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5일 금요일

민귀군경民貴君輕 -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민귀군경民貴君輕 -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민귀군경(民貴君輕) - 백성은 귀하고 임금은 가볍다.

백성 민(氏/1) 귀할 귀(貝/5) 임금 군(口/4) 가벼울 경(車/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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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은 天心(천심)’이란 말이 있다. 백성의 마음은 하늘의 뜻과 같으니 그들과 어긋나게 해서는 나라가 성립될 수 없다는 속담이다. 국가는 거주하는 국민의 것이니 그들을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면 혁명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말했다. 하지만 헌법이 없었던 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 기원전 403년~221년) 말기의 유교 사상가 孟子(맹자)는 링컨보다 까마득히 먼저 백성들을 앞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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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백성이 원하지 않으면 天子(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없으며, 올랐다 하더라도 내려와야 한다고 혁명을 인정했다. 폭군 桀紂(걸주)가 쫓겨난 것은 민심 잃은 사람을 처단한 것이라 본 것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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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도덕을 바탕으로 한 王道(왕도)정치와 백성을 근간으로 하는 民本(민본)정치를 주장했다. 이 정도로 앞선 생각을 가졌으니 백성은 당연히 귀하고(民貴) 임금은 가볍다(君輕)고 볼 수밖에 없다. ‘맹자’의 盡心(진심) 下篇(하편)에 실린 말씀내용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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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 가장 귀중하고 사직은 그 다음이며, 군주는 대단하지 않다(民爲貴 社稷次之 君爲輕/ 민위귀 사직차지 군위경).’ 천자나 제후가 제사를 지내던 토지신이 社(사), 곡물신이 稷(직)인데 이 둘을 합쳐 나라의 의미로 사용됐다. 땅과 곡식이 백성들의 삶과 직결되므로 왕가의 선조인 宗廟(종묘)와 함께 복을 비는 제사를 모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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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설명은 이어진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천자가 되고, 천자의 마음을 얻으면 제후가 되며, 제후의 마음을 얻으면 대부가 된다고 하여 역시 백성을 우선했다. 살진 희생을 마련하고 정결한 곡식으로 제사를 지내도 가뭄이 들거나 물난리가 나면 사직의 신을 바꾸듯이 사직을 위태롭게 하는 제후가 있으면 또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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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송)의 朱熹(주희, 熹는 빛날 희)가 주석문을 덧붙여 저술한 ‘孟子集註(맹자집주)’는 이 부분을 제후가 무도하여 사직이 멸하면 ‘마땅히 어진 임금으로 바꾸어 세우니 임금이 사직보다 가볍기 때문(則當更立賢君 是君輕於社稷/ 즉당경립현군 시군경어사직)’이라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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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나 지도급 인사 치고 국민을 모든 것에 앞세운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비록 한 표를 가진 유권자라도 그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높은 자리에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온갖 달콤한 말로 목표한 권력을 잡게 되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인 듯 眼下無人(안하무인)인 사람이 흔하다. 민을 귀중히 여기지 않는 이러한 태도는 곧 버림을 받는다는 것을 잊기 때문에 權不十年(권불십년)이 되풀이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장창소인臧倉小人 - 장창이란 소인, 몰래 중상하거나 이간질하는 아첨꾼

장창소인臧倉小人 - 장창이란 소인, 몰래 중상하거나 이간질하는 아첨꾼

장창소인(臧倉小人) - 장창이란 소인, 몰래 중상하거나 이간질하는 아첨꾼

착할 장(臣/8) 곳집 창(人/8) 작을 소(小/0) 사람 인(人/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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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앉은 상관이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아랫사람이 전하는 말을 잘 판단하는 일이다. 옳은 말을 아무리 강조해도 귀에 거슬린다고 배척하면 발전이 없다. 윗사람의 성향을 꿰뚫고 있는 부하들이 달콤한 말만 늘어놓거나 속마음은 숨기고 아부하는 사람이 득시글거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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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는 덜하다고 해도 어떤 일을 자의로 판단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높은 사람을 잘못 인도했다고 영원히 욕먹는 사람이 있다. 모시는 임금이 만나려고 하는 孟子(맹자)를 온갖 구실로 막은 臧倉(장창)이란 신하인데 小人(소인)의 대명사가 됐다. ‘맹자’의 梁惠王(양혜왕) 下篇(하편)에서 비롯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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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戰國時代(전국시대)에 널리 알려진 맹자를 각국의 군주들이 서로 만나고 싶어 했다. 魯(노)나라의 平公(평공)도 맹자의 제자 樂正子(악정자)를 통해 접견일정을 잡고 행선지를 말하지 않은 채 수레를 준비시켰다. 평공의 총애를 받는 장창이 뒤늦게 알고 막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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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사람이라는 맹자가 어머니 장례를 아버지보다 성대하게 치렀다면서 왕이 몸을 낮추어 찾아 간다는 것은 옳은 처신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실제 맹자는 유년기에 아버지가 돌아 가셨기에 가정 형편상 예법에 의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평공은 장창의 말대로 맹자를 만나러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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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정자가 스승을 찾아 말했다. ‘제가 왕께 말하여 만나러오려 했으나(克告於君 君爲來見也/ 극고어군 군위래견야), 총신 장창이 만류하여 오지 못했습니다(嬖人有臧倉者沮君 君是以不果來也/ 폐인유장창자저군 군시이불과래야).’ 克(극)은 성실하고 선한 제자 악정자의 이름이고, 嬖는 사랑할 폐, 아부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嬖臣(폐신)이나 동성애를 말하는 斷袖之嬖(단수지폐)라 할 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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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사정을 들은 맹자가 임금을 만나지 못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라 받아들였지만 속 좁게 판단한 평공보다 엉뚱한 정보를 제공한 장창이 폐신으로 비난받는다. 소인배뿐만 아니라 남을 중상하거나 이간질하는 모략꾼의 대명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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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헐뜯는 장창이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는 孔子(공자)를 낮잡아 본 陽貨(양화)와 함께 쓴 성어로도 나온다. 曹操(조조)가 인재로 발탁한 禰衡(예형, 禰는 아버지사당 예)이 막무가내로 행동하여 자신을 모욕하자 잔치 때의 북치기를 시켰다. 예형이 천하명사를 북이나 치게 한다고 분통을 터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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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양화가 공자를 업신여기고, 장창이 맹자를 헐뜯는 것과 같다(是猶陽貨輕仲尼 臧倉毀孟子耳/ 시유양화경중니 장창훼맹자이).’ 남을 깎아내리는 간신이나 아첨배는 예나 지금이나 욕을 먹는다. 하지만 귀에 쏙 드는 말만 받아들이고 여러 의견을 들어 밝게 판단하는 능력을 갖지 못한 윗사람은 더 나쁘다. / 제공 : 안병화(전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얼버무리다

‘얼버무리다’는 여러 가지를 한데 뒤섞는다는 뜻의 ‘버무리다’ 앞에 접두사 ‘얼-’이 붙은 것이다. ‘얼-’은 어떤 일을 분명하지 못하게 대충했을 때 앞에 붙이는 말인데, 어떤 말 앞에 ‘얼-’이 붙으면 ‘덜된’ 또는 ‘모자라는’ 뜻이 더해진다.

김치를 담글 때는 소금에 절인 배추에 갖은 양념을 넣고 쓱쓱 버무리고, 나물을 무칠 때에도 깨나 소금 같은 양념을 적당히 넣고 잘 버무려서 먹는다. 이때 제대로 버무리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면’ 음식 맛이 제대로 안날 것이다. 이처럼 ‘얼버무리다’는 제대로 하지 않고 대충 버무린다는 뜻으로, ‘말이나 행동을 분명하지 않게 대충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도 저도 아닌 것을 ‘어중간하다’라 한다거나, 다부지지 못하고 어수룩한 사람을 ‘얼뜨기’ ‘얼간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대충하다, 어물어물 넘기다, 어물거리다, 어름어름하다’ 같은 말들도 비슷한 상황에서 쓰는 말들이다.

2. 옹고집

억지가 심하고 자기 생각만 우기는 고집 센 사람이나 그런 성질을 ‘옹고집’이라고 한다. 옹고집은 《옹고집전》이라는 소설의 주인공인데 고집이 세고 심술 사나운데다가 몹시 인색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불효막심하기까지. 어느 날 어떤 도사가 보다 못해 옹고집을 혼내 주려고 도술로 짚으로 가짜 옹고집을 만들어 그 집으로 보냈다. 진짜 옹고집과 똑같이 생긴 가짜 옹고집 때문에 오히려 진짜 옹고집은 가짜로 몰려 쫓겨나게 되었다. 옹고집은 거지꼴로 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다가 끝내는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도사가 나타나 그를 구해 주고, 가짜 옹고집을 물리칠 부적도 주었다. 옹고집은 이 일을 계기로 크게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옹고집(壅固執)은 이름에서부터 그 뜻을 읽을 수 있듯이 ‘옹(壅)’은 ‘꽉 막혔다’는 뜻이고, ‘고(固)’는 ‘단단하다’ ‘한결같다’는 뜻이다. ‘집(執)’은 ‘꽉 쥐다’ ‘잡다’ ‘지키다’ 라는 뜻이다. 그야말로 꽉 막힌 고집쟁이라는 것이다. 우둔하면서 고집이 센 사람을 일컫는 말로 ‘벽창호’도 있다. 벽창호는 ‘벽창우’가 변한 말인데, 뒤에 붙은 ‘우(牛)’는 ‘소’라는 뜻이고, 앞의 ‘벽창’은 평안북도 ‘벽동’과 ‘창성’에서 앞 글자만 딴 것이다. 벽동과 창성 지방의 소가 억세고 무뚝뚝해서 말을 잘 안 들었기 때문에 ‘고집불통’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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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월하매

■ 연산군의 여인들 월하매

■ 연산군의 여인들 월하매

연산군은 수천 명의 ‘흥청’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를 총애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 중에는 왕과 잠자리 한번 해보지 못한 흥청이 더 많았고, 한두 번의 잠자리로 끝난 흥청도 많았다. 반면 연산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은 흥청도 있었는데, 원주 출신의 월하매(月下梅)가 그 경우이다.

월하매가 언제 태어났는지 확실하지 않아 나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연산군은 어릴 때 친모를 잃어서 생긴 모성결핍 때문인지, 특히 연상의 유부녀를 좋아했다. 연산군을 매혹시킨 장녹수도 그러하였고, 늦은 나이에 장악원(掌樂院)에 입성해 흥청까지 오른 월하매도 미루어 짐작하건대 분명 연상의 유부녀였을 것이다. 나이도 많고 미인은 아니었지만, 누이처럼 어미처럼 연산군을 품어주는 넓은 마음을 가져 연산군이 많이 의지하고 위로받았다고 한다. 또한, 비파를 타는 솜씨가 일품이라, 연산군은 종종 월하매의 비파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한다.

원주 출신의 기생 월하매는 장악원(조선시대 궁중의 음악과 무용에 관한 일을 담당한 관청)의 선상기(選上妓·노래하고 춤추는 기생)로 뽑혔다가 연산군의 눈에 들어 흥청이 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월하매는 음악을 잘 이해했고 희학(戱謔)을 잘했는데, 그래서 연산군은 늘 월하매를 호방(豪放)하다고 칭찬하며 총애했다는 것이다. 희학이란 ‘희롱과 해학’의 합성어이다. 즉 월하매는 단순하게 가무만 잘한 것이 아니라 ‘희롱과 해학’도 잘했다는 뜻이다. 월하매가 남자 무당이 되어 놀이를 할 때는 신내림을 받아 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당연히 월하매는 신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어떤 말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연산군을 아이 취급하며 희롱하기도 했다. 보통 배짱을 가진 흥청이라면 감히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월하매는 분명 배짱도 두둑하고 머리도 영리한 흥청이었을 것이다.

그런 월하매에게서 연산군은 어머니에게서 느끼는 위안과 행복을 느꼈음이 분명하다. 그런 월하매가 죽자 연산군은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상심했다고 한다. 월하매가 병에 걸리자 연산군이 직접 문병도 하였고, 월하매가 죽자 조정 관리들에게 장례를 담당하라고 명령하고, 묘자리를 알아봐주고 제문도 지어주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정승들을 참석하게 하고, 직접 술도 따라주고 통곡하며 애도하는 시를 지어 바쳤다.

‘지극한 슬픔에 눈물 그치지 않고(悼極難收淚)/ 깊은 비통으로 잠 못 이루누나( 悲深睡不成)/ 어지러운 마음에 애끊는 듯하니(心紛腸似斷)/ 이제 깨어나면 어찌 살아가려나(從此覺傷生).’

이 시에는 월하매를 잃은 연산군의 비통함이 절절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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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 의 어원

■ 마누라 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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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라 의 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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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는 요즘 일상에서 자신의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거나 다른 사람에게 자기 아내를 약간 낮춰서 일컬을 때 주로 쓰인다. 농담 섞인 말로 ‘마주 누워 자는 여자’ 라거나 ‘마! 누라!(그냥 누워라)’라는 뜻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우스개소리일 뿐, 진정한 의미는 아니다.

원래 마누라는 고려 후기 몽골에서 들어온 말로, 조선시대에는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 처럼 마마와 같이 쓰이던 극 존칭어였다. 기록상으로 ‘마누라’는 15세기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마노라‘로 처음 나온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기서의 ‘마노라’는 ‘주인(主人)’의 의미이다. 《이두편람(吏讀便覽)》에서도 ‘마노라’에 대해 ‘노비가 그 주인을 일컫는 말’이라 하였다. 비천한 사람이 존귀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라는 의미도 첨가되어 있다.

그런데 《한중록(閑中錄)》에서는 ‘마노라’가 ‘왕, 왕대비, 세자, 세자빈’ 등과 같은 궁중의 높은 인물을 직접 지시하는 데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비마노라, 선왕마노라, 웃전마노라’ 등으로 활용되어 궁중 인물과 결부된 존칭 호칭어로 쓰이고 있다. 이때에는 ‘존칭(尊稱)’으로서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에게도 적용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특이한 점이다.

궁궐 밖에서는 ‘마노라’가 ‘지체 높은 벼슬아치’나 ‘그 부인’ 등을 부르거나 지칭하는 데도 쓰였다. ‘운현(雲峴)마노라, 선혜당상(宣惠堂上)마노라’의 ‘마노라’가 바로 그것이다. 또한 무속(巫俗)이라는 특정 사회에서는 ‘마노라’가 ‘神’의 의미로도 통용되었다. ‘산신(山神)마노라, 성주마노라, 터주마노라’에 보이는 ‘마노라’가 바로 그 예이다. ‘산신, 성주, 터주’를 여성으로만 볼 수 없다는 점에서 보면 이때 쓰인 ‘마노라’는 ‘남성’에 적용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마노라’는 존칭으로서 남녀 모두에게 통용되던 단어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마마’ 또는 ‘마님’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다가 19세기 이후 신분 제도가 무너지면서 ‘마노라’는 늙은 부인이나 자신의 아내를 가리키는 말로 일반화되어 쓰이게 되었다. 어형도 ‘마누라’로 변했을 뿐만 아니라, 존대(尊對)의 의미도 없어지고 ‘남성’을 포함하지도 않게 변화된 것이다. 조선조 말 ‘덕수궁’ 시절에는 궁중에서 ‘마누라’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았다는 노(老) 상궁(尙宮)들의 증언을 토대로 할 때, 적어도 19세기 말 이전에 ‘마누라’의 의미 가치가 떨어져 일반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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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마노라’는 존칭으로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적용되다가, 존대의 의미를 상실하고 ‘여성’에게 쓰이는 단어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원래 영감이라는 단어도 정삼품 이상 종이품 이하의 관원을 말하는 것이었다. 오늘날도 판사나 검사를 영감님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옛날 그 관직의 등급과 유사하여서 부르는 것이다. 존칭이던 ‘영감’이 ‘마누라’의 상대어가 되어 ‘나이든 남자’를 일컫는 말이 된 것도 같은 무렵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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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3편

왕의 총애를 등에 업은 장녹수는 권력을 함부로 휘둘렀다. 그녀는 남의 재산을 함부로 빼앗았으며, 각종 뇌물과 인사 청탁을 받았다. 장녹수의 형부 김효손(金孝孫)도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에 제수되는 혜택을 받았다. 1506년 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 1502년(연산군8년)~1503년(연산군9년)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산군이 장녹수에게 빠져 날로 방탕이 심해지고 포악한 짓을 많이 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할머니 인수대비(소혜왕후:성종의 어머니)가 걱정이 되어 누차 타일렀지만, 도리어 왕의 원망만 사게 되었다.

할머니의 근심 어린 충고를 듣지 않고, 연산군은 장녹수를 더욱 가까이 하였다. 장녹수는 입궁한 직후에는 종4품의 숙원(淑媛)으로 있었는데, 이듬해에는 종3품의 숙용(淑容)에까지 올랐다. 궁녀로 들어와 초고속 승진을 한 셈이었다. 품계가 올라간 장녹수는 더욱 권력을 남용하였다. 장녹수는 궁 밖의 사가(私家)를 재건하기 위해 민가를 헐어버리게 하였으며, 미모가 뛰어난 여인을 시기하여 여인의 부모형제를 아무 죄도 없이 하루아침에 다 죽이게도 했다. 옥지화(玉池花)라는 기녀는 장녹수의 치마를 한 번 잘못 밟았다가 참형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장녹수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녀의 위세를 믿고 장녹수 집의 하인들마저 행패를 부렸다. 동지중추부사 이병정(李秉正)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는데, 오히려 사재(私財)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니 모두가 출세하기 위해 장녹수 앞에 줄을 서게 되었다. 날로 장녹수와 그 측근들의 횡포로 심해지면서 백성들의 원망은 높아졌고, 결국 연산군의 몰락과 함께 그녀의 몰락도 이어졌다.

기생에서 후궁의 반열에 올라 연산군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했던 장녹수. 독재정치로 종말을 향해 치닫던 연산군의 말년 치세, 그녀는 왕의 광기를 거의 유일하게 제어할 수 있는 존재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연산군의 음탕한 생활과 악행을 더욱 부추기기만 했다.

무수한 금은보화와 전택(田宅) 등을 하사받았고, 연산군의 몸과 마음을 손위에 놓고 주무르며, 백성들을 괴롭히는데 한 몫을 한 장녹수는 1506년 중종반정 후 반정 세력에 의해 제거 대상 1호로 떠올랐다.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사(軍器寺) 앞에 끌려온 장녹수는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길 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시체에 기왓장과 돌멩이를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잠깐 사이 시체 위로 돌무더기가 이루어졌을 정도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연산군에게 향하여야 할 민중들의 분노가 모두 그녀에게로 향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양반가의 여식도 아니었고, 가장 천한 신분의 여인이었으니, 백성들에게는 연산군 대신 화풀이를 할 대상으로 딱 알맞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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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2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2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2편

흥청은 연산군 대에 뽑았던 일등급 기녀였다. 연산군은 기녀 제도를 확대 개편하여, 창기 중에서 재색(財色)이 뛰어난 기생을 대궐 안으로 뽑아들였다. 전국의 개인 몸종과 지방의 관비, 그리고 심지어 양갓집 여성들까지 강제로 뽑아 올려졌다. 기생의 칭호를 ‘운평(運平)’이라 했는데, 그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특별한 기생을 승격시켜 맑은 기운을 일으킨다 하여 ‘흥청(興淸)’이라 불렀다. 흥청 중에서도 왕을 가까이 모신 자는 ‘지과흥청(地科興淸)’이라 하고, 왕과 동침한 자는 ‘천과흥청(天科興淸)’이라 구분하기도 했다

연산군은 흥청과 관련하여 새로운 명칭과 칭호를 많이 만들었다. 흥청의 보증인은 ‘꽃을 보호하고 봄을 보탠다’는 뜻의 ‘호화첨춘(護花添春)’이라 하였고, 흥청이 입는 옷은 ‘상서로움을 맞이하는 옷’이라 하여 ‘아상복(迓祥服)’이라 하였으며, 흥청의 식료품을 저장하는 곳은 ‘화려함을 보호하는 창고’라 하여 ‘호화고(護華庫)’라 하였다. 아름다운 여자를 각 도에 가서 찾아내는 자를 ‘붉은 것을 캐는 사신’이라 하여 ‘채홍사(採紅使)’라 하고, 나이 어린 여자를 찾아내는 자를 ‘푸름을 캐는 사신’이라 하여 ‘채청사(採靑使)’라 하였다.

특히, 연산군은 경복궁의 경회루를 흥청들과 음탕한 놀이를 즐기는 장소로 삼았다. 『경회루 못가에 만세산(萬歲山)을 만들고, 산 위에 월궁(月宮)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만상이었다. 그리고 용주(龍舟)를 만들어 못 위에 띄워놓고, 채색 비단으로 연꽃을 만들었다. 그리고 산호수(珊瑚樹)도 만들어 못 가운데에 푹 솟게 심었다. 누(樓) 아래에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흥청·운평 3천여 명을 모아 노니, 생황(笙簧:관악기)과 노랫소리가 비등하였다.』는 기록은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생활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경회루에서 국가 재정을 물 쓰듯이 쓰면서 흥청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는 연산군을 두고 백성들은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로 저주했다. 이처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며 연산군의 향락을 위해 뽑힌 흥청들. 그런 흥정 중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출세한 인물이 바로 장녹수였다.

궁궐에 들어 온 장녹수는 본격적으로 연산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때로는 어린아이 같이 때로는 노예처럼 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산군은 장녹수에게 깊이 빠져, 화내는 일이 있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喜色)을 띨 정도였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음란한 향락과 패륜 및 실정(失政)을 더욱 가속화 시켰다.

- 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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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1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1편

■ 연산군의 여인들 장녹수 1편

연산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여인이고, 총애했던 후궁 중 가장 유명한 여인이 바로 장녹수이다. 드라마나 영화에도 많이 등장하여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다. 장녹수는 충청도 문의 현령(文義縣令)을 지낸 장한필(張漢弼)과 그의 첩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에는 철저한 신분제도가 시행되었으므로 ‘일천즉천(一賤則賤)’의 법령에 따라 부모 중 한쪽이 천민이면 그 자식 역시 천민이 된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엿한 양반의 핏줄을 이어받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을 이어받아 천민 신분이 되는 것이다. 그녀의 친언니 장복수는 내수사(內需司)의 여종이었다.

장녹수의 아버지 장한필이 문의 현령으로 재임할 때 관기와 관계하여 장녹수를 낳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장녹수처럼 양반과 천첩 사이에서 태어난 여식을 얼녀(孼女)라 한다. 유명한 기생 황진이가 얼녀였고, 월매의 딸 춘향이도 얼녀였다. 그러므로 장녹수는 어머니의 운명을 이어받아 어릴 적부터 기적에 들어 관기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연산군일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는데, 처음에는 집이 매우 가난하여 몸을 팔아서 생활을 했으며 시집을 여러 번 갔었다. 그러다가 제안대군(大君)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은 뒤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는데, 노래를 잘해서 입술을 움직이지 않아도 소리가 맑아서 들을 만하였으며, 나이는 30여 세였는데도 얼굴은 16세의 아이와 같았다. 왕이 듣고 기뻐하여 드디어 궁중으로 맞아들였는데, 이로부터 총애함이 날로 융성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따랐고, 숙원(淑媛)으로 봉했다.

- 연산군일기 1502년(연산군 8) 11월 25일

연산군이 제안대군(예종의 아들)의 집에 놀러갔다가 장녹수의 노래를 듣고 크게 기뻐하여, 흥청(興淸)이라는 기생으로 발탁하여 궁궐로 맞아들였고, 왕의 총애가 날로 깊어져 마침내 후궁의 반열에 오르며 숙원으로 봉해졌다는 것이다. 연산군 시대의 신데렐라였다고나 할까?

일설에는 장녹수의 얼굴은 그리 빼어난 미모는 아니었으나, 남자를 구스르는 재주와 요사스런 교태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연산군이 얼마나 장녹수에게 빠졌는지 《연산군 일기》에 장녹수가 『왕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했고, 왕에게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그녀는 연산군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해도 그다지 질투를 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친이나 사대부 부인들을 농락하는 것을 즐겨 도와주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연산군의 음란한 생활과 비뚤어진 욕망을 부추기며 자신의 욕망을 채워나갔던 것이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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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승평부부인 박씨

■ 비운의 승평부부인 박씨

■ 비운의 승평부부인 박씨

승평부부인 박씨는 월산대군(죽은 의경세자의 큰아들, 성종의 형)의 부인으로 연산군에게는 큰어머니이다. 예종이 어린 아들만을 남기고 갑자기 죽자, 세조의 장손인 남편 월산대군에게 왕이 될 찬스가 오기는 했다. 하지만, 궁중의 실세이던 한명회와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시동생인 성종이 왕이 되는 바람에 왕비가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서른네 살 되던 해에 자녀도 없이 남편인 월산대군과 사별하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된 박씨는 자신의 넷째 여동생이 여덟 살 된 딸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린 조카딸을 데려다 길렀다. 또한, 연산군 5년(1499년)에는 연산군의 부탁으로 왕의 세 살 된 큰아들도 맡아서 기르기 시작했다. 당시 마흔다섯 살이던 박씨는 비록 자기 자식은 아니지만 여동생의 딸과 연산군의 큰아들을 정성을 다해 키우며 나름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연산군 9년(1503년) 일곱 살이 된 왕자는 세자로 책봉되어 궁궐로 돌아갔다. 박씨는 세 살부터 일곱 살까지 4년을 직접 키운 연산군의 큰아들에게 정이 많이 들어,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궁으로 찾아가곤 했다. 그때마다 연산군은 입궁한 큰어머니 박씨에게 큰아들을 키워준 보답으로 곡식과 일용품을 하사하곤 했다. 어떤 때는 박씨 부인이 궁에서 밤을 새우고 나오는 일도 있다 보니, 연산군과 박씨를 두고 온갖 민망한 소문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박씨의 남동생 박원종이 초고속으로 승진하게 되자 소문은 더더욱 기승을 부렸다. 박씨는 왜 망칙한 추문들을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입궁했을까? 연산군의 큰아들을 기른 정 때문일까? 아니면 점점 광폭해지는 연산군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까? 남동생 박원종의 출세를 위해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박원종은 마흔 살이 되던 해인 연산군 12년(1506년) 6월, 정승급인 숭정대부에 올랐다. 무과 출신의 박원종이 겨우 마흔 살에 초고속으로 승진할 수 있었던 것은 누나 박씨의 도움 덕분임에는 틀림없었다. 숭정대부를 받은 직후 박원종은 자청해서 함경도 관찰사가 되어 한양을 떠났다. 아마도 누나 덕에 승진했다는 소문이 듣기 싫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7월에 박원종은 연산군으로부터 누나 박씨의 병세가 매우 위중하니 속히 한양으로 오라는 명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박원종은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되돌아와 박씨를 간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7월 20일 박씨는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박씨의 죽음을 두고도 온갖 의혹과 추문이 난무했다. 박원종이 누이에게 “왜 그렇게 삽니까? 약이라도 먹고 죽으세요.” 라고 모질게 말했다는 기록도 있고, 박씨 부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 박씨는 월산대군과의 사이에도 자녀가 없었고, 박씨가 사망할 때 나이가 52세 정도인데, 이 나이의 여성이 과연 잉태할 수가 있었을까? 아무튼 박씨의 죽음과 관련된 의혹을 규명할 방법은 없고, 박씨 부인은 역사에 오명(汚名)을 남긴 비운의 여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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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 부인 신씨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 부인 신씨 3편

■ 연산군의 여인들 거창군 부인 신씨 3편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연산군 내외는 폐왕(廢王)이 되고 폐비(廢妃)가 되었지만, 욕은 남편과 남편의 애인 장녹수가 다 먹고 거창군부인 신씨는 별다른 비난이나 욕을 먹지 않았다. 죽음을 당할 처지임에도 그녀를 죽이라는 사람들이 없었고, 중종은 그녀를 빈(嬪)의 예로 대하게 하였다. 그녀는 중종의 배려로 1521년(중종 16) 11월에 속공(屬公)한 죄인 안처겸(安處謙)의 집을 받았다. 또 중종반정 이후 신씨 집안의 노비들은 그녀를 떠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녀가 착하고 선한 인품이었기 때문이다. 폐비(廢妃)된 후 중종은 그녀에게 한다.

일반적으로 폐왕이나 폐비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것과 달리 왕비 시절 온화한 성품으로 윗전에는 공손하고 궁인들에게는 자애롭고 덕이 있는 왕비로서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큰 모욕을 당하지도 않고 편안한(?) 삶을 살며 여생을 마칠 수 있었다. 물론 반정공신들 때문에 자식들은 다 죽거나 삶이 험해졌으니 편안한 여생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다. 어미의 심정으로는........

우이 계곡 입구에서 방학 사거리 방향으로 따라가면 고개를 넘어서기 전 좌측에 연산군 묘가 위치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재실이 자리 잡고 있다. 묘역에는 총 5기의 묘가 있는데, 최상단에 있는 2기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이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의 묘는 대군의 예에 의해 조성되어 묘표 2기, 혼유석 2기, 상석 2기, 향로석, 망주석, 문인석 2쌍, 장명등 2기 등을 갖추고 있다. 묘표에는 각각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 ‘거창신씨지묘(居昌愼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최하단에는 연산군의 딸 휘순 공주와 사위 구문경(具文璟)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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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죽음을 앞두고 부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죽을 때가 되니 제정신이 돌아와 ‘조강지처’가 그리웠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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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6년 11월 8일 연산군이 역질로 사망하자 강화도 교동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1512년(중종 7년) 왕에게 이장(移葬)하기를 청하였으며, 중종은 이를 허락하고 왕자의 예로 정중히 개장하도록 하였다. 1512년 신씨가 연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해 달라고 요청한 이유는 이곳이 거창군부인 신씨의 외할아버지인 임영 대군의 땅이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실제 인근에 임영대군파 오산군 묘역이 조성되어 있기도 하다. 연산군이 죽고 난 후 그의 신주를 직접 모신 것으로 추정되며, 중종에게 자기가 죽으면 자신을 연산군 옆에다 묻어달라는 요청을 한다. 1537년(중종 32) 신씨가 사망하자 중종은 연향(宴享)을 미루고 왕후(王后)의 고비(考妣)의 예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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