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일 월요일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2편

조선은 정책적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농본정책을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 정책에 힘입어 특히 세종대에는 집현전 학사들과 장영실을 중심으로 과학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방법과 농업 기술을 연구하였고, 농사를 과학적으로 지을 수 있게 해주는 많은 과학 기구가 발명되었다. 장영실은 1421년(세종3년)에 윤사웅·최천구와 함께 중국으로 유학하여 각종 천문기구를 익히고 돌아왔다. 이후 세종의 총애를 받아 정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가 되면서 관노의 신분을 벗게 되었고, 궁중기술자로 활약하게 된다. 상의원(尙衣院)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사용하는 물품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이었다.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고, 작은 고을을 다스리는 현감 정도의 지위였다.

세종의 배려(配慮)로 궁중 기술자가 된 장영실은 얼마 뒤 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이를 기록할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는 명을 받았다. “우리나라는 별을 살피는 기구만큼은 중국보다 앞서 있다. 그러니 이를 잘 활용하면 더 훌륭한 기구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정인지, 정초, 이천 등의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관측기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하여 몇 번의 실패를 거쳐 1433년쯤 마침내 천체의 위치나 움직임 등을 살피고 기록하는 기구인 간의와 혼천의를 만들어냈다. 세종은 그 뛰어난 성능에 탄복하며 간의대를 설치하고, 그 곳에 이 기구들을 두어 세자들에게 해와 달, 별 등이 움직이는 이치를 배우게 했다.

뒤이어, 세종의 명령으로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仰釜日晷)’는 지구를 반으로 자른 듯 한 솥 모양의 청동으로 만든 해시계이다. 그 속에 침을 세워 놓아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절기를 재고, 그림자 끝의 위치에 따라 시간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 해시계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사람이 많이 오가는 큰길가인 종묘 앞에 세워 놓았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간 옆에는 쥐, 소, 호랑이, 말 등의 동물을 그려 놓아 쉽게 시간을 알 수 있게 했으니, 정말로 백성을 생각하는 세심한 배려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해시계는 밤이나 흐리고 비가 오면 시간을 알 수가 없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물시계이다. 물시계는 중국에서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고 항상 사람을 시켜서 시간을 재어야 했다. 이를 게을리 하면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고, 시간이 안 맞아 큰 소동이 일어나는 게 다반사였다. 그래서 사람이 일일이 물을 갈아주지 않아도 자동으로 움직이는 물시계를 만들고자 하는 바램으로 중국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이 결국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장치들이 어찌나 복잡한지 소송이 죽은 뒤에는 아무도 그것을 다시 만들지 못해 곧 사라지고 말았다. 12~13세기에는 아라비아 사람에 의해 쇠로 만든 공이 굴러 떨어지면서 종과 북을 쳐서 자동으로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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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 조선의 에디슨, 장영실 1편

1400년 태종 때의 일이었다. 영남지방의 큰 가뭄으로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관청에 소속된 한 노비가 강에서 물을 끌어 올려 논에 물을 대는 장치를 만들었다. 이 장치로 가뭄을 이겨낸 현감은 이 관노에게 큰 상을 내렸다. 이 관노가 바로 장영실(蔣英實)이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 최고의 과학자 장영실. 장영실은 미천한 신분을 딛고 일어선 최고의 발명가였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장영실을 궁궐로 처음 부른 사람은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다. 태종은 각 지방을 다스리는 관찰사가 추천한 지방의 우수한 인재들을 한양으로 불러들여 일하게 하는 ‘도천법(道薦法)’을 시행했다. 태종은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추천하게 했다. 동래현의 관노였던 장영실이 한양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이 법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1423년 평소 손재주가 좋은 장영실을 눈여겨 보고 있던 공조 참판 이천은 세종에게 장영실의 기술과 재주를 추천하였고, 세종은 장영실의 실력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세종은 관노에게 벼슬을 줄 수 없다는 신하들을 달래 장영실에게 벼슬을 주었다. 장영실은 세종의 뜻에 감사하며 과학 연구와 발명에 온 힘을 쏟았다.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인정받아 노비의 신분을 벗고 종3품의 벼슬자리에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정작 그의 생몰(生沒:탄생과 죽음)은 물론, 성장 과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그것은 장영실의 출신 성분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조상은 원나라 출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려에 귀화하여 아산군(牙山君)에 봉해졌던 장서(蔣壻)의 9대손이며, 그의 집안은 고려 때부터 대대로 과학기술분야의 고위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친은 고려 말 전서라는 직책을 지낸 장성휘이며, 모친은 관기(官妓)였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노비가 아니었지만 장영실이 관노인 이유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르는 조선시대의 신분제도 때문이다. 조선시대 관기(官妓)들은 신분상 천민에 해당하여 딸을 낳으면 어머니를 따라 관기(官妓)가 되었고, 아들을 낳으면 관노(官奴)가 되었다.

태조에서 세종대까지 조선은 귀화인들의 정착을 위해 조선 여자와의 혼인을 주선하였는데, 귀화인들과 혼인한 여성들은 대체로 관노 출신들이 많았다. 그러나 한족(漢族)같은 출신 배경이 좋은 귀화인들은 대체로 양인 여성과 혼인하였으므로, 장영실의 모친은 정실부인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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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3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3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3편

유자광이 남이장군 밑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는데도 모든 공이 남이에게만 돌아가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유자광은 예종은 물론 한명회, 신숙주 등 훈신세력들이 자기와 생각이 같음을 간파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서얼출신인 만큼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더 이상 출세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런 유자광에게 기회가 왔다.

남이가 어느 날 유자광의 집에 와서 “혜성이 없어지지 않는데, 광망(光芒: 혜성의 꼬리)이 희면 두 해에 걸쳐 반역이 있다. 그러니 내가 미리 선수를 치려 한다” 는 말을 했다고 고변(告變)한다. 다른 이야기로는 유자광이 남이 집에 가서 엿들었다 고도 전해진다. 어쨌든 유자광은 곧 바로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하고, 남이가 백두산에서 지었다는 시(詩)를 그 증거로 들이댔다.

유자광은 ‘男兒二十未平國(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을 ‘男兒二十未得國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으로 고쳐서 보고 했다. 고문을 못이긴 남이는 이시애의 난 평정 때의 대장이자 당시의 영의정인 강순을 같은 공범으로 지목하고 자백하여 함께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남문 처형장으로 가는 수레에서 강순이 남이에게 "왜 나를 억울하게 죽게 하느냐" 고 묻자, 남이는 "당신은 영의정 자리에 있고 나이 80으로 함께 평정을 간 부하의 억울함을 보고도 몸을 사려 한마디 변호도 하지 않은 불의를 범해 죽어 마땅하다" 고 하였다. 강순의 아내와 자제들도 죽음을 당하고, 가산은 몰수되었다. 남이는 젊은 나이에 원통하게 죽었지만 오늘날 우리 무속신앙에서는 장군신령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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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2편

남이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영의정을 지낸 남재의 증손자이며, 태종의 외손자로(어머니가 태종의 4녀:정선공주) 태어났다. 남이는 1457년(세조3년) 17세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남이는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고 무예도 뛰어났다. 남이는 이시애의 난(함경도 지방의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 일어났을 때 귀성군 이준과 함께 대장군으로 출전하여 뛰어난 무공을 발휘하고 출세 길에 올랐다. 이어서 남이는 여진족 정벌에도 참여하여 일약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세조는 이런 남이를 귀성군의 뒤를 잇는 병조판서에 제수했다. 나이는 귀성군과 같은 스물여덟이었다. 한명회를 비롯한 훈신들은 외척을 병조판서에 임명해서는 안 된다며 극렬하게 반대했지만 세조는 강행했다. 그만큼 남이를 믿고 총애했다. 그런데 남이는 귀성군 이준처럼 자신을 감출 줄 몰랐다. 남이는 자신의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남이가 백두산에 올라 썼다는 시를 보면 남이의 호기(豪氣)와 기개(氣槪)를 짐작할 수 있다.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남아 이십에 나라를 평안하게 못 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하리요』

하지만 이 시(詩)는 나중에 남이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젊은 종친세력의 등장을 경계하고 있던 한명회와 신숙주 등 훈구대신들에게 드러내놓고 호탕한 기개를 뽐내는 남이는 좋은 명분을 안겨주었고, 귀성군과 남이를 시기 질투했던 예종의 눈에도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예종은 즉위하자마자, ‘외척은 군권을 가져서는 안된다’ 는 훈신들의 주장에 따라 남이를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정예 왕실 친위대인 겸사복의 지휘관)으로 좌천시킨다.

이때 쯤 조선의 최대 간신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유자광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무예가 출중했던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세조에게 자진 출병하겠다는 서한을 보내 세조의 눈에 든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서얼출신인데도 파격적으로 등용되었다. 그러나 유자광의 입장에서는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특히 나이가 비슷한 남이의 출세와 비교해 보면 더욱 그랬다. 그래서 불만이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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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1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1편

■ 귀성군 이준과 남이장군 1편

예종은 재위기간이 1년 3개월 밖에 되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별로 존재감이 없는 왕이지만, 실록을 통해서 본 예종은,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임금 앞에서 강론함)하게 하고,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 고 한다.

병세가 깊어져가던 세조는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세조14년)에 세자(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예종의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짧은 재위기간 동안 나름 개혁을 추진해 보려했으나 채 실행해 보기도 전에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미 세조 말기부터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권신(훈신)세력과 종친세력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이 대립은 세조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훈신세력이 너무 거대해지자 세조가 죽기 전에 젊은 세자를 위해서 그들을 견제 할 신진세력을 양성하려고 평소 총애하고 있던 종친인 귀성군 이준(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과 외척인 남이(태종의 사위인 남휘의 손자)에 대해 파격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하지만 예종은 즉위 후 세조의 뜻대로 한명회, 신숙주를 필두로 하는 훈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젊은 종친인 이준과 외척 남이와 힘을 합치지 않았다.

예종은 귀성군 이준이나 남이를 싫어했다. 예종은 세자시절부터 세조가 그들을 너무 총애하는 모습에 질투와 경계심을 느꼈던 것이다. 특히 귀성군 이준은 예종의 사촌 형으로 언제든지 예종을 몰아내고 왕이 될 수도 있는 왕위계승 서열 몇 순위 안에 있었다. 그런 귀성군 이준이 총사령관이 되어 ‘이시애의 난(함경도 차별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을 평정하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병조 판서를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으니, 스무 살이 채 안 된 젊은 예종이 질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귀성군 이준은 역사서에 『귀성군은 가문도 좋고, 키도 훤칠했으며 잘생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세조의 후궁에게 연애편지를 받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귀성군 이준은 자신의 행실에 신중하고 사리판단이 밝았으며, 종친이든 훈신이든 가리지 않고 신하들 사이에서의 처신도 두루 잘했다.

예종은 세조의 유지(遺志)에 따라 즉위 직후 귀성군 이준을 그대로 영의정에 두었지만, 귀성군 이준에 대한 경계심은 완전히 버리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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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안평대군

■ 예술가 안평대군

■ 예술가 안평대군

뛰어난 젊은 예술가이자 문필가 안평대군은 ‘안평(安平)’이라는 자신의 이름과는 달리 정치 투쟁에 희생되는 비극적 운명을 겪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3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나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대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얻었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 도성 북문 밖에 무이정사(武夷精舍)와 담담정(淡淡亭)을 지어 수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었고, 문인들을 초청하여 시회(詩會)를 베푸는 등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 궁중에 소장된 서화와 자신이 모은 중국 서화가들의 작품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개하여 당대의 서화(書畫)계에 큰 역할을 하는 등 당시 문화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430년(세종12년)에는 형 수양대군, 동생 임영대군(臨瀛大君)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했는데, 여러 사람들이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칭송했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기질이 호탕하여 무사들을 이끌고 매 사냥을 나서기도 했으나, 그의 주변에는 주로 문인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안평대군은 당대 제일의 서예가로, 한석봉과 함께 조선 최고의 명필로 불린다. 그의 글씨는 고려 말부터 유행한 조맹부의 필체를 따랐으나, 자신의 개성을 마음껏 발휘한 활달한 기풍을 담고 있다. 활달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강인한 힘이 느껴지는 높은 경지의 그의 글씨는 풍류(風流)와 문화를 알던 그의 인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고 전해진다. 중국 사신들로부터 "조맹부에게 배웠으나 조맹부보다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였고, 중국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의 필적을 얻어 갔다고 한다.

안평대군은 1450년 문종이 즉위한 뒤 황표정사(黃標政事:왕자들이 추천한 사람 가운데 왕이 적임자를 골라 임명하던 인사제도)를 장악하고, 측근의 문신들을 요직에 앉히는 등 조정의 배후 실력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더 큰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있던 수양대군은 1452년 7월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자신의 외교적 위상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시켜 황표정사를 폐지해 버렸다. 이에 안평대군은 잃어버린 권력 회복에 힘쓰면서, 이징옥(李澄玉)으로 하여금 함경도 경성에 있는 무기를 서울로 옮기게 하여 무력을 기르고, 1453년(단종1년) 9월 황표정사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의 힘겨루기가 본격화 된 것이었다.

하지만, 단종 즉위 이후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황보인, 김종서 등 학자 세력과 제휴하여 수양대군과 권력을 다투던 중, 수양대군이 선수를 쳐 계유정난을 일으켰다.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할 때, 안평대군 역시 반역을 도모했다 하여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후에 귀양지가 교동으로 옮겨지고 8일 만에 36세로 사사(賜死)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 이우직도 연좌제에 의해 강화도에서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가 처형되었고, 아내는 관비가 되었다. 며느리인 오대(五臺)와 딸 무심(無心)은 권람의 집의 노비로 분배되었다. 이후 선원계보(왕실족보)에서도 삭제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때 복권(復權)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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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유자광 5편

■ 간신 유자광 5편

■ 간신 유자광 5편

수많은 폭정을 자행하던 연산군은 결국 재위 12년 만에 중종반정(反正:나쁜 왕을 쫓아냄)으로 쫓겨났다. 유자광은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또한 적극 가담했다. 그는 궁궐 문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고, 그 공로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중종1년). 그러나 지금까지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여전히 실직(實職)에는 임용되지 못했다. 얼마 뒤 중종은 그의 품계를 ‘대광(大匡, 정1품)’으로 올리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대간의 반대로 실패했다(중종2년). 이때 그는 68세였다. 유자광에게는 평생 이어진 참으로 집요한 대간의 반대이다.

유자광의 몰락은 곧 닥쳐왔다. 연산군 때의 두 사화(士禍)의 원흉으로 지목되었기 때문이다. 대간들은 두 달 가까이 탄핵을 지속했고, 마침내 유자광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중종은 일단 유자광을 파직했다. 그러나 대간은 만족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의 가장 핵심 실세인 좌의정 박원종도 대간에 동의함으로써 유자광은 두 번째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중종2년)

유자광은 처음에는 평해(平海, 경북 울진)로 유배되고 공신에서도 삭훈되었으며, 자손들도 멀리 귀양 갔다. 야사에 따르면 그는 유배된 뒤 눈이 멀어갔다고 한다. 유자광은 5년 뒤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73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그의 아들인 유방도 스스로 목을 매어 목숨을 끊었다. 중종은 유자광이 죽은 뒤에 그의 지위를 다시 회복시키고 예장(禮葬)할 것을 명령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유자광은 1908년(순종1년)에야 죄명을 벗고 원래의 관작(官爵)을 회복하였다.

유자광은 서얼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략(智略)과 용력(勇力)을 발휘하여 두 차례나 공신이 되면서 외면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과정에서 사림들과 대립하면서 당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간신으로 손가락질 받는 비운의 인물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진 인물들이 그런 재능을 엉뚱하게 쓴 경우가 많다. 사회 현실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사대부들에게 유자광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다. 조선의 역사는 조선사대부들이 쓴 역사인 만큼 유자광에 대한 왜곡도 상당히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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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사에는 유자광이 당시 유명한 도적 홍길동을 무예로 제압해서 잡았다.라고 나온다. 홍길동은 실록(연산군)에도 나오는 전남 장성 출신의 실존인물이었다. 후에 허균에 의해 국문소설 ‘홍길동전’으로 다시 태어나 의적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도적 홍길동을 잡은 유자광은 역사상 둘도 없는 간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역사의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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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유자광 4편

■ 간신 유자광 4편

■ 간신 유자광 4편

순탄하던 그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발단은 성종8년 7월 ‘무술옥사(戊戌獄事)’로도 불리는 간통사건을 놓고 승지들의 의견이 갈라지면서 시작되었다. 현석규는 ‘강간’으로 결론지은 의금부의 판결에 찬성했지만, 임사홍을 비롯한 그 밖의 승지들은 거기에 반대했다. 일단 결론은 현석규와 의금부의 판단이 옳다는 쪽으로 내려졌다. 그러나 현석규가 다른 승지들과의 논쟁에서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 사간원의 탄핵이 제기되면서 문제는 확대되었다.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 이 사건에서 유자광은 문제를 촉발시킨 현석규를 계속 승진시킨 성종의 조치에 반대하다가 이듬해 5월 결국 동래(東萊)에 유배되었다. 그는 4년 뒤 직첩을 돌려받을 때까지 침체의 시간을 보냈다.

유자광은 성종16년(1485년) 5월 숭정대부(崇政大夫, 종1품)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로 임명되어 7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 이때도 품계는 높았지만 실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이제 그는 46세의 장년이었다. 성종 후반에는 두 번이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그러나 이때도 한성부 판윤(성종18년 6월)과 황해도 관찰사(성종22년 12월)에 제수되었지만 대간의 반대로 모두 무산되었다.

1494년에 연산군이 즉위했을 때 유자광은 55세였다. 유자광은 연산군 치세 12년도 무사히 넘겼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입지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 중요한 계기는 연산군4년(1498년) 7월에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였다. 김일손의 사초(史草)에 기록된 김종직의 <조의제문> 속의 숨은 뜻을 밝혀내, 직접 글귀마다 주석을 달아 해석하여(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비방하고 있다고 해석함) 연산군이 알기 쉽게 했고, 사화로 확대되어 많은 사림파들이 숙청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집을 걷어다가 빈청 앞뜰에서 불사르기도 했다. 나아가 1498년에는 김종직과 그 제자들을 사초와 관련지어 모조리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연산군은 “유자광은 실로 나라에 충성한다.”는 말로 특별히 칭찬하고, 죄인들을 국문(鞫問)하도록 명하였다.

이후, 유자광은 조정에서 권력가로 군림하게 되었다. 그를 간신이자 악인으로 규정하게 만든 결정적 오명도 이 무오사화를 계기로 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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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유자광 3편

■ 간신 유자광 3편

■ 간신 유자광 3편

조정 대신들의 반발에 부닥친 유자광은 병든 모친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하고 고향인 남원으로 돌아갔는데, 세조는 그에게 약을 내려주고 휴가와 역마를 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468년(세조14년)에 세조는 세자와 함께 온양(溫陽)으로 행차할 때 그를 다시 불러들여 총통장(總筒將)으로 임명해 자신을 호위케 하였다. 그리고 유자광을 온양에서 실시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응시케 하여 장원으로 선발하고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임명하였다. 말 그대로 파격적인 지시였다.(세조14년 2월15일)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당시 유자광은 신숙주(申叔舟)가 선발한 합격자의 글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나, 세조가 직접 그의 글을 1등으로 선발했다고 한다. 유자광은 ‘이시애의 난’을 계기로 세조에게 발탁된 지 8개월 만에 갑사에서 정3품 당상관에 오른 것이다. 이때 그는 29세였다.

그러나 고속승진은 했지만 공신까지는 되지 못했다. 유자광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남이는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공신도 되고 병조판서 자리까지 오른다. 유자광은 그런 남이를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남이를 자기 출세의 발판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 학문과 무예 양쪽에서 모두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출신인 유자광이 당시 조선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아야만 했고, 야비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고 해야만 했다.

유자광의 첫 번째 작업은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남이역모사건)해 그들을 제거한 일이었다. 남이가 한명회·김국광 등을 죽이고 임금을 바꾸려 한다고 고했고, 가혹한 심문을 거쳐 남이를 비롯해 강순(康純)·조경치(曺敬治)·변영수(卞永壽) 등이 처형되었다. 유자광은 당연히 크게 포상되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책봉되었던 적개공신(敵愾功臣)에서 2등으로 추록(追錄)되고, ‘남이의 옥사’로 익대(翊戴)공신에 책봉되고 ‘무령군’에 녹훈(錄勳)되었다. 공신 명단의 맨 앞에 그의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것은 이 사건에서 세운 그의 공로에 대한 평가를 증명해 준다. 이제 유자광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유자광은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공신이 되었다.

이때부터 성종8년(1477년)까지 그는 안정된 지위를 누리면서 조정의 여러 현안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발언했다. 성종7년 한명회가 정희대비(貞熹大妃)의 수렴청정 중단을 반대하자 즉각 이에 반대하고 오히려 한명회를 탄핵한 것은 유자광의 견고한 지위와 정치적 판단을 보여준다. 그는 이듬해 도총관(都摠管)에 제수되었지만, 역시 대간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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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유자광 2편

■ 간신 유자광 2편

■ 간신 유자광 2편

유자광에 관한 여러 가지 야담(野談)이 전해지고 있다. 중종 때 사림 출신이면서도 기묘사화를 일으켜 간신으로 지탄받은 남곤은 《유자광전》을 통해 그를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유자광은 몸이 날래고 힘이 세며 원숭이처럼 높은 곳을 잘 타고 다녔는데, 도박을 좋아하고 여자를 강간하는 등 매우 광패해서 유규가 자식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조 대의 문인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유자광이 어린 시절 매우 영특하여 천출임에도 불구하고 유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며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무튼 여러 기록을 종합해 보면, 유자광은 좋은 머리와 건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고,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크게 출세한 인물이다. 유자광은 당시 사회에 순응해 가면서 서얼차대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뿐 이었다. 왕실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공신이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역모를 고변하여 사전에 진압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아예 역모를 성공시켜 새로운 왕을 만들어 내는 것 뿐 이었다.

유자광은 평생 관직에 임명되거나 승진하려할 때마다 대간(감찰 임무를 맡은 대관(臺官)과 국왕에 대한 간언을 맡은 간관(諫官)의 합칭:사헌부, 사간원)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 그 반대의 근거는 항상 그가 서얼이라는 것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공로를 인정받아 두 번이나 1등 공신에 책봉되었지만, 실제 관직에는 거의 임명되지 못한 특이한 경력을 남겼다. 그에 관한 기록에는 ‘무령군(武靈君)’이나 ‘무령부원군’이라는 명예직으로만 기록되어있다.

유자광의 첫 직업은 갑사(甲士)였다. ‘으뜸가는 군사’라는 그 의미대로 갑사는 국왕 호위와 수도 경비를 맡는 정예병이었다. 그런 임무 상 그들은 뛰어난 무예를 갖춰야 했으며, 의장대로도 활동했기 때문에 용모와 체격도 뛰어났다. 그들은 정규 무관은 아니지만 상당한 지위를 인정받았고, 교대로 지방에 내려가 복무하기도 했다.

유자광이 출세하게 된 첫 계기는 세조13년(1467년) 5월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 이다. 그때 그는 28세의 갑사로 남원으로 내려가 복무하고 있었다. ‘이시애 난’이 일어나자 유자광은 즉시 도성으로 올라와 상소를 올렸다. 그때 전황은 관군이 상당히 고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갑사에 소속된 뒤 항상 변방에서 공을 세우고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했다”고 하며, “함길도가 험하지만 그런 조건은 적이나 우리나 마찬가지”라면서 과감한 결전을 주장했다.

세조는 유자광의 글을 보고 경탄했다. 유자광의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유자광의 활약 덕분이었는지 ‘이시애 난’은 석 달 만에 진압되었고, 세조는 유자광을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 서얼이라는 신분의 벽을 넘어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하고, 병조정랑(정5품)에 임명했다. 파격적인 인사였다. 하지만 대신들의 반발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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