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1일 목요일

선조宣祖 2편

■선조宣祖 2편

■선조(宣祖) 2편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명종은 창빈 안씨의 소생 3명의 아들을 불러 놓고 익선관(翼善冠)을 벗어 써보라고 하였다. 하성군(훗날 선조)의 두 형은 차례대로 익선관을 써 보는데, 막내인 하성군(河城君)은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명종이 그 연유를 물으니 "임금님이 쓰시는 것을 어찌 감히 신하가 쓸 수 있겠습니까?" 아직 어린 막내지만 하성군(河城君)의 기지(機智)가 남다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명종이 "임금과 아버지 중에 누가 더 중요한가?"라고 물으니, 하성군(河城君)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임금과 아버지는 다르지만, 충(忠)과 효(孝)는 본래 하나입니다“ 명종의 입장에서 보면 어린 하성군(河城君)이 참으로 기특하고 예뻤을 것이다.

선조(宣祖)는 조선 27명의 왕 중에서 4번째로 재위기간이 긴 왕이었다. 영조는 약 52년, 숙종은 약 46년, 고종은 약 44년, 선조는 약 41년이다. 선조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왕이지만, 그는 업적이 뛰어나지도 않았고, 조선 왕조사에서 가장 참혹한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인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시기이다. 또 조선 역사상 최대의 옥사가 벌어져 아까운 선비 1,000여명이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선조(宣祖)는 자신의 치세 때 시작된 당쟁(黨爭)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이후 조선이 당쟁의 폐단으로 멍들게 만들었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현명하게 대처하기는커녕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아직 후사를 정하지 못했던 선조(宣祖)는 국가비상상태를 대비하여 급한 대로 둘째인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 분조(分朝)를 맡겼다. 이때 광해군은 피난을 간 선조를 대신해서 너무 열심히 그 임무를 수행한 탓(?)에 선조(宣祖)의 눈 밖에 나버렸다. 무능하고 방계승통의 콤플렉스를 가진 선조는 똑똑한 광해군을 질투한 듯하다. 명나라도 선조의 무능함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압력을 넣고 있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선조(宣祖)는 잔머리를 굴렸다. 전쟁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양위할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으면서 양위(讓位)선언을 자그마치 10여 차례나 하게 된다.

물론 왕의 진심과는 상관없이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은 양위(讓位)를 거두어줄 것을 수도 없이 진언하여야만 했다. 모두들 왕 앞에 나아가 양위(讓位)를 취소할 때까지 엎드려 통곡까지 하면서 왕을 달래야 하는 한심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물론 그 장소에 광해군도 함께 해야 했다. 불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여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그 중차대한 시점에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상황인가. 선조(宣祖)는 재위 중에 이런 상황을 자그마치 15번이나 연출했다고 한다. 신하들의 충성심을 재확인하고 무능함을 감추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서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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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宣祖 1편

■선조宣祖 1편

■선조(宣祖) 1편

조선 14대 왕 선조(1552~1608년)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를 이끈 군주라는 평가도 있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도성을 버리고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했던 비겁한 군주였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아들 광해군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전쟁 영웅인 이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편협한 군주로 인식되기도 한다.

선조 시대는 사림파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때였다. 중심인물은 이황, 조식, 이이, 이준경, 유성룡, 정철, 윤두수, 이산해, 이원익, 이항복, 이덕형, 신흠, 이수광 등으로 그 뿌리는 사림파였다. 이처럼 쟁쟁한 학자들이 동시에 배출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조 시대는 학문의 진흥과 사림파 학자들의 정치 참여 기반을 조성했다는 긍정적인 요소도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라는 위기에서 보여준 무능함, 동서분당(東西分黨)으로 전개된 당쟁의 시작, 1589년의 기축옥사와 같은 대형 정치 참극의 방관자라는 등 선조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요소가 많다.

선조는 조선 왕실에서 방계(傍系) 출신으로 최초로 왕이 된 인물이다. 방계(傍系)출신 그것도 아홉 번째 서자의 세 번째 아들로 태어나 왕위는 꿈도 꿀 수 없는 처지였다. 이런 방계(傍系) 승통은 선조(宣祖)의 가장 큰 컴플렉스가 되기도 했다. 선조 이균(李鈞)은 중종의 손자로, 아버지 덕흥대원군은 후궁인 창빈 안씨의 소생이고 인종과 명종은 이복형제 사이였다. 선조 이전까지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중종반정과 같은 정변(政變)이 있었지만, 그래도 왕실의 적통에서 왕위가 계승됐다. 그럼 왜 왕실의 방계에서 왕이 나올 수밖에 없었을까?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가 요절(夭折)한 후 적통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적통은 정비나 계비 소생 왕자를 말한다.

그나마 명종이 생전에 미리 후계자를 지목해 둔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중종과 창빈 안씨 소생인 덕흥군의 세 아들 중 하원군과 하릉군을 제치고 세 번째 하성군을 지명했다. 어차피 후궁 출신 왕자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함으로 서열보다는 왕자로서의 자질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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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 우리말 나들이

1. 용 되다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몸은 거대한 뱀처럼 생겼지만 온몸에 비늘이 있고 발도 있다. 머리에 난 뿔은 사슴뿔 같고, 귀는 소처럼 생겼다. 용은 깊은 못이나 호수, 바다 속에 살면서 때때로 하늘에 올라가 바람과 구름을 일으키므로 용은 발로 여의주를 꽉 잡고 있는 형상으로 구름과 함께 그려 진 그림이 많다. 중국의 황허 강 상류에 용문이라는 협곡이 있는데, 이곳에는 물살이 센 폭포가 있다. 잉어가 이 용문의 거센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면 용이 된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데, 워낙 험해서 웬만해서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려움을 견디고 성공하여 크게 출세하는 것을 용이 되는 것에 비유하게 된다.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크게 출세하여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을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한다. 용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이 말은 주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뜻으로 쓰였는데, 옛날에는 과거 급제가 큰 출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은 변변하지 못하던 사람이 아주 훌륭하게 성장하여 놀라움을 표현할 때 주로 쓰인다.

2. 군불과 군것질

‘쓸데없는’의 뜻을 가지고 있는 접두사 ‘군’은 여러 단어에 붙여 쓰이고 있다. ‘군말’은 쓸데없는 말, ‘군살’은 불필요한 살, ‘군침’은 흘려봐야 소용없는 침, ‘군식구’는 없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 식구를 뜻한다. ‘군것질’은 쓸데없는 먹을 것 또는 본래 먹을 것 말고 덧붙여 먹는 것을 뜻한다. ‘군것질’의 ‘질’은 부정적인 행동을 나타내기도 하고 약간 비하의 의도가 담겨있다. 즉, ‘군것질’은 먹지 말라는 것,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는 행위가 된다. 하지만, ‘군불’에서의 쓰임은 좀 다르다. 새벽녘 온돌의 온기가 식을 무렵 잠을 이기며 깨서 다시 장작을 넣어 따뜻하게 지피는 불이니 ‘쓸데없다’ 기 보다는 처음에 지폈던 불에 ‘더하다’ ‘보태다’ 의 의미가 더 크다.

3. 개떡같다

먹을 것이 지금처럼 풍족하지 않았던 시절에 해먹던 음식 중에 ‘개떡’이라는 게 있다. 개떡은 밀가루를 곱게 채치고 남은 찌꺼기나 메밀 속껍질로 만들었다. 밀가루나 메밀가루도 아니고, 그것을 고르고 난 거친 가루로 만든 것이니 모양이인들 정성 들여 예쁘게 만들 리 없다. 가루로 반죽을 만든 다음 그 반죽을 편평하고 둥글넓적하게 대충 만들어서 쪘는데, 생김새만 못생긴 것이 아니라 맛도 별로 없었다.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먹는 것이다. 그래서 못생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개떡 같다’고 하는 것이다. 이 음식을 왜 개떡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이 있다. 하나는 겨로 만든 떡이라서 ‘겨떡’이라고 하다가 차츰 소리가 변해서 ‘개떡’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변변치 못하다는 뜻을 가진 접두사 ‘개-’가 붙었다는 설(說)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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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의녀 장덕 2편

■ 제주 의녀 장덕 2편

■ 제주 의녀 장덕 2편

세종은 각 도(道)의 관노 2명씩 뽑아 서울에서 의녀와 함께 의술을 익히게 한 다음, 의술에 능숙한 자를 다시 출신지로 돌려보내 그곳 부녀의 질병을 치료토록 했다. 반면 장덕은 제주에서 여의사로서 명성이 자자해지자 그 소문을 중앙정부가 듣고 의녀로 발탁한 경우였다. 장덕은 의녀제도를 통해 의술을 익혀 국가공인의 의녀(醫女)가 됐던 것이 아니고, 이미 의술이 뛰어난 제주의 여의사로서 중앙정부의 부름을 받고 중앙 의료계에 진출한 것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충치로 고통 받은 임금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성종실록》에 보면 『제주도 의녀 장덕(張德)이 치충(齒蟲)을 잘 잡아내고 코와 눈병을 잘 고치니….』라는 말이 전한다. 또한, 우승지(右丞旨) 권경희(權景禧)의 말에 의하면 장덕은 치아의 벌레 제거술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코와 눈에 나는 종기도 잘 제거했다고 한다. 장덕은 중앙정부의 의료계에서 피부과 관련 의술도 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의술 수준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음도 드러난다. 이후 장덕은 치과 분야에서는 남·여를 불문하고, 대체불가의 명의로서 활동했다.

이렇게 된 데는 제주의 의술이 제주 내에서 계속적으로 도제(徒弟)식으로 전수됐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이는 장덕의 경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장덕이 죽고 난 뒤 치통으로 고통 받고 있던 성종은 장덕을 대신할 의사를 제주에서 찾고자 애썼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제주 출신의 ‘귀금(貴今)’이 성종 23년(1492년)에 혜민서의 의녀로 발탁되었다. 귀금은 장덕에게 의술을 전수받았던 의녀였다. 장덕은 자신도 제주의 여의사 가씨로부터 의술을 전수받았듯이 자신이 갖고 있는 온갖 의술을 그녀의 여종 귀금에게 전수해 줬던 것이다. 귀금은 일곱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해 열여섯이 되어서야 장덕의 의술을 완전히 교습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귀금은 면천과 함께 혜민서의 의녀가 됨으로써 두 번째 제주출신 국가공인 의녀가 되었고, 제주출신 의녀가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병증 치료에 뛰어났던 전통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귀금은 장덕의 의술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륙의 《청파극담》의 기록을 보면, 장덕이 자신의 의술을 그녀의 여종 가운데 ‘옥매(玉梅)’에게도 전수하여 옥매가 혜민서의 의녀로 들어가게 됐다고 한다. 기록상으로는 장덕의 의술이 마치 귀금과 옥매 두 명의 여종에게 전수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귀금과 옥매는 동일 인물이다. 즉, ‘옥매’는 장덕의 여종으로 지낼 때의 이름이고, 그녀가 장덕의 의술을 교습 받고 면천과 동시에 혜민서의 의녀가 됨에 따라 이름도 ‘귀금’으로 고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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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의녀 장덕 1편

■ 제주 의녀 장덕 1편

■ 제주 의녀 장덕 1편

조선시대 의녀(醫女)로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당연히 ‘장금’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장금이 관비로 제주에 내려갔을 때 제주출신 의녀 장덕과 인연을 맺은 뒤 그녀로부터 여러 가르침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왔었다. 이 때문에 장덕의 존재와 그 능력이 널리 알려지기는 했으나, 장금이 장덕과 인연을 맺고 의술을 전수받았다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를 위한 허구로 보여 진다. 장덕은 세종 말엽에 궁궐에 들어가 성종 19년(1488년)경 까지 활동하였고, 장금은 중종 10년(1515년)이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보아 두 의녀가 만나기에는 시간적 한계가 있다.

세종 이후 의녀제도가 체계화되면서 의술의 정밀도에 따라 초학의(初學醫)·간병의(看病醫)·내의(內醫)의 3등급으로 분류됐고, 침의녀(鍼醫女)·맥의녀(脈醫女)·약의녀(藥醫女)와 같은 직능상의 분화도 이루어졌다. 더욱이 의서를 배우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의녀들에게 문자 교육을 강화하고, 의료전문인으로 양성하기 위해 의학교육도 심화했다. 그 내용은 실용적이고 쉽게 익혀서 사용 가능한 임상지식과 산부인과에 중점을 둬 이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녀의 의학교육은 독자적 전문 의료인이라기보다는 유교사회의 특성상 필요에 의해 남성 의사의 보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천민 신분으로 의료뿐 아니라 수사관, 검시관, 기생 등 다양한 분야에서 멀티엔터테이너로 활약했어야 했다.

전통적으로 제주 의녀는 전국의 다른 곳에 비해 치과·안과·이비인후과의 치료에 뛰어났던 것 같다. 당시 지금의 중국 상하이, 일본의 후쿠오카, 그리고 우리나라의 제주도 사이에 삼각무역이 이뤄졌던 것을 감안하면, 제주도에는 이미 치아를 치료하는 기술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하여 장덕은 제주에서 전통적으로 전수되어 오던 의술을 도제(徒弟)식으로 철저히 전수받아 치충 제거에 탁월했던 한편, 코와 눈 등의 부스럼을 제거하는 의술에도 뛰어났던 의녀이다. 그녀는 주로 치과 관련 의술을 궁궐에서 펼치던 중 성종 19년(1488년) 경에 세상을 떠났다. 장덕 사후 중앙정부에서 그녀의 부재에 대해 대책을 강구할 정도로 존재감이 큰 여의였다. 치통을 앓아오던 성종은 장덕의 의술에 비견할만한 의료 능력을 가진 의사가 없다며, 이·눈·귀의 아픈 곳에서 벌레를 잘 제거하는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알리라는 내용의 문건을 속달로 제주목사에게 보냈을 정도이다.

이륙의 《청파극담》에 의하면, 장덕은 제주의 여비(女婢)였고, 가씨로부터 의술을 배웠다고 한다. 가씨는 치충(齒虫), 곧 치아의 벌레를 제거하는 의술에 탁월했던 제주의 여의사였다. 그런 만큼 장덕도 치통 치료에 뛰어났던 것이다. 장덕이 치과 관련 의술에 탁월했음은 그녀가 국왕의 치통 때문에 대궐로 들어가게 됐다는 ‘청파극담’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여기에는 장덕이 대궐에서 행한 치료가 효험이 있었다는 사실도 나온다. 그녀는 혜민서(惠民署) 소속의 여의(女醫)가 됨으로써 제주출신 첫 국가공인 의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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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 조선 남성들의 패션아이템, 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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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일상적인 삶을 빼앗기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외치고 있을때,, 패션업계에서 내놓은 ‘사회적 거리두기’ 아이템으로 챙이 1m에 이르는 큰 갓을 쓴 모델들의 사진이 등장하기도 했었다. ‘K-갓’이다. 한류의 영향으로 지구 반대편 국가에 우리나라의 드라마와 사극이 소개되면서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졌다. 특히 최근,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킹덤이 인기를 끌면서 갓을 처음 본 외국인들이 원더풀을 외치며 ‘한국모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갓은 언제부터 쓰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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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벽화나 신라 금령총 출토 유물 등을 볼 때, 우리나라에선 삼국시대부터 갓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시대를 거치면서 모양이나 재료가 달라지거나 변화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 우리가 사극에서 흔히 보는 검은 갓의 형태가 정착되게 되었다. 머리를 덮는 부분을 모자(帽子), 햇볕을 가리고 비바람을 피하기 위한 차양 부분을 양태(凉太)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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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공민왕 6년인 1357년에 문무백관(文武百官)에게 갓을 쓰도록 해서 갓이 신분이나 관직을 나타내는 사회적 표시가 되었다. 그러므로 조선 초에는 궁궐에 출입하는 관리는 모두 갓을 쓰고 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앉은 임금이 신하들을 내려다보면 아마 얼굴은 보이지 않고 모자만 보였을 듯하다. 1417년 12월 20일 태종은 "조로(朝路·여러 신하가 조회를 위해 오가던 길)에 비나 눈이 오는 날이 아닌데도 모든 관리가 갓을 쓰고 있어 불편하다"고 심기를 토로했다. 그래서 다음해부터 조정에서는 사모(紗帽)만 쓰게 했는데, 모자만 있고 차양이 없는 요즘 전통혼례에서 신랑이 쓰는 모자의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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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갓은 궁궐 밖 일상생활에서 양반 남성들이 쓰는 조선의 모자가 되었다. 우선 머리털을 정수리 위로 끌어올려 상투를 튼 다음, 앞 머리카락을 걷어 올려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하는 그물 모양의 망건을 두르고, 다시 속 모자인 탕건을 쓴다. 집 안에선 이 ‘탕건’ 상태로 있다가 외출할 때는 그 위에 갓을 쓰고 나가게 된다.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갓 모양은 다 똑같았을까? 그렇지 않다. 15세기 성종 때만 해도 모자 부분이 둥글어 스님 모자 같다는 말이 나왔다. 연산군 때 이 부분에 모서리가 생겼고, 중종 말기에 이르면 영국 신사들이 쓰는 모자처럼 높이가 높아졌다가 명종 때엔 모자 부분이 다시 낮아지고 차양 부분인 ‘양태’가 넓어졌다. 이후로도 여러 차례 변화를 겪은 뒤 순조 말기엔 양 어깨를 완전히 덮을 만큼 양태가 넓어졌는데, 고종 때 흥선대원군이 개혁 정책의 하나로 갓 폭을 줄이도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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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고종 32년)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斷髮令)과 함께 갓은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갓은 상투를 튼 머리에 최적화된 모자였기 때문에, 새로운 서양식 헤어스타일에는 아무래도 신식 모자가 어울렸던 것이다. 갓의 재료는 말의 갈기나 꼬리털인 말총이었다. 고려 말에 말을 키우는 목장이 늘어나면서 가볍고 질긴 말총이 갓의 표준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질 좋은 말총으로 제대로 만들어진 갓은 매우 가볍고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워 선비의 기품을 드러날 수 있게 하는 조선시대 남성들의 패션 아이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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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 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 창의적 난방장치, 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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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놀랍도록 인상적으로 받아들이는 한국문화 중의 하나가 온돌이라고 한다. 온돌(溫突)은 한자를 그대로 풀어 해석해 보면 따뜻한溫 굴뚝突이라는 뜻이다. 우리말로는 ‘구들’이라고도 하는데, 방바닥을 뜨끈하게 만드는 우리나라 특유의 난방장치를 말한다. 과거에 비해 주거형태가 대부분 아파트로 바뀌었고, 나무를 때던 재료가 기름이나 가스 등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지만, 방바닥을 데워서 따뜻하게 하는 온돌의 기본적인 난방 방식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뜨거운 불기운이 고래라고 부르는 방바닥 밑의 공기 통로를 타고 이동하면서 방바닥인 구들장을 달구게 하는 방식이다. 서양의 벽난로는 위로 빼놓은 높은 굴뚝으로 연기를 바로 내보내지만, 온돌은 불을 눕혀 방바닥 밑으로 흐르게 하면서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집을 따뜻하게 하고, 방 내부에 연기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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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온돌을 개발해 사용했을까? 학자들은 온돌이 철기시대 한반도 북부나 중국의 동북부 지방에 살던 사람들이 개발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3세기경부터 원시적 온돌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온돌문화가 2000년 이상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중국 구당서에 『고구려 사람들은 겨울철에는 긴 구덩이를 만들어 밑에서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한다』는 기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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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처음부터 온돌이 계층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고구려 등 북쪽의 추운 지방에서 사용하다가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점차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고구려를 거쳐 백제와 신라로 전해졌고, 고려와 조선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지금처럼 방 전체에 구들장을 놓은 것이 아니라, 일부 공간만을 온돌방으로 꾸몄다. 집의 일부에만 구들을 설치했다고 해서 쪽구들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태종 17년(1417년) 온돌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데, 성균관 학생이 아픈 경우에 온돌방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온돌방을 지으라는 내용이 있다. 집 전체에 온돌을 설치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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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처럼 구들을 집 전체에 까는 방식은 조선 후기(16~17세기경)부터 널리 퍼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이전의 사극(史劇)을 보면 의자에 앉아 생활하는 장면이 나온다. 17세기 이후 온돌이 널리 퍼지게 되면서 조선은 의자에 앉아서 생활하는 문화에서 방바닥에 앉아 생활하는 좌식 문화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재청은 2018년 온돌문화라는 이름으로 온돌을 국가무형문화재(제135호)로 지정했다. 온돌이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인의 삶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문화재청은 특히 온돌문화를 통해 한반도가 처한 기후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고 대처해온 우리 선조들의 창의성을 높이 평가하고, 중국과 일본 등 주변 국가의 난방 방식과 구별되는 고유한 양식이라는 독자성에도 중요한 의미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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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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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1659년 효종이 죽어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1674년 효종 임금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 문제로 서인과 남인들은 크게 두 차례의 다툼을 벌였다. 이 사건을 궁중 의례나 예절에 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라 하여 예송(禮訟)논쟁이라고 한다. ‘1차 예송논쟁’ 때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들이 세력을 잡았다가, ‘2차 예송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짐으로써 숙종 때는 남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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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과 남인의 세력 다툼이 이어지다가 숙종 때 남인이 권력에서 물러나는 결정적 사건이 벌어졌다. 1680년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허적이 자기 집에서 열린 잔치에 궁중에서 쓰던 천막을 왕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빌려갔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허적은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몇 달 뒤에는 허적의 아들까지 역모를 꾀하였다고 서인에게 고발당했다. 이때 허적을 비롯한 많은 남인들이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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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등 주로 나이든 서인들은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고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은 남인을 너무 강력하게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송시열이 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며 스승을 비판하기도 했다. 결국 서인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나이든 신하들과, 윤증을 비롯한 젊은 신하들이 모인 두 세력으로 나누어졌다. 나이든 세력을 늙을 노(老)를 써서 노론(老論), 젊은 세력을 젊을 소(少)를 써서 소론(少論)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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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붕당은 처음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지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지면서 흔히 ‘사색당파(四色黨派)’라고 한다. 그 뒤 북인은 대북과 소북, 노론은 시파와 벽파 등으로 계속 분파되면서 조선은 당파를 중심으로 정치 대립이 치열하게 이어지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때로는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책을 논하면서 정치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하지만, 당리당략을 일삼고 정권을 잡기 위해 왕위계승과 세자책봉, 왕비간택 등에 까지 깊이 관여하면서 권력 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붕당정치의 폐단은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영조와 정조에 이르러서는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를 펼치려는 탕평책을 펼치기도 했다.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붕당정치朋黨政治 3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3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3편

1589년 정여립이라는 신하가 반란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도망을 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의 편에 있었다가 나중에 동인의 편에 서서 서인을 비판했던 인물이었다. 정여립 역모 사건의 처리는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맡았는데, 정철은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1591년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인이 힘을 잃자, 반대로 동인들은 힘을 얻게 되었다. 정철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동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나뉘게 되었다.

동인 중 이산해와 이발 등은 "정철을 죽이고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폈고, 유성룡과 우성전 등은 "정철은 유배 보내고 서인들 중에서도 인재는 조정에 등용해야 한다"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주장을 폈다. 이 일로 인해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산해와 이발을 따르는 강경파들을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이었고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다. 온건한 주장을 했던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인과 남인은 학파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었다. 원래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출신들인데, 북인은 그중에서도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었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었다. 결국 정철은 온건한 남인들의 주장대로 유배형으로 결론이 났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북인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다. 북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정철을 비판하고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었는데 어떻게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을까? 북인 중에는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사람(소북파)도 있었지만 광해군을 지지한 사람(대북파)도 있었다. 광해군은 북인(그 중에서도 대북파)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1623년에 서인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능양군이 왕이 되면서 다시 세력의 중심은 서인에게 넘어갔다. 이 때 남인들은 서인들과 뜻을 함께했다.

-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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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朋黨政治 2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2편

■ 붕당정치(朋黨政治) 2편

사림파가 주류를 이루게 되는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는 붕당정치로 흐르니, 그 시초가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동서분당(東西分黨)이다. 사림들은 네 번의 사화(士禍)를 겪으면서 풍비박산이 난 후 어렵게 조정 권력을 장악했으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이 나누이게 되었고, 이러한 붕당정치는 이후 조선 정치의 큰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당(黨)이란 정치적 견해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자 조직한 단체를 말한다. 오늘날 여러 정당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듯, 조선시대에도 붕당(朋黨·학맥과 사상, 정치적 견해차에 따라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이 나누이게 되었다.

즉, 붕당정치는 요즘 시대로 말하면 정당정치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당과 야당이 서로 정책을 논하고 상대를 견제하면서 국민들을 위해서 싸운다면 정당정치는 민주정치의 기본이고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라와 백성은 뒷전이고 눈앞의 당리당략(黨利黨略)을 위해서 서로 대립하고 싸우는 붕당의 폐단은 조선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백성들의 실제적 삶과 별 상관도 없고 구체적 대책도 없는 쓸데없는 학문적 논쟁을 일삼기 일쑤였다.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방은 허술하기 짝이 없는데,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니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니 하는 논쟁에 목숨을 걸고 다투기도 하였다.

선조 7년, 관리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으며 높은 관직으로 가는 출세가도의 요직(要職) 중의 요직인 ‘이조(吏曹) 전랑’ 자리가 비게 되자, 젊은 사류(士類) 중 명망이 높은 김효원이 추천되었으나, 당시 대선비로 평판이 좋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훈구파이자 간신이었던 윤원형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선조는 심의겸의 상소를 받아들여 김효원을 다른 자리로 보냈고, 김효원은 2년 뒤에나 ‘이조 전랑’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김효원은 심의겸에게 독을 품으며 차근차근 세력을 키웠다.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후임자로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거론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비 집안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면 권력이 집중된다.”며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왕비가 심의겸·심충겸의 집안 출신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김효원을 지지 하는 측과 심의겸을 지지하는 측이 서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는데,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낙산 건천방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동인(東人)이라 하고,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인 정릉동에 있다고 해서 서인(西人)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것이 동서분당(東西分黨)의 시작이다.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김종직·이황·조식의 제자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출신이었고,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은 대개 이이·성혼의 제자로 이루어진 기호학파 출신이었다. 붕당 사이의 비판과 견제는 공론(公論)을 형성할 때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지나친 당파 싸움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 3편에 계속

♣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