에게 품은 적개심을 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전세가 장기전으로 접어들고 상황이 달라졌다. 전쟁 발발 2년 4개월이 지난 1594년 8월 선조가 내린 명령을 보면 생각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조선이 전투에서 이기지도, 용기백배하여 방어하지도 못하면서 항복·귀순하는 왜인들을 거절하고 있다. 이는 옳지 않은 처사다. 항복한 왜인이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한다. 왜군의 군졸을 이렇게 앉아서 얻었는데, 지나치게 의심할 필요가 있는가.』

처음에 항복한 왜병을 요동으로 보냈던 조선 조정은 차츰 경상·함경·강원·충청·황해의 바닷가와 외딴 섬으로 보냈다. 또 시간이 흐르자 제주나 진도 등지의 수군 및 각 진에 나눠 이주시켰다. 점점 ‘항왜’의 관리가 골치 아파지기 시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1594년(선조 27년) 6월 비변사가 아뢰었다. 『투항한 왜적을 경상도 내륙지방 한 고을 당 7~8인 혹은 15~16인씩 두었는데 골치 아파합니다. 매우 후하게 대접해서 하루 세 끼를 먹여주는데도 왜노는 만족할 줄 모릅니다. 끊임없이 요구하고, 뜻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고, 저들끼리 싸워 서로 죽인답니다.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그렇다면 왜인들은 왜 조선조정에 투항했을까.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지면서 장기주둔이 계속되자, 왜군은 보급로 차단으로 군량미 부족에 시달렸다. 1595년(선조 28년) 4월19일 비변사가 항복한 왜인인 조사랑(助四郞)과 노고여문(老古汝文) 등 11명에게 술과 안주를 먹이자 ‘항복한 이유’를 술술 털어놓았다.

『우리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의 휘하에서 예속된 장졸들입니다. 여러 장수들의 진영을 오가며 감당해야 하는 수자리(전방수비)를 괴로워하던 차에 조선이 후히 대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후략).』《선조실록》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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