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1일 월요일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 신라의 아이돌 화랑(花郞) 1편

‘화랑(花郞)’이라는 말은 ‘꽃처럼 아름다운 남성’이라는 뜻인데, 혹은 화판(花判)·선랑(仙郎)·국선(國仙)·풍월주(風月主)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로 조직된 ‘화랑도(花郞徒)’는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 교육적·군사적·사교 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화랑도’의 기능은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신라의 삼국통일 뿐만 아니라, 신라 골품제(骨品制) 사회에서의 여러 계층 간의 긴장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촌락과 같은 지역공동체의 요소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내부에 청소년조직과 같은 소규모 공동체가 발생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조직은 유목사회보다는 농경을 위주로 하는 농업사회에서 특히 발전하게 되는데, ‘화랑도’ 역시 신라가 고대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어가는 과정에서 그 조직과 형태를 완성해 나갔다.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는 이미 부족국가 단계인 삼한시대에 마을의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견디기 어려운 훈련을 통해 수련을 하고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4세기 중엽을 경계로 하여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다. 따라서, 촌락 중심의 청소년조직은 그 성장·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중앙집권체제의 정비와 더불어 신라사회에 점차 친족을 중심으로 한 사회조직이 생성, 강화되면서 더 위축되어 갔을 것이다.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시행된 군현제(郡縣制)로 말미암아 점차 촌락공동체의 독자적인 청소년 조직은 중앙정부에 의해 흡수되기 시작해 이전의 청소년조직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정부에 의해 새롭게 조직된 것이 흔히 화랑도의 전신(前身)이라 불리는 원화(源花, 原花)제도였다. 이것은 정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어여쁜 여성 두 명을 ‘원화(源花)’로 뽑아 단장(團長)을 삼고, 이를 중심으로 한 두 조직의 단체생활을 통해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려고 한 제도였다.

처음 원화로 뽑힌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은 무리를 3백여 명이나 모았으나, 두 여성 사이에 서로 미모를 다투며 시기하는 일이 생겨, 마침내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해 억지로 술을 권해 취하게 한 뒤 끌어다 강물에 던져 죽여 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결국 준정은 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고, 조직은 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원화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으니 신라정부로서는 어쨌든 인재를 양성, 확보할 다른 제도가 필요했다.

- 2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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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들강변

‘노들~ 강변 봄버들~~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우리 귀에 익숙한 민요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노들강변’이라고 하면 어느 곳에서나 있음직한 ‘버드나무가 늘어져 있는 강변‘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노들강변‘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이다. ’노들강변‘은 과거 서울의 흑석동에 있는 국립묘지 근처의 ’노량진나루터‘를 말한다. 충무공이순신장군이 대승을 이룬 명랑해전이 있었던 ’울돌목‘을 아실 것이다. ‘울돌목’의 한자어가 ‘명량(鳴梁)이다. ’명량‘의 ’명‘은 ’울 명(鳴)‘이고, ’량‘은 원래 ’돌 량(梁)‘이다. ’노량진‘ 의 ’량‘도 ’돌 량‘이다. 이 ’노량‘이 ’노들‘로 변하고 거기에 ’강변‘이 덧붙여진 것이다. 이 ’노들강변‘ 은 옛날 서울과 남쪽지방을 잇는 중요한 나루였다.

2. 가물치

물고기 중에 ‘가물치’가 있다. ‘-치’는 물고기 이름을 나타내는 접미사이다. 꽁치, 넙치, 준치, 멸치 등 등 많다. 그러면 ‘가물’은 무엇일까? ‘가물’은 ‘검다’는 의미이다. 천자문에서 ‘하늘천, 따지, 검을현’이라고 할 때, 검을 현은 ‘검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물치’는 ‘검 을 치’로 구성되어 ‘검은 고기’를 뜻한다.

3. 어른과 어린이

‘어른’과 ‘어린이’라고 하면 성인과 어린아이를 의미한다. 본디 ‘어른’은 성교(性交)를 의미하는 ‘얼우다’라는 동사에서 명사로 변형된 말이다. ‘얼우다’의 어간 ‘얼우-’에 명사형 접미사 ‘-ㄴ’이 붙은 말로 ‘얼운’은 ‘성교를 하는 사람’ 즉 ‘혼인한 사람’이란 뜻이다. 지금은 그 의미가 확대되어 결혼 여부와는 관계없이 성장이 완성되어 성숙한 사람을 의미한다. ‘어른’의 상대적 의미로 쓰이는 ‘어린이’라는 말은 소파 방정환선생님이 처음 만든 말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알려진 것이다. 옛 문헌에도 ‘어린이’라는 낱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 때 ‘어린이’는 ‘어린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생각이나 행동이 서툴고 부족하다는 의미로 쓰이다가 방정환선생님이 ‘어린이’를 ‘어린아이’의 의미로 보편화 시킨 것이다.

4. ‘귀고리’와 ‘귀거리’

여성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는 ‘귀고리’이지만, 요즘은 귀고리를 하고 있는 남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과거 삼국시대 유물에도 지배계층의 권위를 상징하는 장식품으로 남녀 관계없이 귀고리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귀고리’가 맞을까, ‘귀거리’가 맞을까. 보통 귀에 거는 것이므로 ‘귀거리’라고 알고 있지만, 원래 귀에 거는 고리라는 의미로 ‘귀고리’가 올바른 말이고 표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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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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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감질나다

‘감질(疳疾)’은 먹고 싶거나 갖고 싶어 애타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어린아이들이 젖이나 음식 조절을 잘못하여 생기는 병이다. 많이 먹기는 하지만 몸이 자꾸 마르고 땀을 흘리며 목말라 하는 병이다. 어떤 것이 몹시 먹고 싶거나 어떤 일이 몹시 하고 싶어 애타는 것을 ‘감질나다‘라고 하는데, 마치 감질(疳疾)에 걸린 어린아이의 증세와 비슷해서 붙여진 말이다.

2. 주먹구구

‘주먹구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손가락으로 꼽아서 셈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계산하다 보면 셈이 더딜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무척 답답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정확한 계산이나 앞뒤 계획 없이 일을 대충 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3. 숨바꼭질

어린 시절, 동네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해보지 않은 분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 명이 술래가 되고 나머지는 들키지 않게 꼭꼭 숨는다. 술래가 숨어 있는 아이들을 찾아 내는 놀이이다. 그런데, 이 ‘숨바꼭질’는 원래 그런 놀이가 아니었다. 이 이 ‘숨바꼭질’은 ‘숨 바꿈 질’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때의 ‘숨’은 ‘숨다’의 의미가 아니라 ‘숨쉬다’는 뜻이다. 숨 쉬는 것을 바꾸는 일이니 소위 물에서 하는 ‘자맥질’을 말한다. 물속에 들어가서 숨고, 다시 숨을 쉬기 위하여 물위로 올라오는 것을 되풀이 하는 놀이이다. 지금도 남쪽의 방언에 ‘숨바꿈쟁이’ 라는 말이 남아 있는데, 곧 ‘잠수부’를 일컫는 말이다. 물에서 하던 ‘자맥질’ 놀이가 동네 골목길에서 어린아이들이 숨고 찾는 놀이를 가리키는 말로 변형된 것이다.

4. 애국가 가사의 ‘남산’

애국가 가사 중에 ‘남산 위의 저 소나무’ 라는 구절이 있다. 보통 서울의 ‘남산’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원래 이 ‘남-’은 ‘남(南)쪽‘이 아니라 ’앞-‘을 의미한다. 그러니 남산’은 ‘남쪽에 있는 산’ 이라기보다는 ‘앞산’을 의미한다.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남산(앞산)’은 있다. 그러므로 ‘남산’은 꼭 서울에 있는 남산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북’은 ‘뒤쪽’을 의미한다. 그래서 ‘북망산에 간다’는 말은 ‘뒷산에 간다’ 즉 ‘묘지에 간다’ 죽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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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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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질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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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데없는 행동이나 ‘불확실하고 허무함’ ‘얻는 것이 없음’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옛날 대장간에서는 쇠로 기구나 연장을 만들 때, 강하고 단단한 쇠를 얻기 위해서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드렸다가 물에 담그고 다시 불에 달구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작업을 했다. 횟수가 많을수록 더욱 단단한 쇠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런 담금질을 하지 않은 쇠는 물렁물렁하고 금세 휘어지기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즉 불질이 제대로 되지 않은 쇠는 쓸모없는 쇠뭉치에 지나지 않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불을 피우는 기구인 풀무에 관계된 설이다. 옛날에 불을 피울 때는 풀무를 돌려 불질을 해야만 불길이 활활 일어났는데, 불질을 하지 않으면 불꽃이 일어나기는커녕 금방 사그라 들었다. 풍로에 불질이 없다는 것은 곧 아무런 결과를 볼 수 없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불질없다’가 변해서 된 ‘부질없다’는 ‘쓸데없이 아무 소용없는 행동을 했다’ 는 뜻으로 말하게 되었으며, ‘미래가 없다’ ‘아무 소득이 없다’ 라는 뜻으로도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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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티나다

불티는 장작불을 피우면 불이 활활 타오르는 가운데 장작이 타면서 불티가 탁탁거리며 사방으로 튀게 되는데, 금방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어떤 물건이 내놓기가 무섭게 금방 팔려 금방 없어지는 것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3. 민며느리

옛날에 시집 안 간 처녀를 미리 데려다 기르며 일을 시키고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정식 며느리로 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민며느리라고 한다. 민이란 아무 꾸밈새나 덧붙여 딸린 것이 없음을 나타내는 접두어이다. 민머리는 쪽을 찌지 않은 머리를 뜻하므로 시집 안 간 처녀를 이르는 말이다. 즉, 민머리인 채로 데려 온 처녀를 데려오는 제도를 민며느리제라고 한다.

4. 곤죽

곤죽은 원래 곯아서 썩은 죽을 말한다. 밥이 질척하거나 땅이 젖어 질퍽거릴 때도 쓰인다. 더 나아가 사람이 몹시 피곤하여 늘어져 있는 상태이거나 술을 많이 마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엉망인 상태일 때도 쓰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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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작(酬酢)부리다

쓸데없는 말을 함부로 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보고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고 한다. 수작(酬酢)은 한자로 酬(술따를 수), 酌(술따를 작)으로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면 ‘술을 주고 받다’는 뜻이다. 酬酢으로도 쓴다. 수(酬)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여 따라주는 것이고, 작(酌) 또는 작(酢)은 손님이 답례로 주인에게 술을 따르는 것이다. 술을 따르는 동작을 나타내는 두 글자가 합쳐져 술잔을 주고받는 행위, 손님과 주인이 서로 술을 권하고 받으며 동시에 서로 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 말은 후에 어떤 음모를 꾸미거나 속셈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변형되어, 남의 말이나 행동을 비하하거나 함부로 낮추어 대하는 것을 가리킬 때 ‘수작을 부리다’라는 표현을 많이 쓰인다. ‘수작부리다’ ‘수작을 걸다’ 등 비난이나 부정의 의미가 들어있다.

2. 부랴부랴

불이 나면 사람들은 다급하게 “불이야! 불이야!”하고 외친다. 불이 번지는 것을 막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다급하게 외치다 보면, 그 소리가 마치 ‘부랴부랴’처럼 들릴 수가 있다. 급히 서두르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랴부랴’는 바로 ‘불이야! 불이야!’가 줄어서 된 말이라고 한다. 아주 급하게 서두르는 모습을 나타낼 때 ‘부리나케’라는 말을 써는데, 이 ‘부리나케’는 ‘불이 나게’가 바뀐 말이다. 불이 날 정도로 급하고 빠르게 몸을 움직인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지금처럼 쉽게 불을 구할 수 없던 옛날에는 불을 만들려면 불꽃이 보일 때까지 재빠른 동작으로 나뭇가지를 세게 비비거나 부싯돌을 맞부딪쳐서 불꽃이 일게 하여야 한다. 이처럼 불이 나게 할 만큼 빠르게 움직인다는 말이 변해 ‘부리나케’ 가 됐다.

3. 불현듯

갑작스럽게 어떤 생각이 떠오르거나, 길을 가다 문득 예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거나, 갑자기 옛 친구가 생각이 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갑자기’ ‘느닷없이’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 ‘불현듯’이다. 불현듯은 ‘불 현 듯’으로 이루어진 말이다. 불을 켠다는 뜻의 ‘켜다’를 옛날에는 ‘혀다’라고 썼다. 그러니까 ‘불현듯’은 ‘불을 켠 듯’이라는 말이다. 불이 켜지는 것처럼 어떤 일이나 생각이 갑자기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난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주로 생각이 갑자기 떠오를 때 쓰이지만, ‘불현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 버렸다.’ 처럼 어떤 행동을 갑작스럽게 할 때에도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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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9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9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9편

당시 조선 수군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 대다수가 갓 뽑은 오합지졸 신병들이 아닌, 임진왜란 개전부터 약 6년간 왜군들을 상대로 치열하게 싸우고 승리한 역전의 베테랑들이었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그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산도 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증발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감안하면, 이는 큰 타격이며 사기가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했다.

일본은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을 투입시키는데 이동하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졌다.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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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충격을 받았다.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은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만약 패전의 책임이 원균에게 있다면 잘 싸우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 또한 책임이 있는 것이니 그것만으로도 왕의 위신이 깎인다. 그러니 원균에게 잘못이 없고 패전은 단지 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에게 책임이 없다고 은근슬쩍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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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는 처음 패전 소식을 듣고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졌으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이다. 라는 내용으로 말했다. 그런데 괜히 출동하여 적의 함정에 들어가지 말고 한산을 지켜야 한다고 했던 것이 바로 이순신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순신이 빨리 출동 안 한다고 탄핵하고 결국 백의종군에 처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꽂아 넣은 책임자는 선조 자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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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엄청난 사태를 초래한 당사자 원균은 책임을 지는 일도 없었고, 엉뚱하게 1등공신이 되었다. 종1품 좌찬성에 추증, 원릉군(原陵君)이란 작호, 선무공신 1등 책록. 이것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고 전사한 그에게 주어진 포상이었다. 당시에도 여러 신료들이 포상이 지나치다고 하였다. 특히 선무공신 전체 18명, 1등은 3명으로 충무공 이순신과 충장공 권율 장군은 인정되나 원균이 1등인 것은 지나치다,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러 번 간언했으나 그렇게 된 것은 바로 선조의 강력한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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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8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8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8편

수군 장수에게 필수적인 소양은 무엇보다 바다를 알고, 배를 알아야 한다. 7월 14일 통제영에서 함대를 출진시키기 전에 그는 먼저 견내량에서 부터 부산에 이르는 물길에서 작전기간 파도의 높이를 포함한 기상은 어떠한지, 그 날 조류는 순조류(順潮流)인지 역조류(逆潮流)인지 등을 제대로 따져 보지도 않았다. 판옥선의 구조상 파도가 험한 외해(外海), 큰 바다에는 적합지 않음도 고려해야 했다.

거제를 벗어나 괭이바다를 통과해서 부산에 이르는 물길은 판옥선에게 크게 불리한 여건임을 알고 감안해야 하는 것이다. 판옥선은 바람을 받는 돛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격군(格軍)이 노를 저어서 인력으로 움직이는 전함이다. 크기도 크고 무거운 대형전함인데, 노를 저어 가려면 격군의 체력 소모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격군은 교대 병력까지 확보해야 하고, 2교대, 3교대로 교대할지라도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 바, 필히 충분한 휴식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박지 확보가 대단히 중요해진다. 순조류를 타는 날을 기다리지 않고 역조류를 거스르며 진군시켰고, 함선을 급히 몰아서 그 배를 움직일 격군을 쉬지 못하게 하여 피로도를 극에 달하게 만들어 탈진시켜 버렸다. 격군이 탈진하면 판옥선을 움직일 수 없고, 이는 전투불능상태에 빠지는 길이다. 수군 총사령관이, 그것도 앞서 경상우수사를 했다면서, 이런 정도 상식도 없이 전함을 무작정 몰아대고 격군을 다그치기만 했으니 수군 장수로서 기본 소양도 없고 자질 부족이라는 확실한 증거다.

사령관이 곤장을 맞았다고 자기 분에 못 이겨서, 천시(天時), 지리(地理)를 고려하여 유,불리도 따져보지 않고 출전한 것 자체가 장수로서 기본이 안 되어 있다는 증거이고, 싸우러 가는 장수가 함대의 진군로, 퇴각로 그리고 정박지까지 어느 하나 제대로 준비하고 검토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다.

정유재란은 1597년 1월에 시작됐고, 이 전쟁의 첫 회전(會戰)인 칠천량 해전은 동년 7월에 있었다. 그렇지만, 이 패배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戰線)이 하삼도 전역으로 본격적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작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다시 노릴 수 있게끔 됐다. 한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전세를 결정지은 전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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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 이는 전라도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아 인적·물적으로 조선의 보급고로 매우 중요했다. 일본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인 해상 보급 문제가 원균 덕분에 해결된 셈이다. 이후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악전고투 끝에 최악의 사태를 막기는 했지만, 하마터면 평야지대 호남이 뚫리고 적이 서해안을 통해 해상으로 보급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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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7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7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7편

선조와 조정대신들 다음으로 책임 유무를 따질 사람은 도원수 권율 장군이다. 임진년에서부터 계사년 사이, 호남방어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수원 독산성 전투 등 경기 남부 수복, 행주대첩으로 서울 수복에 기여한 공이 있으니 육군 지휘관으로 상당히 유능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다들 장군이라고 하니까 권율 장군이 무관이라고 여기기 쉬우나, 원래 출신이 문관이고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 당시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정치 분위기에 민감했고, 그들을 거스를 인물도 아니었다.

더욱이 행주대첩 이후로 오래도록 제대로 활약하고 공을 세운 게 없는 상항으로 압박을 느꼈던 것도 감안해야 할 듯하다. 조정의 명을 받아 도원수로서 작전명령, 지침을 전하는 것은 충분히 그럴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다. 전체 군 지휘관으로서 역할 중 하나일 테니까. 그래서 통제사 원균을 처벌하고 전투를 명한 것도 일정부분 이해하지만, 반드시 옳았다고도 할 수 없다.

도원수 권율 장군은 주로 육군을 관할하지만 어쨌든 삼도수군통제사도 그의 아래 서열이고 육군과 수군을 포함한 모든 조선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지위에 있었는데, 통제사 원균과의 대립 장면을 보면, 그는 육군 지휘관의 입장에서 보고 말할 뿐, 수군의 입장을 듣고 조율하는 모습이 아니다. 적어도 도원수라면 육군과 수군 모두의 사령관이 되어야 할 것 아닌가? 또 전군의 지휘관으로서 임금과 조정의 명이 부당하다면, 군의 입장에서 한마디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는 그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조선 수군의 진군문제로 통제사 이순신이 파직되고 새 통제사 원균도 불가하다 하면, 심사숙고해서 의견을 수렴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통수권자일 것이다. 특히 바다를 잘 모르는 육군지휘관이면 수군지휘관의 의견을 존중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은 없이 그냥 임금과 조정의 명령 전달자로서의 역할만 하려 했으니 과연 도원수(都元帥)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가 도원수로서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곤장을 때려서까지 무리하게 출전시켜 칠천량 해전의 비극을 미리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칠천량해전은 한국사 전쟁사 중에서도 최고 수위라 할 만한 황당한 패배이고, 세계사를 봐도 이 정도로 황당한 졸전은 손에 꼽힐만할 것이다. 판옥선의 성능이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훨씬 우수하였고 거북선 역시 많은 양이 있었으며, 탑재화기도 천지현황 총통 등으로 일본보다 훨씬 화력이 강했다. 더군다나 병력 수도 밀리지 않았고, 질도 다수 전투에서 승리한 베테랑급 전력이었지만 현실은 대참패. 칠천량해전은 전형적인 사람에 의한 참사이고, 올바른 인사와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하는 안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 8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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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해전 6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6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6편

통제사 원균의 실책은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휘하에서 성장해온, 여러 장수들을 배척하였다는 점이다. 장수가 부하의 말에 귀를 닫고 군영의 일보다 다른 곳에 정신이 가 있고, 부하를 배척하면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장수와 병사 사이가 벌어지고 서로를 알지 못하게 되며, 군영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기가 해이해진다.

충무공 이순신이 있을 때의 상승 무적 조선 수군의 모습을 신임 통제사 원균은 빠른 속도로 바꿔가고 있었다. 정사준, 배흥립 같은 장수들이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장군을 찾아가 한산도 통제영의 상황을 전하며 크게 우려했다는 《난중일기》의 기록에서 통제영의 장병들이 느꼈을 불안과 우려를 알 수 있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군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고니시(小西行長)·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칠천량 해전의 패배 책임이 전적으로 원릉군 원균에 있다고 할 수 없다. 어쨌든 전장의 지휘를 맡은 사람은 원균이니 그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하지만, 원균 외에도 도망간 장수들, 무모한 전투를 몰아댄 선조와 조정 대신들 그리고 도원수 권율 장군의 책임도 있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수군이 계속 이겨왔다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적을 경시하고 있었다.

우리 수군의 모습만 보이면 적은 스스로 물러나고, 수군이 나아가면 무조건 이기고 적을 깨뜨리고 성을 빼앗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이순신장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병법도 모르고, 현지 사정도 어두운 분들이 군권과 군령에 간섭하여 지휘체계를 뒤흔들었고, 현지 지휘관의 의견을 제대로 검토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모함하며 자신들의 의견을 강요했다.

통제사 이순신장군이 조정의 지원도 제대로 못 받고, 자급자족으로 근근히 버티면서 수군 전력 강화를 위해 애썼다. 선조와 조정대신들은 후방에서 그들이 가장 중점적으로 해주어야 할 병참지원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면서 수군의 활약을 너무 당연시하고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조와 조정 대신들이 한 일은 현지 지휘관의 의견을 무시하고, 무조건 싸우라고 강요한 것이다.

애초에 이순신장군을 통제사에서 파직한 것부터가 잘못된 인사이고, 후임 통제사에 장수로서 기본도 안 된 원균을 내세운 것도 잘못된 인사이다. 선조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하여 무조건적으로 싸고 도는 상황 때문에 원균의 역량과 사람됨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선조와 조정 대신들. 이들의 무능과 무책임은 원균보다 결코 책임이 가볍지 않다.

- 7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 원균과 칠천량해전 5편

7월 15일, 저녁 또 다시 쉬지도 못하고 죽기 살기로 도주해서 겨우 도착한 곳이 거제 북방. 거제 장목과 칠천도 사이의 좁고 긴 물목인 칠천량이었다. 조선 수군의 무덤으로 운명의 장소가 될 줄은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하루 종일 쉬지도 못하고 쫓겨만 다니고 눈앞에서 동료들이 표류되어 죽어가는데 또 도주해야 했으니, 기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사기는 떨어지고 모두 탈진해서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깊은 잠에 빠져든 그 시각, 이미 조선 수군을 가두는 일본군의 포위망이 완성되고 있었다.

좁은 물목 양쪽 끝을 일본군 전함들이 봉쇄하고, 칠천도와 거제도 장목에 일본군이 이미 상륙해서 점령했다. 수륙 양면으로 물샐틈없이 포위해서 모두 잠든 새벽에 기습, 협공한다는 일본군의 전략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7월 16일 새벽에 시작된 일본군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임진년부터 이순신장군에게 계속 패하며 당했던 수모를 이번 기회에 씻으려는 듯 일본군의 각오는 대단했다.

기습당한 조선 수군은 무기력하게 격파 당했다. 명령과 지휘체계가 마비된 상태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과 충청수사 최호가 전사했고, 조방장 백기 배흥립은 중상을 입고 실종되었다. 조방장 김완은 함대의 후미를 맡아 싸우다 실종되었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 결국 함대는 각 수영(水營)별로 퇴각하기로 했다. 이미 지도자를 잃은 부대들은 우왕좌왕 오합지졸이었다.

경상우수사 배설은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12척의 함대를 빼내어 탈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12척의 배는 명량해전에서 귀중한 조선함대로 쓰이게 된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배설이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 라고나 할까, 마지막 함대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후퇴했다고도 한다.

가리포 첨사 이응표는 직속상관인 전라우수사 이억기장군이 위기에 처했는데도 구원하지 않고 탈출했다 하여 살아서 복귀했지만 그 죄가 중하므로 파직되었고, 통제사 원균의 아우인 종사관 원전은 형과는 다르게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통제사 원균은 도주하여 중위장인 순천부사 우치적과 함께 고성 춘원포에 상륙했지만 쫓아온 일본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결국 7월 16일, 이 하루의 전투로 조선 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이 모두 전사했고, 그 외 상당한 수의 장졸이 전사하고 도주하였으며 경상우수사 배설이 빼돌린 전함 12척 외의 모든 함선을 잃었다. 조선 수군의 전멸. 참담한 패전이었다. 칠천량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제해권(制海權)을 상실했다.

칠천량 해전은 당일의 전투행위 자체도 졸렬하고 무능한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이런 대패를 일으킨 것은 출정부터 칠천량에 정박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한다. 전쟁에 진 장수를 모두 비겁하고 무능하다고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만반의 대비와 노력을 하고 혼신의 힘으로 대적해도 역부족이었다고 하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비난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 6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