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31일 일요일

응시호보鷹視虎步 - 매의 눈빛과 범의 걸음걸이, 흉악한 사람의 외모

응시호보鷹視虎步 - 매의 눈빛과 범의 걸음걸이, 흉악한 사람의 외모

응시호보(鷹視虎步) - 매의 눈빛과 범의 걸음걸이, 흉악한 사람의 외모

매 응(鳥/13) 볼 시(見/5) 범 호(虍/2) 걸음 보(止/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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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다. 처음 만났을 때 느끼게 되는 얼굴의 생김새 人相(인상)은 3초 만에 인식이 완료돼 오랫동안 간다고 해서 콘크리트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첫 印象(인상)을 결정짓는 중요 요인은 아무래도 외모가 첫손으로 꼽히고 목소리와 어휘 등이 뒤따른다고 한다. ‘사람은 얼굴보다 마음이 고와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처음 만나면서 마음을 볼 수 없으니 아무래도 첫 인상은 먼저 보이는 용모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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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이 용의 얼굴과 호랑이의 눈썹을 가진 龍顔虎眉(용안호미)로 느낀다면 엄숙함에 위압을 느낀다. 용처럼 날뛰고 범처럼 걷는다는 龍驤虎步(용양호보)의 인상을 주었다면 용맹스런 영웅의 모습을 연상한다. 그런데 상상의 용은 보지 못했으니 상상이겠고, 매와 같은 눈빛(鷹視)에 호랑이 같은 걸음걸이(虎步)라면 날카로운 매가 연상되니 흉악한 사람의 외모를 형용하는 말이 된다. 매 눈초리에 이리의 걸음 鷹視狼步(응시낭보)라 해도 같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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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時代(춘추시대) 楚(초)나라의 간신 費無忌(비무기)의 모함으로 부친을 잃은 伍子胥(오자서)는 吳(오)나라 闔閭(합려)의 휘하로 망명했다. 얼마 뒤 같은 처지의 伯嚭(백비, 嚭는 클 비)도 귀순해 오자 오자서는 연회를 베풀고 환대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있던 被離(피리)라는 대부가 오자서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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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비는 눈길이 매와 같고 범과 같이 걸으니, 필시 살인을 저지를 나쁜 상(鷹視虎步 專功擅殺之性/ 응시호보 전공천살지성)’이라며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다. 擅은 멋대로할 천. 오자서는 백비와 같은 원한을 지녔기 때문이라며 충고를 듣지 않았다. 결국 越(월)나라와 내통한 백비에 의해 오자서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했다. 後漢(후한)의 趙曄(조엽)이 쓴 ‘吳越春秋(오월춘추)’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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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가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첫 인상을 위해 들이는 노력은 눈물겹다. 처음 각인된 잘못된 인상을 바로 잡는 데는 200배의 정보량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취업을 할 때 남녀를 불문하고 성형을 한다고 하고, 정치인들이 출마를 할 때 유권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등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사람의 얼굴은 열두 번 변한다’고 하니 변하지 않게 마음을 닦는 것이 우선해야 하지 않을까.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압승득길壓勝得吉 - 재앙을 없애고 해로운 기운을 제압해 눌러 길함을 얻다.

압승득길壓勝得吉 - 재앙을 없애고 해로운 기운을 제압해 눌러 길함을 얻다.

압승득길(壓勝得吉) - 재앙을 없애고 해로운 기운을 제압해 눌러 길함을 얻다.

누를 압(土/14) 이길 승(力/10) 얻을 득(彳/8) 길할 길(口/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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壓勝(압승)은 글자대로 경쟁하는 상대에 크게 이기는 것을 말하는데 다른 의외의 뜻이 있다. 지나치거나 모자라는 것을 누르고 채우는 裨補(비보)의 한 방법이다. 인간에 부닥치는 여러 문제들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할 수 없을 때 신령의 힘을 빌거나 呪術(주술)에 의존하게 된다. 주술에 의하는 것은 글자가 비슷한 厭勝(염승)과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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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강한 힘을 억누르기 위해 갖가지 符籍(부적)이나 인형을 사용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주 옛날부터 있어 왔다. 재앙을 없애고 해로운 기운을 제압해 자신의 운이 좋고 상서로움을 꾀하는(得吉) 행위가 상대방의 숨통을 누르는 咀呪(저주)의 목적으로도 악용돼 더 의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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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3000년도 더 이상의 姜太公(강태공)이 먼저 등장하여 흥미롭다. 周(주)나라 武王(무왕)이 殷(은)의 폭군 紂王(주왕)을 내쫓을 때 천하가 귀순했는데 丁侯(정후)만 승복하지 않았다. 무왕을 돕던 강태공이 정후의 상을 그린 뒤 화살을 쏘자 병이 났고 그것을 뽑으니 나아 복속했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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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신)을 세웠던 王莽(왕망)은 구리 다섯 섬으로 만든 威斗(위두)를 염승으로 썼다는 ‘漢書(한서)’의 기록이 있다. 서양에선 중미 카리브해의 나라 아이티(Haïti)에서 서아프리카 토착 신앙이 변형된 부두(Voodoo)가 대표한다. 누더기로 대충 꿰매 만든 조잡한 인형을 바늘로 찔러 저주 대상을 괴롭히고, 주술에 의해 움직이는 시체 좀비(Zombie)도 부두교 전설에서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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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염승의 역사가 다양하고 깊다. 전통 건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 장식 기와인 鴟尾(치미, 鴟는 올빼미 치)는 화재 방지를 위한 것이었다. 宋(송)나라 徐兢(서긍)이 사신으로 왔을 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高麗圖經(고려도경)’에는 당시 사람들의 압승 의식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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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이라도 병이 들면 저주와 염승을 할 따름이라 하고, 뱃사람들이 안전을 위해 나무로 깎은 작은 배를 만들어 불경과 말린 양식을 싣고 배에 탄 사람의 성명을 써서 넣은 뒤 바다에 던졌다고 했다. 민간에선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제웅은 안에 돈이나 쌀을 넣어 길가에 버림으로써 액막이를 하거나 병을 낫게 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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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에 하늘이나 민간신앙에 의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기적으로 행해진 범죄도 많았다. 특히 조선의 궁중에서는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비빈 궁녀들의 염승 암투가 사극의 단골소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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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成宗(성종)의 계비 尹氏(윤씨)는 다른 비빈들이 염승한다고 모함하다 되레 폐비가 됐고 처절한 甲子士禍(갑자사화)의 원인이 됐다. 乾坤一擲(건곤일척)의 일전에서 상대방을 정당한 방법으로 이겨 압승하면 두고두고 기림을 받는다. 온갖 승부조작을 하고 나쁜 모략을 써서 이긴다면 아무리 압승을 해도 언제든지 드러나 영원히 지탄을 받는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자고영웅진해시自古英雄盡解詩 - 예로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

자고영웅진해시自古英雄盡解詩 - 예로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

자고영웅진해시(自古英雄盡解詩) - 예로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

스스로 자(自/0) 예 고(口/2) 꽃부리 영(艹/5) 수컷 웅(隹/4) 다할 진(皿/9) 풀 해(角/6) 시 시(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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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漢(한)나라를 세운 高祖(고조) 劉邦(유방)은 처음 별 볼 일없는 사람이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가업을 돌보지도 않고 시시껄렁한 불량배와 어울려 다녔다. 그래도 의협심은 남달라 陳勝(진승)의 난 때 호응해 기반을 닦고, 힘이 산을 뽑는 項羽(항우)와 겨뤄 마침내 천하를 손아귀에 넣었다. 유방이 예상외의 통일을 이루게 된 것은 그가 밝힌 대로 漢興三傑(한흥삼걸)로 불리는 張良(장량), 蕭何(소하), 韓信(한신) 등 명신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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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당)나라의 시인 林寬(임관)은 유방과 관계 깊은 시 ‘歌風臺(가풍대)’에서 그를 높이 치하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하지 말라(莫言馬上得天下/ 막언마상득천하), 예부터 영웅들은 모두 시를 알았다네(自古英雄盡解詩/ 자고영웅진해시).’ 가풍대와 馬上天下(마상천하)의 유래를 간단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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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은 항우를 물리칠 때 큰 도움을 줬던 英布(영포)가 통일 후 반란을 일으키자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진압했다. 돌아가는 길에 고향인 沛縣(패현)에 들러 주연을 베풀고 그 자리에서 大風歌(대풍가)를 읊었다. 후세 사람들이 이 곳에 누대를 짓고 가풍대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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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방은 자신의 배움이 짧은데다 장광설만 늘어놓는다며 선비들을 무척 싫어했다. 지모가 뛰어난 酈食其(역이기, 酈은 땅이름 역)를 처음 만날 때 두 여인에게 발을 씻기는 무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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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설에 능한 陸賈(육가)가 자신에게 진언을 할 때 옛 고전을 들먹이는 것을 보고 아니꼬워 자신은 말의 등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고 했다. 그래도 잘 참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 후일 임관은 가풍대를 지나면서 시를 지어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시도 이해하는 문무의 겸비라고 높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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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으로서 문학에도 큰 족적을 남긴 사람으로는 魏(위)나라의 曹操(조조), 曹丕(조비) 부자가 있고 南唐(남당)의 後主(후주) 李煜(이욱)이 있다. 영웅으로 치면 우리의 忠武公(충무공) 李舜臣(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섬멸하면서 남긴 亂中日記(난중일기)가 첫 손에 꼽힐 만하다. 예로부터 영웅은 모두 시를 알았다는 것은 무력뿐만이 아닌 문장에도 뛰어났다는 이야기다. 文(문)은 어디서나 필요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벌부당죄罰不當罪 - 형벌이 지은 죄에 비해 합당하지 않다.

벌부당죄罰不當罪 - 형벌이 지은 죄에 비해 합당하지 않다.

벌부당죄(罰不當罪) - 형벌이 지은 죄에 비해 합당하지 않다.

벌할 벌(网/9) 아닐 불, 부(一/3) 마땅 당(田/8) 허물 죄(网/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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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을 저지르거나 죄를 지었으면 그에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죄인에게 벌을 주는 罰(벌)이란 글자를 분해하면 얼굴을 그물살 罒(망)처럼 찌푸리고 말로 꾸짖는 詈(리) 옆에 위엄을 보이는 칼 刀(도)가 있다. 그만큼 죄의 경중에 따라 공정하게 벌이 시행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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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지은 데로 가고 덕은 닦은 데로 간다’는 말을 누구나 믿으면 좋으련만 같은 죄를 저지르면서 자신은 별 것 아니고 남의 행위는 용서 못할 중죄라 여긴다. 하지만 ‘죄는 막둥이가 짓고 벼락은 샌님이 맞는다’는 말대로 나쁜 짓을 하고 이익을 차지하는 사람과 벌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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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罰)이 지은 죄에 비해 합당하지 않다(不當罪)면 승복할 사람이 없이 불만만 쌓인다. 예의로써 사람의 성질을 교정해야 한다며 性惡說(성악설)을 주창한 荀况(순황)은 그의 사상을 모은 ‘荀子(순자)’에서 이에 관해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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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벌을 가하는 본래의 뜻은 ‘난폭한 것을 금하고 악을 미워하며, 앞날을 경계하자는 것(禁暴惡惡 且懲其未/ 금폭오악 차징기미)‘인데 살인 등 중죄를 저지른 범인을 가볍게 처벌한다면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라 주장한다. 正論(정론)편에 모든 작위와 상벌 등은 모두 선악에 대한 보수이며 응분의 결과인데 그것이 합당하지 않으면 국가 혼란의 발단이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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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성어의 부분이 이어진다. ‘무릇 덕행이 작위에 맞지 않고, 능력이 관직에 맞지 않으며(夫德不稱位 能不稱官/ 부덕불칭위 능불칭관), 포상이 공적에 적당하지 않고, 형벌이 범죄에 합당하지 않으면(賞不當功 罰不當罪/ 상부당공 벌부당죄)’ 이보다 더 큰 불상사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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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淸(청)에 대해 대표적 척화신이었던 金尙憲(김상헌, 1570~1652)은 이 말을 넣어 명언을 남겼다. ‘벌이 죄에 합당하지 않은 일치고 잘못 아닌 것이 없습니다(罰不當罪 何事非尤/ 벌부당죄 하사비우)’라며 임금께 바른 말을 올렸다가 귀양 간 언관을 변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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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일반 사람들은 지은 죄에 맞는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죽을죄라도 저지르기 전에 무섭지 저지른 후에는 겁이 없어져 배짱인 사람은 대체로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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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법 불평등의 대표적 성어가 된 無錢有罪(무전유죄)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기서 파생된 有權無罪(유권무죄)도 부당의 대표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선량한 국민들은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錢可通神(전가통신)보다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恢는 넓을 회)란 말을 기대한다.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 보이지만 그 무엇도 놓치는 일이 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파과지년破瓜之年 - 여자의 나이 16세, 남자의 나이 64세

파과지년破瓜之年 - 여자의 나이 16세, 남자의 나이 64세

파과지년(破瓜之年) - 여자의 나이 16세, 남자의 나이 64세

깨뜨릴 파(石/5) 외 과(瓜/0) 갈 지(丿/3) 해 년(干/3)

오이를 깨뜨렸다는 破瓜(파과)는 오이 瓜(과)글자를 破字(파자)했다는 말이다. 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누는 것이 파자인데 재미있는 글자 학습법으로 많이 사용됐다. 可笑(가소)로운 것을 풀어 丁口竹天(정구죽천)이라 하고, 쌀 米(미)는 八十八(팔십팔)이 되어 米壽(미수)가 88세가 된다는 식이다. 瓜(과)자는 한 가운데를 세로로 나누면 두 개의 八(팔)이 되어 이것도 나이를 나타내는 말이 됐다. 瓜字初分(과자초분)이라고도 하는데 두 개의 팔을 더하면 8 8=16이 되고, 곱하면 8*8=64로 각각 뜻하는 것이 달랐다.\xa0

먼저 16세는 여자의 나이를 말한다. 二八靑春(이팔청춘)이라 하듯이 春香(춘향)과 夢龍(몽룡)이 만난 때도 이 때다. 오이가 여성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어 오이를 깬다는 것은 처음 생리를 한다는 뜻이나 또는 처녀성을 잃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중국 東晋(동진)의 시인 孫綽(손작)이 ‘情人碧玉歌(정인벽옥가)’에서 이런 뜻으로 처음 썼다는데 앞부분만 보자. ‘푸른 구슬이 오이를 깨뜨릴 때, 님은 정으로 나를 덮었네(碧玉破瓜時 郎爲情顚倒/ 벽옥파과시 낭위정전도).’

淸(청)나라 학자 翟灝(적호, 翟은 꿩 적)는 백과사전격인 ‘通俗編(통속편)’에서 점잖게 바로잡는다. ‘풍속에서는 여자가 몸을 망치는 것을 파과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俗以女子破身爲破瓜 非也/ 속이여자파신위파과 비야).’ 瓜(과)자를 깨면 두 개의 八(팔)자가 되어 이는 이팔 십육 세를 말할 뿐이라 했다. 청나라 문인 袁枚(원매)도 시론 隨園詩話(수원시화)에서 같은 주장을 폈다고 한다.

역시 ‘통속편’에 呂巖(여암)이 張泊(장박)에 준 시라고 하면서 ‘공을 이룬 것은 파과년으로 바로 팔팔 64세를 말한다(功成當在破瓜年 則八八六十四歲/ 공성당재파과년 즉팔팔륙십사세)’고 실려 있다. 남자의 경우는 64세를 말한다며 宋(송)나라 祝穆(축목)의 事文類聚(사문유취)에도 기록돼 있다.

남자의 64세보다 여자의 16세에 더 많이 쓴 이 말이 한창 때의 청춘이라 하지만 지금이야 미성년자이다. 중고생이 동급생을 끔찍이 폭행한 사건이 종종 드러났는데 다 자랐다고 어른 행세를 하기 전에 \xa0좀 더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이 필요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망언망청妄言妄聽 - 되는대로 말하고 아무렇게나 듣는다.

망언망청妄言妄聽 - 되는대로 말하고 아무렇게나 듣는다.

망언망청(妄言妄聽) - 되는대로 말하고 아무렇게나 듣는다.

망령될 망(女/3) 말씀 언(言/0) 망령될 망(女/3) 들을 청(耳/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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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 亡(망)이란 글자는 부러진 칼을 뜻했다고 한다. 전장에서 칼이 부러지면 도망가거나 죽을 수밖에 없어 ‘망하다‘는 의미가 생겼다. 여기서 마음이 도망가면 잊을 忘(망)이 되고 시력이 도망가면 눈멀 盲(맹)이 된다. 그런데 망령될 妄(망)에 여자(女/ 녀)가 들어 평등시대에 불만이 많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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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權(부권)이 강했던 고대 중국에서 여자가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 데서 만들어졌단다. 늙거나 정신이 희미해져 사리에 맞지 않게 말하는 妄靈(망령)은 말이 도망간 ’노둔할 吂(망)‘이 따로 있는데 억울할 만하다. 어떻든 사리에 맞지 않고 제멋대로 주저리주저리 하는 妄言(망언)에 진지한 말이라도 진지하게 듣지 않는 妄聽(망청)이면 격에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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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家(도가)의 대표 저작인 莊周(장주)의 ‘莊子(장자)’에서 유래한 성어다. 난해한 구절이 많기로 이름난 齊物論(제물론)편에서 한 측면만을 본 진리는 있을 수 없다며 지식과 논쟁을 부정한다. 孔子(공자)의 제자라고도 하는 가공인물 瞿鵲子(구작자)와 長梧子(장오자)의 문답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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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서 들었다며 구작자가 묻는다. 성인은 세상의 일에 종사하지 않고, 이해관계도 초월하며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으로 여겨 세속 밖에서 노닌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허튼소리라 하고 자신은 도를 실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장오자의 의견이 어떠한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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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오자는 道敎(도교)의 시조 黃帝(황제)도 이해하지 못할 일인데 어찌 알겠느냐며 탄환을 보고서 새 구이를 바라는(見彈求炙/ 견탄구자) 만큼 서두르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말한다. ‘내가 생각나는 대로 말해볼 테니(予嘗爲汝妄言之/ 여상위여망언지), 그대도 되는대로 들으시오(汝以妄聽之奚/ 여이망청지해).’ 이어지는 설명은 되는 대로가 아닌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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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사람은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잘잘못을 가리는데 성인은 우둔하여 만년의 세월을 한순간으로 생각한다며 공자도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도 儒家(유가)에 대해 꼬집는데 임금이니 신하니 하는 생각으로 굳어져 있어 꿈을 꾸는 것조차 모를 것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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劉安(유안)의 ‘淮南子(회남자)’엔 입과 귀만 대충 말하고 듣는 것이 아니고 눈도 조심하라고 더 좋은 말이 나온다. ‘눈으로 아무 것이나 본다면 음심이 생기고(目妄視則淫/ 목망시즉음), 귀로 아무 것이나 들으면 미혹에 빠지며(耳妄聽則惑/ 이망청즉혹), 입으로 마구 지껄이면 화를 입는다(口妄言則亂/ 구망언즉난).’ 主術訓(주술훈)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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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할 때나 들을 때는 진의가 전달되도록 진지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없는 사실을 억지 주장하여 상대방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은 오래도록 상처가 된다. 개인 간에도 그러한데 특히 정치권에선 조심할 일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하동사후河東獅吼 - 하동 땅의 사자가 울부짖다, 성질이 사나운 부인

하동사후河東獅吼 - 하동 땅의 사자가 울부짖다, 성질이 사나운 부인

하동사후(河東獅吼) - 하동 땅의 사자가 울부짖다, 성질이 사나운 부인

물 하(氵/5) 동녘 동(木/4) 사자 사(犭/10) 울부짖을 후(口/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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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 말은 필요하고 꼭 해야 할 경우에는 말을 해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속담처럼 경계하는 말이 많다. 말이 많으면 자주 어려움에 처한다는 多言數窮(다언삭궁, 이 때의 數는 ‘자주 삭‘)에서 입이 온갖 분란을 일으키는 재앙의 문이란 口禍之門(구화지문) 까지 섬뜩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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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옛날의 男尊女卑(남존여비) 영향으로 여자가 말 많은 것을 더 욕했다. ’계집 입 싼 것‘이라며 입이 가볍고 헤픈 여자는 아무 짝에도 쓸데없다고 했고, 부녀자가 떠들썩하게 지껄이는 것을 ’사나운 암캐같이 앙앙하지 마라‘고 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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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울부짖음이란 獅子吼(사자후)는 부처님의 위엄 있는 설법을 가리켰다.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듯 부처님의 위엄을 비유한 것이 열변을 토하는 연설을 가리키게 됐고, 나아가 질투심이 강한 부인이 남편에게 앙칼지게 대드는 악처를 비유하기도 했다. 악다구니하는 여인의 유래로 특별히 河東(하동) 땅의 사자가 운다(獅吼)고 하여 중국 宋(송)나라의 문인 蘇軾(소식, 1037~1101)의 재미있는 시가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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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의 친구로 陳慥(진조, 慥는 착실할 조)라는 사람이 있었다. 禪學(선학)을 공부하며 空(공)과 有(유)에 대해 친구들과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진조의 자가 공처가의 대명사가 된 季常(계상)인 것처럼 그의 부인 하동 柳氏(유씨)는 표독스럽고 투기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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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술자리에서 토론하는 남편에게 옆방에서 욕을 퍼부어 손님들은 좌불안석하다 자리를 피했다. 소식이 시를 지어 진조를 놀렸다. ‘갑자기 하동의 사자 울음소리를 들으니, 지팡이도 손에서 떨어지고 넋은 완전히 나갔네(忽聞河東獅子吼 拄杖落手心茫然/ 홀문하동사자후 주장락수심망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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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조의 처가 처음부터 막무가내였기 보다 남편과 세파에 시달리다 변했을 것이다. 우리의 가요도 있다. 수줍던 아내가 첫 아이 낳더니만 고양이로, 그 다음엔 무서운 호랑이로 변해버렸다는 최희준 원로가수의 ‘엄처시하‘다. 술자리에서 남정네끼리 우스개이기 쉽지만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우가 점차 개선된다고 해도 아직 여성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 있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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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정항례分庭抗禮 - 손님을 마주 보고 대등하게 예의를 갖춰 대하다.

분정항례分庭抗禮 - 손님을 마주 보고 대등하게 예의를 갖춰 대하다.

분정항례(分庭抗禮) - 손님을 마주 보고 대등하게 예의를 갖춰 대하다.

나눌 분(刀/2) 뜰 정(广/7) 겨룰 항(扌/4) 예도 례(示/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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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손님이 방문했을 때 불청객이 아닌 한 격식을 갖춰 공손히 접대하는 것은 기본이다. 신발을 거꾸로 신고 반갑게 맞이했다는 倒屣迎客(도사영객)이나 식사 중에도 열 번이나 일어났다는 一饋十起(일궤십기, 饋는 먹일 궤) 등의 환대는 자기를 도와 줄 귀한 손님이 왔을 때다. 그렇지 않다고 해서 자신은 높은 자리서 맞으며 손님을 아래에 앉게 한다면 예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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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맞으며 대등하게 예의를 지킨다는 성어로 뜰에 마련한 자리를 나눠(分庭) 대등하게 예의를 갖춘다(抗禮)는 것이 있다. 남북으로 나뉜 집안 정원에서 주인은 동쪽, 손님은 서쪽을 이용하는 데서 나왔다고 한다. 分庭伉禮(분정항례, 伉은 짝 항)로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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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子(공자)의 제자 子路(자로)와 子貢(자공)이 성어와 관련, 대조적으로 나와 흥미롭다. 먼저 무뢰한 출신으로 성격이 강직한 자로가 스승을 하대한 어부에게 분개하는 장면이 ‘莊子(장자)’에 나온다. 공자가 식견이 매우 높은 한 어부를 만나 공손하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노를 저어 떠나자 자로가 불만에 찬 소리로 여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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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승의 군주나 천승의 제후라도 스승님을 만날 때에는(萬乘之主 千乘之君 見夫子/ 만승지주 천승지군 견부자), 뜰의 반쪽을 차지하고 대등한 예를 갖췄는데(未嘗不分庭抗禮/ 미상불분정항례)’ 보잘것없는 어부에겐 지나쳤다고 했다. 공자는 자로가 현자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꾸짖었다. 漁夫(어부)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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孔門十哲(공문십철) 중 언어의 자공은 그만큼 말재간이 좋은데다 이재에도 밝았다. ‘史記(사기)’의 貨食(화식) 열전과 ‘漢書(한서)’의 貨殖傳(화식전)에 같이 등장할 만큼 공자의 유교가 후세까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물심양면으로 자공의 기여가 있었다고 평가한다. 자공은 재력을 바탕으로 사두마차에 비단 선물을 가득 싣고 제후들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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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어의 부분을 보자. ‘그가 이르는 곳마다 군주제후를 불문하고, 뜰 양쪽으로 내려서서 예를 표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所至 國君無不分庭與之抗禮/ 소지 국군무불분정여지항례).’ 공자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은 자공의 이러한 재력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고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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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을 주는 중요한 손님은 물론, 장사나 공연에 온 고객 등도 귀하게 대접해야 마땅하다. 손님을 환영하는 집은 망하지 않는다거나 손님을 후대하는 사람은 신을 잘 섬기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손님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떠난 뒤에 뉘우친다(不接賓客去後悔/ 부접빈객거후회)’고 朱子(주자)는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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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주인의 대접을 잘 받았으면 손님도 체면을 잘 차려야 한다. 客反爲主(객반위주)라 하여 나그네가 도리어 주인 노릇한다면 꼴불견을 넘어 쫓겨나도 할 말 없다. 조그만 도움을 준다고 이것저것 요구하는 갑질 손님은 대등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팔두지재八斗之才 – 여덟 말을 차지한 재주, 뛰어난 조식의 글재주

팔두지재八斗之才 – 여덟 말을 차지한 재주, 뛰어난 조식의 글재주

팔두지재(八斗之才) – 여덟 말을 차지한 재주, 뛰어난 조식의 글재주

여덟 팔(八/0) 말 두(斗/0) 갈 지(丿/3) 재주 재(手/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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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잘 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재주다. 어떤 일에 잘 대처하려면 재주가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한 가지씩의 재주는 가지고 있어서 그것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재주는 장에 가도 못 산다’는 속담대로 남보다 뛰어난 재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배우고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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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잘 하기는 어렵다. 맑은 날에는 신발로, 궂은 날에는 나막신으로 쓸 수 있는 온갖 재주를 가진 사람을 履屐俱當(이극구당, 屐은 나막신 극)이라 한다. 이같이 여러 방면에 능통한 사람 八方美人(팔방미인)이란 말이 또한 온갖 일에 조금씩 아는 얼치기라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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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주를 계량화하거나 등위를 매길 수 있을까. 손재주는 일하는 속도나 완성도를 보고 부분적으로 잴 수는 있겠다. 그래도 머리로 창작하는 예술이나 문학 등은 순위를 매길 수 없다고 상을 거부하는 사례까지 종종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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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어도 비유적으로 재능이 많고 뛰어남을 말한 것이 여덟 말을 차지하는 뛰어난 재주라는 이 성어다. 중국 南北朝(남북조)시대의 이름난 산수시인 謝靈運(사령운, 385~433)이 曹操(조조)의 아들인 曹植(조식)을 극찬하면서 한 말이다. 唐(당)나라 李延壽(이연수)가 남조 네 왕조를 기술한 ‘南史(남사)’에 기록돼 있다. 부분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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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글재주를 모두 한 섬이라 한다면, 조식 혼자서 여덟 말을 차지한다(天下才共一石 曹子建獨得八斗/ 천하재공일석 조자건독득팔두).’ 자가 子建(자건)인 조식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조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으나 아버지 사후 즉위한 형 曹丕(조비)가 사사건건 트집하여 큰 고통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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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대를 태워서 콩을 삶아 고통을 안기는 煮豆燃萁(자두연기, 萁는 콩대 기)는 형제끼리의 다툼을 말한다. 이 말이 조비가 일곱 발자국을 옮기는 동안 시를 지으라고 하여 탄생한 조식의 七步詩(칠보시)에서 유래한 구절인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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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을 높이 평가한 사령운도 자부심이 대단했다. 남은 두 말의 재주 중 자신이 한 말을 차지하고, 예부터 그 때까지의 사람들이 남은 한 말을 쓰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재주를 믿는 자부심은 좋으나 너무 아무 데나 앞세우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 먼저 다치거나 타인의 질시를 받아 일찍 쇠퇴한다는 甘井先竭(감정선갈)이란 말도 있으니 마음을 먼저 닦아야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경당문노耕當問奴 – 밭가는 일은 의당 종에게 묻는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에 따른다.

경당문노耕當問奴 – 밭가는 일은 의당 종에게 묻는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에 따른다.

경당문노(耕當問奴) – 밭가는 일은 의당 종에게 묻는다, 모르는 일은 전문가에 따른다.

밭갈 경(耒/4) 마땅 당(田/8) 물을 문(口/8) 종 노(女/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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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이 잘 하는 분야가 있어 그 일로 살아간다. 보통 사람은 어느 정도 타고난 재주이든, 뒤늦게 각별한 노력으로 습득했든 그것으로 생업을 영위한다. 하지만 모두에 능통할 수는 없어 분야마다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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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자리에 있는 고위직이 잘 모르는 분야에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전문가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孔子(공자)도 지위나 학식이 자기보다 못한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라며 不恥下問(불치하문)이란 말을 남겼다. 실제 뽕따는 아낙에게 구슬에 실 꿰는 법을 물었다는 孔子穿珠(공자천주)의 고사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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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밭을 경작하는 농사일은 글을 많이 읽어 아는 것이 많을 주인도 모르는 분야다. 이런 일은 의당 머슴에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뜻의 이 성어는 南朝(남조) 梁(양)나라의 문인 沈約(심약)이 쓴 ‘宋書(송서)’에서 유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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織當問婢(직당문비)라는 말도 같은 뜻으로 나왔다. 중국 남북조시대는 남쪽에 한족의 宋(송)나라가 북쪽의 五胡十六國(오호십륙국)과 대치한 서기 420~589년 시기를 말한다. 북쪽의 혼란을 수습한 北魏(북위)가 북방의 이민족을 치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송나라의 文帝(문제)는 정벌할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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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송에는 沈慶之(심경지)라는 책략이 뛰어난 무관이 있었다. 먼저 왕이 출병의사를 물었으나 아직 북위를 이길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문제는 고집을 꺾지 않고 전쟁경험이 없는 문신들을 불러 모아 논의했다. 심경지가 북벌의 실패를 들어 문신들을 꾸짖으며 여전히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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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를 다스리는 일은 집안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밭가는 일은 농부에게 물어보고, 베 짜는 일은 하녀에게 물어야 합니다(治國譬如治家 耕當問奴 織當訪婢/ 치국비여치가 경당문노 직당방비).’ 그러면서 임금께 얼굴 허연 선비들과 전쟁을 도모하면 안 된다고 간언했다. 여기서 白面書生(백면서생)이란 성어도 나왔다. 이처럼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군사를 일으켰다가 참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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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은 직위가 높은 사람에겐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 생각하기 쉽다. 부족함을 채워 일을 더욱 잘 처리하기 위한 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전문가들도 다른 사람은 모른다고 벽을 쳐서 접근을 막고 자기들만의 이익을 도모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야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측목이시側目而視 - 눈을 굴려 옆으로 곁눈질하다, 남의 위세에 두려워하다

측목이시側目而視 - 눈을 굴려 옆으로 곁눈질하다, 남의 위세에 두려워하다

측목이시(側目而視) - 눈을 굴려 옆으로 곁눈질하다, 남의 위세에 두려워하다

곁 측(亻/9) 눈 목(目/0) 말이을 이(而/0) 볼 시(見/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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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눈으로 마음속을 나타낸다. 거리끼는 상대를 만나면 눈을 피하고 충격적인 일이 생기면 눈이 뒤집힌다. 귀여운 아기를 보면 눈이 먼저 웃고, 화가 났을 땐 눈에 불을 켠다. 무지하게 화가 났을 때 눈을 부릅뜨고 찢어질 듯 흘겨보는 瞋目裂眥(진목열자, 瞋은 부릅뜰 진, 眥는 흘길 자)나 눈빛이 횃불같이 빛나는 目光如炬(목광여거, 炬는 횃불 거) 등의 어려운 성어가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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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돌리지 않고 눈동자만 옆으로 굴려(側目) 바라보는(而視) 곁눈질은 엉뚱한 데에 신경을 쓰거나 상대의 위세에 눌려 두려워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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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전한)의 학자 劉向(유향)의 ‘戰國策(전국책)’을 먼저 보자. 縱橫家(종횡가)로 강국 秦(진)에 대항하여 六國(육국) 연합의 合從說(합종설)을 주장한 蘇秦(소진)은 가족에게도 천대받는 무명시절을 보냈다. 유세에 실패하여 집에 돌아왔을 때 부인과 형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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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득하는 법을 피나는 노력 끝에 깨우치고 세상에 나서 드디어 여섯 나라의 재상이 됐다. 수레 백대를 거느리고 이웃 나라를 갈 때 고향집을 지나게 됐다. 식구들은 집을 청소하고 길까지 깨끗이 쓸고 난 뒤 30리 길을 마중하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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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와 형수는 어떻게 변했을까. ‘부인은 바로 볼 수 없어 곁눈질하고 귀만 기울여 말을 들었다(妻側目而視 傾耳而聽/ 처측목이시 경이이청).’ 형수는 또한 ‘네 번이나 인사를 하고 무릎 꿇어 전번의 용서를 빌었다(四拜自跪而謝/ 사배자궤이사)’고 했다. 지위 재물 앞에는 작아지는 位高金多(위고금다)의 유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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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전한) 武帝(무제) 때의 강직한 인물 汲黯(급암, 黯은 검을 암)에 대한 이야기는 ‘史記(사기)’에 실려 있다. 문서 작성하는 관리 張湯(장탕)이 법을 방자하게 집행한다고 꾸짖는다. 청렴한 鄭當時(정당시)와 함께 나오는 汲鄭(급정)열전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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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탕이 득세하면 세상 사람들을 발을 모아 서 있게 하고(必湯也 令天下重足而立/ 필탕야 영천하중족이립), 곁눈질하는 처지가 되겠구나(側目而視矣/ 측목이시의).’ 철두철미하게 원칙대로 법을 집행하고 조금도 정리에 흔들리지 않은 관리 郅都(질도, 郅은 고을이름 질)에겐 고관도 절절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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酷吏(혹리) 열전에 묘사한 부분을 보자. ‘그가 법을 집행할 때에는 귀족이나 왕실인척에게도 단호하여(致行法不避貴戚 列侯宗室/ 치행법불피귀척 열후종실) 그를 볼 때는 곁눈질하며 두려워했다(見都側目而視/ 견도측목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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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혹리로 열전에 등장하지만 장탕과 질도는 차이가 있다. 장탕은 조정의 모든 대사를 세세한 것까지 좌지우지하며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고, 질도는 지위고하에 관계하지 않고 법대로 시행하여 높은 사람에게 기피인물이 됐다. 重足側目(중족측목)이라 하여 곁눈질로 힐끔거리는 외에도 발을 겹쳐 모으며 쩔쩔맨다는 표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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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나 법대로 양심대로 행하여 떳떳한 사람은 눈치 볼 일이 없다. 힘 있는 권력자나 돈 있는 부자를 피해 가면 법이 아니다. 눈치를 보고 높은 사람의 위법을 적당히 처리하다간 오히려 국민들에게 눈 흘김 당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상루담제上樓擔梯 - 다락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다.

상루담제上樓擔梯 - 다락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다.

상루담제(上樓擔梯) - 다락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우다.

윗 상(一/2) 다락 루(木/11) 멜 담(扌/13) 사다리 제(木/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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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높은 곳에 사람을 올려놓고(上樓) 사다리를 없애 버린다면(擔梯) 올라간 사람은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나쁘게 이용하지 않고 지붕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그 절박감에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게 하는 길잡이도 될 수 있다. 또 반대로 높은 곳에 많은 것을 숨겨 놓고 아래에서 올라오지 못하게 사다리를 걷어차 버렸다면 위의 사람들은 욕심이 많다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성어가 上樓擔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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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朝(남조) 宋(송)나라의 문학가 劉義慶(유의경)이 쓴 일화집 ‘世說新語(세설신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東晋(동진)의 8대 왕 簡文帝(간문제) 때의 일이다. 정치가이자 장군인 桓溫(환온)이란 사람이 蜀(촉)을 평정한 뒤로 더욱 세가 막강해지자 왕이 견제하기 위해 학식이 뛰어난 殷浩(은호)에 중책을 맡겼다. 둘은 죽마고우였으나 왕의 의도대로 사사건건 대립하는 정적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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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호가 호족을 막기 위해 출병했다가 말에서 떨어져 참패하자 환온이 규탄상소를 올려 귀양가게 되었다. 은호가 왕을 원망하며 말했다. ‘사람을 백 척 다락에 올라가게 해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리는구나(上人箸百尺樓上 儋梯將去/ 상인착백척루상 담제장거).’ 箸는 젓가락 저와 붙일 착, 儋은 擔과 같이 멜 담. 우리 속담을 모은 ‘松南雜識(송남잡지)’에는 같은 뜻으로 登樓去梯(등루거제)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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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유인하여 사지에 몰아넣은 뒤 주도권을 잡는 上屋抽梯(상옥추제)는 三十六計(삼십육계) 중의 계책이지만 실제 諸葛亮(제갈량)을 다락에 올려놓고 계책을 구하는 劉琦(유기)의 이야기가 ‘三國志(삼국지)’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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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 이 성어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을 사어로 만든 ‘세습귀족’에 대해 젊은 층들이 더 실감한다. 개발연대에 손쉽게 부를 일궜거나 권력을 잡은 이들이 그것을 자식들에게만 물려주고 다른 사람이 넘겨 볼까봐 사다리를 걷어찬 것이다. 대졸 실업자가 부지기수인데도 대기업 노동조합은 높은 벽을 쌓고, 세대 간 갈등이 더 심화되기 전에 튼튼한 사다리를 놓아야 함은 물론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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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세상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세상은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어린아이의 미소가 아름다운 건

그대 안에 동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맑은 아침햇살이 반가운 건

그대 안에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듣기 좋은 건

그대 안에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 하루가 늘 감사한 건

그대 안에 겸손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대가 바라보는 대로

그대가 느끼는 대로 변하는 것.

모든 것은 그대로부터 비롯된 것이니

누구를 탓하고 누구에게

의지하겠습니까?

오늘 마주친 사람들이 소중한 건

그대 안에 존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삶이 늘 향기가 나는 건

그대 안에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생각 좋은글’ 중-

위를 죽게 만드는 생활습관 5가지

위를 죽게 만드는 생활습관 5가지

위를 죽게 만드는 생활습관 5가지

속이 더부룩할 때 사이다 혹은 콜라 한잔을 마시면, 속이 후련해진다는 이들이 많다. 대부분 탄산음료를 마시면 트림이 나온다면서 소화가 잘 된다고 이야기를 한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탄산음료를 먹는 것이 소화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속이 안 좋을 때 밥에 물을 말아 먹는 것도 위와 장 건강을 해치는 습관이다. 위장 건강을 망가뜨리는 대표적인 생활 습관 5가지를 알아본다.

1. 속 더부룩할 때마다 탄산음료 마시기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될 때 시원한 콜라 한잔 마시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탄산음료가 위의 음식물을 배출하는 데 도움을 줘 소화를 돕는다.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인 효과일 뿐 습관적으로 탄산음료를 마시면 소화 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위장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탄산음료는 금물이다. 탄산음료가 식도와 위를 연결하는 괄약근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이로 인해 위산이 역류해 오히려 소화에 방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폐경기 여성이나 장기간 침상에 누워 있는 환자들도 탄산음료에 들어 있는 카페인이 칼슘의 흡수를 방해하고 소변을 통해 칼슘 배출을 증가시켜 결국 칼슘 부족 상태를 유발 시킬 수 있으므로 삼간다.

2. 밥에 물 말아 먹기

입맛이 없다는 이유로, 물이나 국에 밥을 말아 먹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당장 밥을 목으로 넘기기는 쉬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소화를 방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소화의 첫 단계는 입안에서 침과 음식물이 잘 섞이게 하고 음식물을 잘게 부수는 치아의 저작 작용이다. 물이나 국에 밥을 말아 먹으면 음식물이 빠르게 식도로 넘어가서 침에 의해 분해되는 과정이 생략되고 잘게 부수는 저작작용도 줄어들므로 소화에 장애를 준다. 뿐만 아니라 위 속에 있는 소화액이 물에 희석돼 두 번째 단계인 위에서의 소화능력을 방해 받는다.

3. 속 쓰릴 때 우유 마시기

많은 사람들이 우유는 알칼리성이기 때문에 위산을 중화시키고 위 점막을 보호함으로써 위궤양과 위암을 억제해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유 속에 있는 칼슘 성분이 위산 분비를 증가 시킬 가능성이 있다. 위(胃)는 우리 몸속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소화시키기 위해서 산도(ph) 1.5~2.5의 위산을 분비한다. 그런데 우유에 들어 있는 단백질인 카제인은 위산을 만나면 덩어리가 되면서 젤리 형태가 된다. 위는 카제인을 소화, 흡수시키기 위해서 더 많은 위산을 분비한다. 그리고 우유의 주 성분인 칼슘도 위산 분비를 촉진한다. 사실 우유를 마신 잠시 동안은 속 쓰림이 완화되는 듯하지만, 마시고 나면 칼슘 등에 의해 위산이 촉진되므로 오히려 속을 더 쓰리게 할 수 있다.

4. 점심 먹은 후 곧바로 낮잠 자기

직장인들 중에는 점심을 먹은 후 10분 정도의 단잠을 청하기도 한다. 하지만 식후 30분 이내에 눕거나 엎드려 수면을 취하는 것은 가슴 통증이나 변비 등 위와 소화기계통 질환을 부르는 지름길이 된다. 눕거나 엎드린 자세는 음식물의 이동 시간을 지연시키고 포만감, 더부룩함, 명치 통증, 트림 등의 각종 소화기 증상을 유발한다. 특히 식후 곧바로 누우면 위가 운동을 잘 할 수 없어 속이 더부룩하고 변비 등을 유발시킨다.

5. 술 깨기 위해서 구토하기

술을 깨기 위해서 습관적으로 토를 유도한다면, 위 건강에 치명적일 수 있다. 토를 하면 알코올 흡수는 줄어 들어 일시적으로 위가 편하고 술이 빨리 깨겠지만, 위와 달리 보호막이 없는 식도는 위에서 나온 위산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기 때문에 심하게 손상 돼 역류성식도염을 앓는다. 또 토하는 횟수가 잦을수록 위와 식도 사이의 괄약근이 느슨해져 위산이 쉽게 잘 역류한다. 심한 구토는 위, 식도 접합부에 산으로 인한 손상을 입혀 습관적으로 피가 입으로 나오게 되는 ‘말로리바이스증후군’의 원인이 된다.

잡곡의 건강한 효능 6가지

잡곡의 건강한 효능 6가지

잡곡의 건강한 효능 6가지

1. 현미

현미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맞는 음식이지만 열이 많은 사람은 과하지 않아야 한다. 현미에는 식이섬유와 생리활성 물질, 비타민E 등이 풍부하다. 때문에 대장활동을 돕고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춰주어 혈관질환을 예방하고 항산화작용에 도움이 된다. 이외에도 당뇨, 암, 간질환 예방에도 좋다.

2. 기장

폐와 비장에 좋고 기를 보충한다고 알려져 있다. 식이섬유와 비타민B가 백미보다 풍부하여 암세포를 억제하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단백질, 마그네슘, 칼슘, 탄수화물이 풍부하다.

3. 조

뼈가 신경 쓰이는 분들께 추천한다. 조에는 칼슘이 풍부하여 성장기 아이들이나 골다공증의 예방효과가 있다고 한다. 또한 소화불량에도 좋고, 수용성 비타민이 있어 성인병 예방과 피로회복에 좋다.

4. 콩

각종 성인병을 예방하는데 효과적인 콩은 콜레스테롤을 제거하는데 도움을 준다. 또한 유방암을 예방하는 이소플라본이 풍부하여 천연 여성 호르몬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5. 팥

차가운 성질을 가진 팥은 몸이 잘 붓는 체질에게 추천한다. 팥에는 수분을 배출하는 효과가 있음과 동시에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변비에도 도움이 된다. 또한 지방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어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된다.

6. 수수

수수는 노화를 예방하고 장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 수수에는 백미보다 많은 비타민 B2와 마그네슘, 단백질, 칼슘이 있으며 타닌과 페놀성분이 있어 활성산소를 제거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기침과 감기 같은 기관기염에 좋다.

스트레스 줄이기

스트레스 줄이기

스트레스 줄이기

스트레스는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에 받는 겁니다.

그런데 내가 옳다고 할 게 있나요?

사실은 생각이 서로 다른 것이지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른 게 아니에요.

서로 다를 뿐이에요.

그러니 다름을 인정하면 돼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데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열을 받는 거에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 ‘어, 또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구나’

이렇게 자기를 한 번 돌아보세요.

부추의 효능

부추의 효능

부추의 효능

○ 동의보감\에 따르면 "성질이 매우 따뜻하고 김치로 만들어 늘 먹으면 몸에 좋다"고 기록되어 있을정도로 부추 효능은 좋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도와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부추는 우리 몸에 유해한 어혈을 없애고 혈액을 맑게해 줘서 각종 혈관계 질환을 예방하고 완화시켜 준다고 합니다.

○ 음주가 잦은 분들에게 도움이 되는 부추즙 효능은 숙취해소 및 피로회복 기능이 있습니다.

○ 부추즙에는 각종 비타민과 철분, 칼슘 등 몸에 필요한 영양분들이 다량 함유되어 있어 알콜로 인해 손상된 간세포 조직을 원상태로 빠르게 회복시켜주고 간기능을 강화시켜주는데 효과적입니다.

○ 풍부한 섬유질을 함유하고 있는 부추즙 효능에는 변비 해소에 도움을 주는 기능도 있습니다.

○ 지속적으로 부추즙을 섭취해주면 장운동을 활발하게 하고 장기능을 강화시켜 주어 배변활동이 원활하게 되는데 도움을 줍니다.

○ 남성들에게 특히 좋은 부추즙 효능이 있습니다. 바로 정력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부추에는 다량의 황화아릴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지속적으로 섭취시 남성들의 발기부전에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황화아릴 성분은 여성들에게도 좋은 성분입니다. 생리통이나 생리불순, 손발저림 및 냉증 등 다양한 부인병을 예방하고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 부추는 지혈 작용을 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민간과 한방에서 토혈, 각혈, 코피 등의 지혈제로 처방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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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추에는 매운 맛의 천연 피로회복제로 알려져있는 황화알릴 성분이 함유되어 있어 피로를 풀어주고 활력이 높아져 정력도 자연스레 증가되는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서태후도 양기를 보충하기 위해 부추를 섭취했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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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추는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성질이 있어 어혈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이 원활하도록 도와줍니다.

○ 어깨가 결린다거나 허리가 아플 때, 어혈로 인하여 입술의 색깔이 자줏빛을 띠고 얼굴에 기미가 낄 때에도 부추를 섭취하면 좋습니다.

○ 부추즙을 만들어 섭취하거나 현미와 함께 죽을 쑤어 꾸준히 섭취하면 효과가 지속이 됩니다.

○ 부추는 항균작용이 있어서 식중독이 잦은 여름철에 특히 권할만한 채소 중 하나입니다.

○ 부추를 꾸준히 섭취하면 몸이 찬 사람에게 따뜻한 기운을 불어 넣어 주고, 중풍에 걸릴 확률이 많이 감소한다고 한다

과일에 관한 상식

과일에 관한 상식

과일에 관한 상식

01. 과일에 설탕을 첨가하면 영양소가 파괴된다.

원래 과일은 몸 속에 들어가면 알칼리성 반응을 보이게 되는데, 설탕을 첨가하게 되면 그 반응이 산성 반응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섭취한 과일의 영양적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02. 과일 샐러드의 물기를 제거하려면

각종 과일을 섞어 만든 샐러드는 과일에서 나오는 수분으로 인해 샐러드 드레싱이 묽어지기 쉽다. 이럴 때는 샐러드에 땅콩을 갈아넣으면 과일의 수분을 흡수해 물기가 생기지 않고 땅콩의 고소한 맛이 과일과 한데 어우러져 맛이 한결 좋아진다.

03. 맛이 없는 과일 맛있게

맛이 없는 과일은 잘게 썰어 냄비에 넣고 두 숟가락 정도의 물과 설탕을 약간 넣고 약한 불에 살짝 삶는다. 이것을 빵과 곁들여서 먹거나 디저트로 먹으면 별미다.

04. 감의 떫은 맛 없애기

단감은 따서 그대로 먹으면 되지만 떫은감은 떫은맛을 없애야 먹을 수 있다. 이 떫은맛을 없애려면, 감을 두꺼운 종이에 싸서 약 10일간만 놓아두면 된다. 또 쌀 속에 20일 정도 묻어 두어도 떫은맛이 사라지고 단맛만 남게 된다. 그리고 감 껍질에는 비타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이 감 껍질을 된장에 넣어 두면 된장에 담가 둔 다른 음식의 맛을 돋구어 주는 효과가 있다.

05. 자반의 짠맛을 뺄 때

자반생선의 짠맛을 뺄 때는 감잎이나 감꼭지를 물과 함께 담그면 짠맛이 효과적으로 빠지게 되는데, 이는 고혈압이나 당뇨와 같이 염분섭취를 줄여야 하는 질병에 효과적이다.

06. 수박에 소금을

서로 다른 종류의 맛이라도 두 가지 맛이 섞이면 맛의 상승효과가 일어난다. 이를테면 설탕물에 소금을 약간 넣으면 단맛이 강해지고, 화학조미료를 넣은 국물에 소금간을 약간 하면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수박을 소금에 찍어 먹으면 더 달고, 육수장국에 소금을 넣으면 맛이 더 진해진다.

07. 뻣뻣해진 건포도를 부드럽게 하려면

건포도를 오래 놓아두게 되면 뻣뻣해져 맛이 덜하다. 이럴 때는 건포도에 포도주나 물을 뿌려 랩을 씌운 다음 전자레인지에 넣어 약 30초 정도 가열하면 연하고 부드러워진다.

08. 딸기를 씻을 때

딸기는 꼭지를 안 뗀 상태로 씻는 것이 좋다. 꼭지를 떼어내고 씻으면 꼭지 자리에 물이 들어가게 되어 단맛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09. 딸기에 설탕과 양주를 첨가하면 별미

한물 간 딸기는 아무래도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때는 딸기에다 설탕을 뿌린 다음 위스키나 브랜디 등의 양주를 살짝 뿌려 놓으면 아주 새로운 맛으로 변한다.

10. 딸기는 유제품과 함께

딸기에 우유나 크림을 곁들이게 되면 딸기의 풍부한 구연산이 우유의 칼슘 흡수를 돕고 비타민 C는 철분의 흡수를 도와 영양흡수에 그만이다.

11. 오래된 바나나를 맛있게

오래되어 속이 검게 변한 바나나는 볼품도 없을뿐더러 맛도 없다. 그럴 때는 우선 껍질을 벗겨 서너 토막으로 자른 다음 나무 꼬챙이로 끼워 우유에 반죽한 달걀을 살짝 입혀 데친다(달걀 반죽은, 우유 반병에 달걀 노른자 한 개를 풀어 섞은 다음, 거기에 밀가루 1큰 술과 달걀 한 개 분의 흰자를 넣어 거품을 내어 섞으면 된다) 그리고 여기에 설탕과 향료를 약간 뿌려 먹으면 맛이 좋다.

12. 바나나를 보관하려면

먹고 남은 바나나를 그대로 방치해 두면 너무 익거나 상하여 먹을 수 없게 된다. 바나나를 상하지 않게 보관하려면, 껍질을 벗겨 하나하나 랩에 싸서 냉동하면 좋다.

13. 바나나 껍질 재활용법

바나나를 먹고 난 후 껍질로 가죽점퍼, 가죽장갑 등의 가죽 제품을 닦아보자. 가죽에 묻은 더러움이 말끔히 제거될 뿐 아니라 윤기도 반짝반짝 나게 된다.

14. 흰색 면양말은 레몬으로

흰색 면양말은 좀 오래 신으면 아무리 삶아 빨아도 본래의 색깔을 찾을 수 없다. 이 때 레몬 껍질을 두어 조각 물에 넣어 빨면 양말이 거짓말처럼 새하얗게 된다.

피부 재생을 돕는 탁월한 음식

피부 재생을 돕는 탁월한 음식

피부 재생을 돕는 탁월한 음식

01. 빨간 파프리카 : 초록색에 비해 비타민 C가 2배 더 많고 베타카로틴의 성분 함량도 높다. 또 붉은색을 띄는 색소인 ‘리코펜’이 함유돼 있는데 리코펜은 신체의 노화와 질병을 일으키는 ‘활성산소’ 생성을 예방해 준다. 피부의 탄력을 유지해 주고 노화를 예방하는데 탁월하다. 또 성장기 어린이들이 성장촉진과 면역력 강화에 효과적이며 성인들은 골다공증 예방에도 도움을 준다.

02. 다크 초콜릿 : 카카오가 풍부하게 들어가는 다크 초콜릿은 설탕이 대부분인 초콜릿에 비해 비교적 칼로리가 낮다. 다크 초콜릿은 플라보노이드라는 항산화제가 있어 심장건강에 좋으며 행복 호르몬인 세라토닌 분비를 촉진시켜 안정감과 행복한 느낌을 갖게 해준다.

03. 연어 : 연어가 다크서클에 좋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연어에 들어 있는 오메가3는 세포 재상에 필수적이며 노화가 가장 빨리 찾아오는 눈가 피부를 건강하고 환하게 밝혀준다. 또한 자외선 노출로 인해 두꺼워진 피부를 부드럽고 윤기있게 하고, 피부의 콜라겐 섬유 부족현상을 막아 주름 예방에 효과적이다.

04. 코코넛 오일 : 안젤리나 졸리나 미란다 커 등 해외 스타들은 피부미용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코코넛 오일을 즐겨 먹는다. 체내 지방을 분해하고 쌓이는 것을 막아주고 쉽게 포만감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먹는 것 외에 피부에 바르는 것도 효과를 높인다고 한다. 목욕 후 코코넛 오일을 피부에 바르면 흡수가 빨라 피부 보습과 고운 피부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05. 녹차 : 녹차는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피부 미용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식품이다. 폴리페놀을 함유하고 있어 항산화효과가 높다. 또한 비타민C가 풍부해 피부를 매끄럽고 부드럽게 해주는 효과가 높다. 특히 해독효과가 좋아 꾸준히 차로 마시면 건강은 물론 피부 미용에 효과를 볼 수 있다.

06. 시금치 : 시금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즐겨 먹는 음식으로 유명하다. 시금치는 피부의 트러블이 생기는 것을 막고 푸석하지 않게 유지해 준다. 또한 세포가 노화되는 것을 억제해 주기 때문에 피부 노화 예방에 탁월한 채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나트륨을 제거하고 혈액 순환을 개선해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07. 각종 씨앗 : 각종 씨앗에 많이 들어있는 레시틴성분과 리놀산 등의 성분은 콜레스테롤을 낮춰주고 피를 맑게 해 피부의 건강에 좋다. 단시일에 성과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각종 씨앗을 즐겨 먹으면 혈관을 맑게 하기 때문에 피부의 탄력과 촉촉함을 유지해 준다. 특히 비타민E 성분이 풍부해 피부의 촉촉함을 오래도록 유지해 주고 마그네슘과 단백질이 풍부한 것도 피부의 건강을 유지하도록 돕는다. 오메가3 지방산이 많이 함유됐다.

08. 샐러리 : 샐러리는 피를 깨끗하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키는 작용이 있어 흥분과 불안 증세를 가라앉힌다. 신경이 날카로운 이유로 불면증에 시달릴 때 먹으면 숙면을 취하게 돕는다. 피로 회복에 효과가 높아 피부의 탄력과 윤기를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젖산과 팔빈산과 같은 피로 물질을 제거해 정신노동에 지친 현대인에게 유익하다.

09. 파파야 : 파파야에는 비타민C 함유량이 많다. 파파야는 피부의 진피층을 보호해 주름살 등을 예방하는 콜라겐 형성을 돕는다. 파파야에는 피부 노화를 막는 비타민E도 풍부하게 들어 있다.

10. 당근 : 당근은 소염 작용이 뛰어나 피부 모공 속의 병균을 죽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습진 등 피부 질환을 예방하고 완화 시킨다고 한다. 당근에 많이 함유된 비타민A는 피부암을 유발하는 세포 생성을 막아준다.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4편

실록을 만들기 위해서는 방대한 자료가 동원되었다. 그 가운데 사관들이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한 사초(史草)는 실록 편찬의 가장 중요한 자료였다. 사초에는 입시사초(入侍史草)와 가장사초(家藏史草)가 있다. 입시사초는 전임사관이 왕 가까이에서 나랏일을 기록한 사초이고, 가장사초는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서 다시 정리하여 기록한 사초이다. 따라서 가장사초는 입시사초에 비해 글씨도 알아보기 쉽고 내용도 정리가 잘된 편이다. 가장사초는 사관의 집에 보관해 두었다가 정해진 기일에 실록청에 제출하여 편찬의 자료로 사용되었다. 사관은 가장사초에 자신이 직접 들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기록하였다. 그래서 실록에는 ‘사실’과 함께 ‘비평’이 담겨 있다.

입시사초는 겸임사관들이 작성한 춘추관일기와 함께 시정기(時政記)로 만들어져 실록 편찬의 일차 자료가 되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본 자료이기에 가장 필수적이지만 특히 조선시대의 사초는 사관 외에 왕도 볼 수 없게 함으로써 사관의 신분과 역사 기록의 객관성이 확보될 수 있었다. 사관들이 작성한 사초 외에도 각 관청의 등록·승정원일기·경연일기·일성록 등과 개인 문집·야사 등도 수집하여 실록 편찬 자료로 활용하였다. 실록 편찬에 쓰이는 이 모든 자료를 통칭하여 사초(史草)라 부르기도 한다.

실록이 완성되면 총재관 이하 편찬에 종사했던 관리들이 참석하여 실록을 궤를 가마에 싣고 춘추관으로 나아가 성대한 봉안식을 거행하였다. 지방의 사고(史庫)에 봉안할 경우 왕명을 받들어 소임을 맡은 관리와 종사관 몇 명만이 실록을 싣고 가 사고에서 의식을 거행한 후 봉안하였다. 한편 실록이 완성되면 초초(初草)와 중초(中草)는 개천물에 씻어 내용을 지우고 종이는 바위에 말린 후, 종이 제작을 담당했던 관서인 조지서(造紙署)로 보냈다. 사초를 씻어 내는 일을 세초(洗草)라 하였는데, 실록의 내용이 알려지는 것을 막기 위함과 종이 재활용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세초는 당시 조지서와 가까웠던 세검정의 개천에서 주로 이루어졌고, 차일암(遮日巖:차일을 쳤던 바위)이라 불린 넙적 바위에서 종이를 말렸다. 차일을 치는 이유는 햇볕을 가리기 위한 원래의 목적보다 기록의 누설을 막기 위한 철저함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세초가 끝나면 수고한 관리들을 치하하기 위한 세초연(洗草宴)이 베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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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3편

조정에서는 사관이 기록하는 사초의 질과 양 및 직필(直筆)을 보장하기 위하여 국정을 논의하는 자리와 왕과 신하가 대면하는 모든 곳에 사관이 참여하도록 하고, 승정원 옆의 한 칸을 사관의 거처로 삼게 하였다. 또한 사초를 누설하거나 개작 또는 삭제한 자는 참수형 이하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국왕의 사초·실록 열람 금지, 사초 작성자의 이름 불기재(명종 이후에는 기재) 등의 조치를 행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직필을 꺼린 국왕이나 대신 등의 탄압이 가해지고, 국왕이 “승지가 사관직을 겸하여 국왕의 언동과 국사를 기록하니 사관은 입시하지 말라.” 등의 탄압으로 가끔 사관의 입실(入室)이 중지되기도 하였다. 또한, 정쟁(政爭)과 연루되어 직필과 공정성이 결여되기도 하였지만, 국왕과 집권관료들의 전횡(專橫: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름)과 비리를 은연중에 견제하여 유교정치가 표방하는 덕치(德治)를 행하는데 기여한 바가 크다.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대왕도 史草 앞에서 약한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 일화 한 토막이 전한다. 하루는 아버지 태종의 치적을 사관이 어떻게 평가할 지가 궁금해 태종 때의 사초(史草)를 보자고 했다가 원칙을 고수한 사관으로부터 정중하게 거절당하고 만다. 아마 세종대왕이 폭군이었다면 왕명을 거절한 그 사관을 죽여서라도 사초를 열람했을 수도 있었을 터이다.

조선왕조의 사관은 전임사관(專任史官)과 겸임사관(兼任史官)으로 구성된다. 전임사관은 이른바 한림팔원(翰林八員)이라 불리기도 했던 예문관 관원인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 등 총 8명이다. 왕이 계시는 곳이면 어디서든 붓을 들고 기록하기에 이들이 작성한 기록을 입시사초(入侍史草)라 부른다. 비록 미관말직이라도 맡은 임무가 워낙 중요하고 임용절차도 까다로워 세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한편 겸임사관은 주요 관청의 관원들로 춘추관의 관원을 겸직한 사관들이다. 겸임사관들은 각각 자신이 속해 있는 관청에서 일어나는 나날의 사건과 업무를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고하였다. 이를 춘추관일기(春秋館日記)라 불렀다. 입시사초와 춘추관일기는 연월일 순서로 정리하여 시정기(時政記)로 만들어 실록 편찬에 활용하였다.

한편 외사(外史)라 하여 각 도의 관찰사나 수령을 별도로 임명해 지방의 일들을 춘추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중앙뿐 아니라 지방 곳곳에도 사관을 배치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들을 평상시에 기록하고 모아둠으로써 조선왕조실록의 내용은 그 어느 역사서보다 상세하고 생생한 특징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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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2편

사관(史官)은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유교의 경전과 사서오경)를 강의하는 경연(經筵), 정2품 이상의 관리들이 하는 중신회의(重臣會議), 모든 문·무 관리들이 하는 백관회의(百官會議) 등에 참석하여 그 회의 내용을 기록(記錄)하였다. 사관(史官)의 기록은 어느 한편으로 치우침없이 공(公)과 사(私)를 명확히 하여, 임금과 백관(百官)들의 언행(言行)과 정치적(政治的)인 시시비비(是是非非) 그 외 국가적인 사건·사고와 백성들의 생활 등을 직필(直筆)하여 후세에 남기는 것이 주요 목적이다.

그러므로 사관은 다양한 지식과 글을 잘 쓰는 능력뿐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거짓 없이 그대로 기록직필(直筆)해야 하기에 권력 앞에 맞서는 용기도 필요했다. 그래서 사관들은 여러 분야에서 능력이 뛰어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이고, 관리들 중에서 가장 청렴결백하였다. 이들은 당하관(정7품, 정8품, 정9품)으로 비록 직위(職位)는 낮았으나, 국왕의 측근에서 근무하였기에 과거급제자 중 문벌(門閥)이 좋은 사람을 임명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이전에는 추천받은 인물을 이조(吏曹)에서 계문(啓聞:국왕에게 아룀)하여 제수(除授:임금이 벼슬을 내림)하였지만, 후에는 선발하고자 하는 사관의 품계(品階)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대상으로 문장이 뛰어나고, 내·외 4조(증조·조·부·외조)에 흠이 없고, 인품이 공정한 자를 3배수로 뽑아 이조(吏曹)에 보내면 이조에서 엄격한 심사를 거쳐 제수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청문회를 거쳐서 임명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한 명만 입시하여 기록하였는데, 기록에 누락이 없게 하기 위해서 1425년(세종 7년)부터 사관 2명이 좌우에 입시하여 말과 행동을 나누어 기록하게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장계(狀啓)나 왕이 내리는 교서(敎書)는 반드시 사관을 거쳐 이를 초록(抄錄)한 뒤에 육조(六曹)에 넘기게 하였다. 사관제도는 정확한 직필(直筆)로써 국가적인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 등을 기록하여 후세에 정치를 하는 데 거울로 삼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是非:옳고그름)를 가리거나 수정을 가하지 못하며, 사관의 기록 행위도 일종의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다. 또한, 사관(史官)의 기록은 일절 공개하지 않아서 국왕(國王)도 볼 수가 없었다.

사관이 직필의 원칙을 얼마나 지켰는지는 다음의 예시로 알 수 있다.

1404년(태종4년)에 태종은 사냥을 나갔다가 실수로 말에서 떨어져 체통이 말이 아니었다. 태종은 급히 일어나서 좌우를 둘러보며 “이 사실을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 고 말했다. 그러나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勿令史官知之)"는 왕의 명까지 ‘태종실록’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사관의 붓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런 어명을 내렸을까? 역사를 기록하는 붓을 ‘사필(史筆)’이라고 한다. 정종 또한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사필(史筆)이라고 말했다. 사관들은 직필의 원칙을 지켰고, 조선시대의 국왕은 사관의 기록에 언제나 긴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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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 사관(史官)과 사초(史草) 1편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책이다. 조선시대의 정치, 외교, 경제, 군사, 법률, 통신, 종교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총망라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우수한 역사기록물이고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실록을 편찬할 때 이용하는 자료는 정부 기관의 각종 기록과 개인의 문집들이 있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사초(史草)는 사관(史官)이 국가의 모든 회의에 참여하여 보고 들은 내용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이다. 사관(史官) 이외에는 국왕조차도 볼 수 없게 하여 사관의 신분을 보장하고, 기록의 객관성과 진실성을 확보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는 오늘날 조선시대의 왕실은 물론 일반 백성들의 생활까지도 세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사관(史官)은 ‘역사 사(史) 벼슬 관(官)’ 으로, 글자 그대로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하는 관리(官吏)’ 이다. 사관(史官)은 중국에서 황제(黃帝)와 신하의 좌우에 위치하면서 그들의 행동을 기록하는 좌사(左史)와 말言을 기록하는 우사(右史)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왕의 언행과 관료들의 행정 등 시정(時政)을 기록하는 일을 했다. 우리나라도 고구려·백제·신라 때 여러 역사책이 편찬된 것으로 보아 사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정식으로 사관(史館=관아)을 설치하고 사관(史官)이란 관리가 있었는지는 명확한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확실하지 않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광종 때에 당(唐)의 사관제도(史館制度)를 받아들여 궁내에 사관(史館)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직접 실무를 맡은 한림원(翰林院)의 수찬관, 직사관이 사관(史館=관아)에서 왕이나 백관들의 언행, 정치 등 모든 기록을 담당하여 이를 사관(史官)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예문관과 춘추관의 공봉, 수찬, 직관이 다른 직과 겸하여 국사의 기록을 담당하였는데 이들을 사관(史官) 또는 한림(翰林)이라 하였다. 사관(史官)은 최고 권력자인 국왕의 언행과 행동 뿐 아니라, 관리들에 대한 평가와 주요 사건, 사고 등 당시의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해 국왕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가서 국왕의 언행 및 행동을 기록했다. 이러한 사관의 역할로 인하여 왕과 신하는 은밀히 만나 정사를 의논할 수 없었다.

왕명을 출납하는 승지(承旨)와 함께 궁중에서 숙직하고,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국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처리하는 것을 사실 그대로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잘잘못과 인물에 대한 비평까지 기록했다. 임금이 신하를 대면(對面)할 때엔 정승\uf0a0판서와 같은 고관이라 할지라도 독대할 수 없었고,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자리를 같이함으로써 사사로운 청탁이나 남을 중상・모략하는 것을 막도록 하였다. 또한 국왕과 대신들의 부적절한 권력남용과 부패를 방지할 수도 있었고, 열린 정치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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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儀軌

■ 의궤儀軌

■ 의궤(儀軌)

‘의궤(儀軌)’란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합한 말이다. 조선시대에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하는 주요 행사를 글이나 그림으로 남긴 보고서 형식의 책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국왕의 혼인을 비롯하여 세자책봉, 왕실잔치, 장례, 궁궐건축 등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전왕(前王) 때의 사례를 참고하여 거행하는 것이 관례이다. 그러므로 행사 관련 기록을 ‘의궤’로 정리해둠으로써 후대에 참고로 삼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의궤라는 기록 유산이 없었다면, 오늘날 왕실 혼례식을 비롯한 궁중의식은 결코 재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의궤 중에서도 『가례도감의궤』는 활기차고 신명 나는 혼례식 장면에서 축제 분위기가 느껴진다. 특히 행사 때 사람과 기물의 배치,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반차도(班次圖)는 오늘날로 치면 결혼식 기념사진이나 동영상 파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했다. 오늘날 국가 행사 시 미리 도면을 그리고 대본을 만들어 리허설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에도 당시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에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인데, 주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 예법을 뜻한다. 왕실의 혼인 중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만을 특별히 가례라고 칭했다. 현재 전해지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를 살펴보면, 왕의 가례가 9건, 왕세자의 가례가 9건, 왕세손의 가례가 1건, 황태자의 가례가 1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하여 ‘가례도감’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됐음을 확인할 수 있으나, 안타깝게도 전기의 의궤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지금 남아 있는 『가례도감의궤』 가운데 가장 최초의 것은 1627년(인조 5년) 12월 27일 소현세자와 강빈(姜嬪)의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이며, 순종과 순종비의 결혼식을 정리한 1906년의 『순종순종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최후의 것이다. 280년간 20건의 가례가 의궤로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각 국왕과 왕세자의 결혼식이 연속적으로 기록돼 있어,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 결혼 풍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고, 각종 혼수품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의궤에는 육례에 맞추어 조달했던 각종 의복과 물품 내역을 비롯해 의장기, 가마 등을 준비한 장인들의 명단, 소요된 물자의 구체적인 내역을 도설(圖說)과 함께 첨부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린 화원들의 이름까지도 세세히 기록하고 있어 매우 소중한 역사자료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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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 KIMSEM의 역사로 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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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 2편

■ 국혼國婚 2편

■ 국혼(國婚) 2편

혼례식에서는 왕실의 화려함과 함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각종 도구들이 활용되었는데, 의장 깃발에는 해·달·산천을 비롯해 사신도에 표현된 동물, 가구선인(駕龜仙人) 등의 그림을 그려넣어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의장물은 시각적인 것과 악기와 같은 청각적인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창·칼·도끼 등과 같은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실용성과 신선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상징성을 겸비한 부채인 선(扇)·양산(陽橵)·개(蓋) 등이 활용되었다. 악기는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행렬의 앞뒤의 동작을 일치시켜주는 기능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 구령붙이는 것과 같은 기능을 했을 것이다.

왕비는 별궁에서 조선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을 상징하는 복식 적의(翟衣)를 입고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왕의 책봉문을 받았다. 책비(冊妃) 이후에는 상궁과 궁녀들이 왕비에게 대궐 안주인에 대한 예를 차려 네 번의 절을 올렸다. 이때부터 왕비로 인정되는 것이다. 이날 왕은 최고의 예복인 면류관(冕旒冠)에 곤복(袞服),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 혁피, 패옥, 말석, 규(圭) 등으로 구성된 구장복(九章服)을 입었다.

왕과 왕비도 최고의 복식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수행하는 행렬의 모습도 화려했다. 의례복은 형태나 색채가 화려하고 독특한 개성이 나타났고, 일부 여성들은 너울과 같은 가리개를 착용했다. 행렬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백마를 비롯해 흑마·갈색마 등 다양한 색깔을 띤 말의 모습도 보인다.

대궐로 들어온 왕비는 그날 저녁에 왕과 함께 술과 음식을 들고 침전에서 첫날밤을 치르는 절차를 거친다. 왕은 대궐의 침전 문까지 나와 왕비를 맞이한 다음 침전의 중앙 계단을 통해 음식상이 차려진 방으로 갔다. 왕과 왕비는 하나의 박을 쪼개어 만든 잔으로 석 잔의 술을 마신 후 왕의 침전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여기까지 진행되면 국왕의 혼례 절차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왕비에게는 대비나 왕대비 등 왕실 어른들을 뵙고 인사하고, 조정백관과 내·외명부의 여성들로부터 인사를 받는 절차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왕비가 정해진 후에 왕은 중국 황제에게 왕비 책봉을 요청하였다. 조선의 왕비는 중국 황제가 보내준 고명(誥命)을 받음으로써 국내외적으로 지위가 공인되었으며, 국왕혼례도 완결되었다.

혼례가 끝난 후 왕비의 친정에는 당연히 많은 혜택이 주어지는데, 왕비의 아버지는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어머니는 부부인(府夫人)으로 봉해지게 된다. 그리고 왕비의 본향은 행정단위를 승격 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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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국혼(國婚)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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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례식은 조선시대 왕실의 최고 축제 중의 하나였다. 왕세자의 혼례식이 일반적이었지만 계비를 맞이하는 경우 숙종, 영조의 경우처럼 왕의 혼례식도 몇 차례 거행되었다. 왕실에서 혼례식이 열리면 총괄 본부인 가례도감이 구성되었고, 총책임자인 도제조는 정승급에서, 부책임자인 도제는 판서급에서 임명했다. 도제 3인 중 2인은 호조판서와 예조판서인데 의식 절차는 예조판서가, 행사에 들어가는 총 비용은 호조판서가 집행했다. 행사의 실무를 맡은 사람은 도청이나 낭청인데 현직에 있는 관리들이 겸직하고 행사가 끝나면 원래 직책으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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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혼(國婚)은 육례(六禮: 납채. 납폐, 고기, 친영. 부현구고. 묘현)로 진행되었다.

<의혼(議婚) - 사가의 중매를 넣어 혼인을 의논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택 과정이다.>

1. 납채(納采) - 왕이 혼인을 청하는 의식으로, 약혼식이라 보면 된다.

2. 납폐(納幣) - 성혼의 징표로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폐백을 받는 것이라 보면 된다.

3. 고기(告期) - 왕비 책봉의 날짜를 잡는 것이다.

4.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색시를 데리고 오는 것으로, 왕은 직접 친영을 행할 수 없으므로 대신 사자를 보낸다. 친영은 초저녁에 행한다. 따라서 신랑이 신부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혼례를 치르는 시각은 밤이 된다. 밤에 예를 치러야 바로 초야를 치를 수 있다.

5. 부현구고(婦見舅姑) - 첫날밤을 치른 신부가 시부모를 뵙는 의식이다.

6. 묘현(廟見) - 시집온 신부가 사흘만에 사당의 조상님들을 뵙는 의식이다. 왕비의 경우는 당연히 종묘에서 예를 치러야 한다. 왕비는 이외에 중국 황제의 고명장을 받는 절차가 또 있다.

이런 절차는 당연히 일반 사가의 혼례보다 훨씬 복잡하고 화려했다. 육례 중에서도 최고의 의식은 친영으로 오늘날 예식장 등에서 행해지는 결혼식에 해당한다. 친영은 별궁에서 신부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궁궐에 모셔오는 의식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혼례식을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담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의 ‘반차도(班次圖)’에는 혼례식 현장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반차도(班次圖)’는 ‘지위와 임무에 따라 배치한 그림’이란 뜻이다.

반차도(班次圖)에는 당시의 의장물을 비롯하여 복식, 악기, 말 등이 오늘날의 동영상 자료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병력과 함께 왕의 존재를 알리는 둑기(纛旗·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가 보인다. 혼례식은 크게 왕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어가(御駕) 행렬과 왕비의 가마가 중심이 되는 왕비 가마 행렬로 구성된다.

왕의 행렬 바로 뒤에는 문무백관과 군사 지휘관 등 왕을 수행하고 호위하는 신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왕의 행렬에 이어 왕비의 행렬이 등장하는데, 왕비 책봉 문서인 교명(敎命)을 담은 교명 요여(腰輿)와, 왕비의 도장인 금보(寶)와 옷을 담은 가마가 먼저 나타나고 이어서 왕비의 가마가 보인다. 왕의 가마는 문을 열어 지나가는 군중들이 왕의 모습까지 직접 볼 수 있게 했으나, 왕비의 가마는 문을 닫아 왕비의 모습을 볼 수 없게 했다. 친영 행렬의 뒷부분에는 뒤에서 왕을 경호하는 후사대(後射隊)가 등장하고 있다.

-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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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질호피(羊質虎皮) - 속은 양이고 거죽만 호랑이, 실속은 없이 겉만 화려하다.

양 양(羊/0) 바탕 질(貝/8) 범 호(虍/2) 가죽 피(皮/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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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은 화려하고 속은 보잘 것 없는 경우를 잘 나타내는 우리 속담이 ‘빛 좋은 개살구’다. 비슷한 ‘개 발에 편자’는 옷차림이나 지닌 물건 따위가 제격에 맞지 않는 것을 비유한다. 어느 것이나 본바탕은 빈약한데 겉모양만 꾸미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성어는 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판다는 羊頭狗肉(양두구육)이 가장 잘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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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바탕은 양(羊質)이고 껍데기만 호랑이(虎皮) 무늬라는 뜻의 이 말도 위엄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연약한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을 나타낸다. 바로 表裏不同(표리부동)이고 魚質用紋(어질용문), 蛇心佛口(사심불구) 등도 같은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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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가 쉽고 적합해서인지 여러 곳에서 인용되어 있는 말이다. 먼저 前漢(전한)의 문장가 揚雄(양웅)이 論語(논어)의 문체를 빌려 쓴 ‘法言(법언)’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성이 孔(공)씨인 어떤 사람이 자를 仲尼(중니)라 쓰면 孔子(공자)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늬는 맞더라도 바탕은 아니라며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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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몸뚱이에 호랑이 가죽을 씌어 놓았더니 모두들 무서워했지만 ‘풀을 보면 여전히 좋아하고 이리를 보면 벌벌 떨었다(羊質而虎皮 見草而說 見豺而戰/ 양질이호피 견초이열 견시이전)’고 했다. 豺는 승냥이 시. 본질은 바뀌지 않은 채 겉보기만 호랑이니 양이 승냥이를 만나면 가죽을 덮어쓴 사실을 잊는 법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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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후한서)’ 劉焉(유언)전에는 ‘양 몸뚱이에 호랑이 가죽을 씌웠어도 이리를 보면 떨었다(羊質虎皮 見豺而恐/ 양질호피 견시이공)’으로 약간 바꿔 사용됐다. 曹丕(조비)의 ‘與吳質書(여오질서)’에 나오는 ‘개나 양의 자질로 호랑이나 이리의 무늬를 뒤집어썼다(以見羊之質 服狐豺之文/ 이견양지질 복호시지문)’란 표현도 모두 같은 이야기에서 활용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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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로 전 계층서 인기를 끌던 연예인이 자신의 표현대로 ‘쫄딱 망했다.’ 그는 노래뿐 아니라 다양한 그림으로 화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무명화가가 代作(대작)한 것이 밝혀지고 아이디어가 본인 것이니 자신의 독창이라 변명했다가 질타를 받았다. 소유권이 자신에게 있더라도 작품 구입자들은 겉과 속이 다른 작품을 산 것이라 우롱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무계지언(無稽之言) - 근거가 없는 말

없을 무(灬-8) 머무를 계(禾-10) 갈 지(丿-3) 말씀 언(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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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말을 상대방에 믿게 하려면 참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보태더라도 그럴싸한 근거를 대야 한다. 하나의 거짓말을 하려면 남이 믿을 수 있도록 항상 다른 거짓말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언젠가는 들통이 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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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나 행동 따위가 참되지 않고 터무니없을 때는 莊子(장자)에 나오는 荒唐無稽(황당무계)란 말을 쓴다. 이처럼 유례를 찾을 수 없고 황당한 이야기를 할 때 이 성어를 쓴다. 그러나 제법 믿을 만하게 근거가 있고 진실에 가까운 허언은 가장 혐오스런 거짓말이라고 했으니 어쨌든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는" 참말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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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기록 "書經(서경)"에 이 말이 등장한다. 항상 숭상해야 한다고 尙書(상서)라고도 하는 서경은 三經(삼경)이나 五經(오경)에 꼭 들어갈 정도로 중요시했다. 제일 먼저 나오는 虞書(우서)의 大禹謨(대우모) 편에 舜(순)임금이 禹(우)에게 임금을 맡기를 바라면서 대담하는 내용에서 유래한다. 大禹(대우)는 우가 순의 신하로 있을 때 높여서 부른 말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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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임금이 믿음을 이루고 공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우가 홍수를 다스린 공적에 힘입은 것이라 치하했다. 그러면서 나라일은 부지런하고 집안에서는 검약하며 스스로 만족하거나 뽐내지 않았고 교만하지 않으니 천하에 공을 겨룰 자가 없어 왕을 맡을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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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당부한다.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지키려는 마음은 극히 미약한 것이니 정신을 집중하여 그 중심을 진실하게 잡아야 하오. 근거 없는 말은 듣지 말며, 상의하지 않은 계책은 쓰지 말아야 하오(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無稽之言勿聽 弗詢之謀勿庸/ 인심유위 도심유미 유정유일 윤집궐중, 무계지언물청 불순지모물용)."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근거 없는 말을 믿고 그대로 따르면 큰 피해가 따른다는 것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좌고우면(左顧右眄) - 왼쪽 오른쪽을 돌아보다, 앞뒤를 재고 망설이다.

왼 좌(工/2) 돌아볼 고(頁/12) 오른 우(口/2) 곁눈질할 면(目/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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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쪽도 옳은 것 같고 저 쪽도 옳은 것 같다. 내가 가진 것도 좋지만 상대가 가진 것은 더 좋아 보인다. 한 쪽은 포기해야 더 나은 길을 택할 수 있을 텐데 판단을 망설일 때가 많다. 앞서 소개했던 首鼠兩端(수서양단)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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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구멍에서 나온 쥐가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판단이 서지 않는 모습을 그렸다. 왼쪽을 돌아보고(左顧) 오른쪽을 살펴본다(右眄)는 이 성어도 앞뒤를 재고 망설이는 것을 가리킨다. 首尾兩端(수미양단), 右盼左顧(우반좌고, 盼은 눈예쁠 반), 左右顧視(좌우고시), 瞻前顧後(첨전고후) 등 같은 뜻의 말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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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을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이런 태도를 취하면 결단력이 없다고 손가락질을 하겠지만 성어가 처음 사용됐을 때는 뜻이 사뭇 달랐다. 왼쪽을 둘러봐도 오른쪽을 살펴봐도 자기만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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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魏(위)나라의 曹植(조식)이 吳質(오질, 177~230)이란 사람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래됐다. 曹操(조조)의 아들인 조식은 일곱 걸음 걸으면서 지은 칠보시로 뛰어난 시재를 자랑했고, 오질은 자가 季重(계중)으로 재능과 학식이 뛰어나 열후에 봉해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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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이 쓴 ‘與吳季重書(여오계중서)’에 술이 거나한 술자리에서 퉁소와 피리가 뒤에서 연주하면 독수리처럼 비상하여 봉황이 탄복하고 호랑이가 응시할 것이라고 오질을 치켜준다. 그러면서 ‘왼쪽을 돌아보고 오른쪽을 살펴보아도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고 할 것이니 어찌 당신의 장한 뜻이 아니겠습니까(左顧右眄 謂若無人 豈非吾子壯志哉/ 좌고우면 위약무인 기비오자장지재)?’하며 극찬한다. 이처럼 주위의 어떤 사람보다 출중하다고 나타내던 말이 이쪽저쪽 돌아보는 눈치 보기로 변했으니 의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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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뒤 재지 않고 함부로 추진하여 일을 그르치는 것보다는 낫지만, 지나치게 신중하여 돌다리도 두드리며 건너는 것도 추진력이 떨어져 답답하다. 국가의 미래를 보고 소신 있게 밀어붙였어야 할 일이 많은데 쥐 눈만 번득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 번 절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닿게 하다.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 번 절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닿게 하다.

삼배구고(三拜九叩) - 세 번 절하고 아홉 차례 머리를 땅에 닿게 하다.

석 삼(一-2)절 배(手-5)아홉 구(乙-1)두드릴 고(口-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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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라도 그 과오를 인정하고 또 사과하는 일은 무척 어렵다. 그래서 지난 번 자기가 맞을 회초리를 등에 지고 가 죄를 청한다는 負荊請罪(부형청죄)란 말이 소중하다고 말한 적 있다. 잘못은 인정하고 사과를 하려는데 받는 쪽에서 부당하게 심한 요구를 할 때엔 어떻게 될까. 명백한 잘못이라도 자신의 과오는 뒷전이고 반발만 불러 올 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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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淸(청)나라 때 세 번 절하고(三拜) 세 번 땅에 머리를 닿게 한다(九叩)는 황제에 대한 경례법은 사과에 대한 예식이 아니라도 행하는 사람은 심한 모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드릴 叩(고)에는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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꿇어앉다, 무릎 꿇고 절하다는 뜻의 跪(궤)를 써서 三跪九叩(삼궤구고)로 써도 같은 뜻이다. 叩頭禮(고두례)는 본래 신불이나 친족 어른에 존경을 표시하던 것이라는데 明(명)나라에 이르러 이웃 나라 조공사가 황제를 알현할 때의 의식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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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의 오배삼고두례는 청나라가 지배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삼궤구고두례로 대체되어 외국사절에게도 강요했다. 실제 제7대 嘉慶帝(가경제) 때인 1816년 영국의 대사 애머스트(William Amherst)가 이를 거부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일화도 남아 있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은 훨씬 더한 치욕의 역사가 있다. 光海君(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하여 왕위에 오른 仁祖(인조)에게 시련을 안긴 後金(후금)의 太宗(태종)이 바로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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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처음 침입한 丁卯胡亂(정묘호란) 때엔 형제의 맹약을 맺고 잘 수습했다. 청으로 국호를 고친 뒤 군신의 예를 강요하는 것을 조선이 거부했다가 1636년 丙子胡亂(병자호란)을 맞아 온 국토가 유린되고 왕은 南漢山城(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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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까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음 해 1월 인조는 세자 등 500명이 한강 상류의 나루 三田渡(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의 예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천인공노天人共怒 -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다.

천인공노天人共怒 -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다.

천인공노(天人共怒) - 하늘과 사람이 함께 노하다.

하늘 천(大/1) 사람 인(人/0) 한가지 공(八/4) 성낼 노(心/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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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기대나 요구가 좌절되었을 때 분노한다. 유아는 생후 3개월 무렵부터 울어 댄다든지 몸을 뒤집는다든지 하여 분노를 표출한다고 하는데 나이가 들면서는 요구의 저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에 대해 화를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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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젊은이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일에 분노하고, 노인들은 어려워만 가는 노후의 불안감에 불만을 터뜨린다. 자신과 직접 관련이 없더라도 누구나 분노에 차는 경우가 하늘과 사람(天人)이 함께 화를 낸다(共怒)는 이 성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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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지극히 악한 일을 마주 했거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에 이 표현을 쓴다. 사소한 일에 자주 화를 내는 것은 안 될 일이지만 거악에 대해서는 公憤(공분)해야 마땅하다. 天人共憤(천인공분), 神人共怒(신인공노), 神人共憤(신인공분)도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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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쉬운 뜻으로 된 말이라 예부터 이곳저곳서 사용되었음인지 어디에서부터 유래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재미있게 인용된 부분을 몇 곳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선 ‘楚漢志(초한지)’로 잘 알려진 項羽(항우)와 劉邦(유방)의 흥미진진한 쟁패기는 중국 明(명)나라 때의 鍾惺(종성)이 편찬한 ‘西漢演義(서한연의)’의 번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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楚(초)나라가 최초의 통일국가 秦(진)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 거병한 項梁(항량)에 의해 懷王(회왕)이 옹립됐다. 彭城(팽성)으로 천도한 초회왕은 항우와 유방을 불러 회유하며 말했다. ‘진나라 2세 황제가 지극히 무도하여 하늘과 사람이 모두 분노할 정도이니 기필코 토벌해야 하오(秦二世無道極矣 天人共憤 天人共怒/ 진이세무도극의 천인공분 천인공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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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진나라를 공격해 수도를 먼저 점령한 사람에게 천하를 주겠다고 했다. 유방이 먼저 입성했으나 연전연승하던 항우가 불복하는 바람에 물러섰다가 마지막 垓下(해하) 싸움에서 이겨 황제에 오른 것은 알려진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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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악인 董卓(동탁)이 죽음을 당한 뒤 수하들에 의해 시신이 태워지고 관을 만들 때 벼락이 떨어져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하늘이 노하여 天火(천화)를 내렸고, 사람이 노하여 人火(인화)로 시체를 태웠으니 天人(천인)이 함께 악행을 응징했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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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달은 총기난사 사건으로 세계가 분노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동물 학대 성향 이라고 밝혔습니다. 끊이지 않는 이들의 만행에 지구인 전체의 분노도 필요하지만 근절하는 방안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겠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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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금지가千金之家 – 부잣집 자녀는 죄를 지어도 면할 수 있음

천금지가千金之家 – 부잣집 자녀는 죄를 지어도 면할 수 있음

천금지가(千金之家) – 부잣집 자녀는 죄를 지어도 면할 수 있음

일천 천(十/1) 쇠 금(金/0) 갈 지(丿/3) 집 가(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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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인간이 생활하려면 돈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돈이 악의 근원이라며 돈에 초연한 사람, 또는 멀리 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돈의 위력을 몰라서가 아니라 돈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뜻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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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든 해결할 수 있는 돈의 힘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우리 속담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와 같은 뜻인 錢可通神(전가통신)이다. 요즘은 이보다 더 알려진 것이 有錢無罪 無錢有罪(유전무죄 무전유죄)다.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이 돈만 있으면 있던 죄도 면할 수 있다고 절규한 것이 호응을 받아 성어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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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돈이나 비싼 값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千金(천금)을 가진 집은 그냥 부잣집이란 뜻이다. 이것이 부유한 집의 자식이란 千金之子(천금지자)가 되면 오늘날의 금수저가 된다. 부잣집 아들은 죄를 지어도 벌을 면할 수 있는 것은 고금이 같다. ‘史記(사기)’의 貨殖(화식)열전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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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사마천)은 의리를 지키며 굶어죽은 伯夷叔齊(백이숙제)를 찬미하면서도 부를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을 인정하여 열전 한 곳에 실었다. 재산을 모은 사람을 소개하는 중 이 말이 나온다. ‘내려오는 이야기에 천금을 가진 자의 아들은 저자에서 죽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는 헛된 말이 아니다(諺曰 千金之子 不死於市 此非空言也/ 언왈 천금지자 불사어시 차비공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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越王句踐(월왕구천) 세가에는 구천의 책사였던 范蠡(범려, 蠡는 좀먹을 려)가 陶(도) 지방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다시 등장한다. 큰돈을 벌어 陶朱公(도주공)이 된 범려의 둘째 아들이 살인을 하여 감옥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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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람을 죽였으니 사형이 마땅하지만 천금을 가진 부자의 아들은 저잣거리에서 죽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殺人而死 職也 然吾聞千金之子不死於市/ 살인이사 직야 연오문천금지자불사어시)’하며 황금을 수레에 실어 막내를 보내려 했다. 하지만 장남이 가겠다고 하여 보냈는데 사면의 소문을 듣고 돈의 귀중함을 알았던 맏이가 돈을 쓰지 않아 그만 동생은 시체로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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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해도 깨끗이 써야 지탄을 받지 않는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떵떵거리는 재벌 2, 3세들이나 한 사업이 히트하여 갑자기 누만금을 모은 졸부들의 갑질에 모든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도 이들에게는 돈 외에 보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탄지지간 指之間 - 손가락을 튕길 사이, 아주 짧은 동안

탄지지간 指之間 - 손가락을 튕길 사이, 아주 짧은 동안

탄지지간( 指之間) - 손가락을 튕길 사이, 아주 짧은 동안

탄알 탄(弓/12) 가리킬 지(扌/6) 갈 지(丿/3) 사이 간(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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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빨리 지나간다는 비유로 쓰이는 말은 많다. 흔히 세월이 流水(유수)같다는 말은 흐르는 물같이 빠르다고 光陰似逝水(광음사서수)로 표현한다. 물이 쉼 없이 흐르지만 그렇게 빠르다는 느낌이 없을 때는 쏜살같다면서 쏜 화살에 비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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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게 생활하는 사람, 행복한 나날을 영위하는 사람에겐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새 후딱 지난 세월에 깜짝 놀라는 경우에 적합한 말이다. 石火光陰(석화광음), 如鳥過目(여조과목), 烏飛兎走(오비토주) 등등 유사한 말 중에서도 莊子(장자)에 나오는 白駒過隙(백구과극)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문틈으로 보이는 흰 망아지가 빨리 지나가는 모습에 인생이나 세월의 덧없음, 무상함을 느끼니 차원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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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락을 튕기는(彈指) 사이를 나타내는 이 성어도 아주 짧은 시간, 또는 세월이 아주 빠르다는 것을 표현한다. 탄알 彈(탄)은 쏘다, 튕기다란 뜻도 있다. 의미를 나타내는 활 弓(궁)과 수렵시대 돌 구슬을 가리켰던 홑 單(단)이 합쳐져 彈丸(탄환)이란 뜻도 지녔고 튕기다란 의미로 넓혀지게 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뜻보다는 佛家(불가)에서 비롯된 말로 唐(당)나라 永嘉玄覺(영가현각)이 禪(선)의 핵심을 운문으로 읊었다는 ‘證道歌(증도가)’의 구절이 당연히 뜻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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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분은 이렇다. ‘손가락 튕기는 사이에 팔만 법문 원만히 이루고, 생각이 스치는 짧은 사이에 삼지겁을 없애버리도다(彈指圓成八萬門 刹那滅却三祗劫/ 탄지원성팔만문 찰나멸각삼지겁).’ 인간의 번뇌에 응하는 팔만 법문을 짧은 시간에 행하면 엄청나게 오랜 기간 三祗劫(삼지겁)도 없어져 시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해설에도 아리송하기만 하다. 祗는 공경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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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말하는 짧은 시간 彈指(탄지)가 刹那(찰나)와 함께 아주 작은 수의 단위로도 사용되어 흥미롭다. 割(할) 아래 소수점 이하의 작은 단위로 分厘毛絲(푼리모사)까지는 타율 계산 때 더러 쓰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수로 탄지는 瞬息(순식)의 10분의 1인 10-17승을, 찰나는 탄지의 10분의 1인 10-18승을 나타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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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지가 짧은 시간을 말하건, 무사태평하거나 어떤 일에 정신이 팔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갈수록\xa0경제사정이 나빠진다는 소식만 들려오고, 어려운 나날을 보내는 민초들을 다독여주는 정치권은 여전히 다투기만 하고, 하루하루가 힘든 사람들은 늘기만 하는 느낌이다. 하반기엔 희망이 있을까.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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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위천以食爲天 - 먹는 것을 하늘로 여김

이식위천以食爲天 - 먹는 것을 하늘로 여김

이식위천(以食爲天) - 먹는 것을 하늘로 여김

써 이(人/3) 밥 식(食/0) 하 위(爪/8) 하늘 천(大/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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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세 가지 衣食住(의식주)는 모두 중요하다. 孔子(공자)는 足食(족식)보다 民信(민신)이라며 먹는 것보다 믿음이 중요하다고 했다. 無信不立(무신불립)의 가르침은 정치에 있어서다. 보통 사람에겐 음식이 생명을 영위하는데 필수이므로 첫손에 꼽을 것이다. 그래서 백성이 살아가는데 음식이 가장 소중하다며 먹는 것으로써(以食) 하늘을 삼는다(爲天)는 말까지 나왔다. 食爲民天(식위민천)이란 말도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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司馬遷(사마천)의 ‘史記(사기)’와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 등에 상세히 실려 전한다. 이 말의 주인공은 酈食其(역이기, 酈은 땅이름 역, 食은 밥 식, 먹을 사, 사람이름 이)다. 戰國時代(전국시대)를 통일했던 秦(진)이 폭정으로 쇠락하자 곳곳에서 영웅호걸들이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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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립하던 세력들이 項羽(항우)와 劉邦(유방)의 楚漢(초한)의 대결로 압축됐을 때 역이기는 한나라로 들어가 큰 공을 세웠다. 유방의 휘하로 처음 갈 때 거만하게 발을 씻으며 맞이하는 것을 꾸짖어 선비의 중요성을 일깨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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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가 파죽지세로 주변의 성을 함락하는 기세에 成皐(성고) 땅을 겨우 지키던 유방은 그곳을 포기하려 했다. 그 동쪽의 敖倉(오창)은 곡식창고가 있어 군량미가 풍부했다. 역이기가 간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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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아는 자는 왕업을 성취할 수 있고(知天之天 王事可成/ 지천지천 왕사가성) 왕은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여긴다(王者以民爲天 而民以食爲天/ 왕자이민위천 이민이식위천)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방비를 허술히 하고 있는 오창을 지금 깨뜨려야 한이 천하를 가질 수 있다고 했다. 유방이 훌륭하다며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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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이 하늘임을 내세우듯 방송에 먹는 방송(먹방)이나 요리 방송(쿡방)이 가히 전성시대다. 유명 맛집을 찾아가고 맛을 보는 데서 발전하여 요리와는 멀 것 같은 일반인이 나와 직접 만들거나 전문가 주방장을 뜻하는 셰프가 일러준 레시피(조리법)가 불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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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이 귀하던 시대도 지났고 주방에 얼씬도 않으려는 중년 가장들이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큰 발전이다. 다만 요리쇼의 조리법은 열량이 필요 이상으로 높아 다이어트에 해롭다고 하는 미국 연구가 있다고도 하고 또 너무 보여주기만의 요란한 진행은 하늘로 여기고 있는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 감안할 필요가 있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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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적천석水滴穿石 - 작은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뚫는다.

수적천석水滴穿石 - 작은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뚫는다.

수적천석(水滴穿石) - 작은 물방울이 돌에 구멍을 뚫는다.

물 수(水/0) 물방울 적(氵/11) 뚫을 천(穴/4) 돌 석(石/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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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노력이라도 끈기 있게 계속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격언을 한자 훈음 그대로 옮긴 것이 물방울(水滴)이 돌을 뚫는다(穿石)는 이 말이다. 작은 것이 쌓이면 큰 것이 된다는 속담은 양의 동서에 숱하다. 우리나라에 똑 같이 ‘낙숫물이 댓돌을 뚫는다’가 대표하고 영어속담에도 ‘The drop hollows the stone’이 있으니 신기할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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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이 쉽고 큰 교훈을 줘서인지 모두들 좋아하는 성어가 되어 있다. 몇 개만 더 들어보면 이 난에서도 소개한 愚公移山(우공이산), 中石沒鏃(중석몰촉) 외에 磨斧作針(마부작침), 積小成大(적소성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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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이 쉼 없으면 돌을 뚫는다는 말은 중국 南宋(남송) 때 학자 羅大經(나대경)의 ‘鶴林玉露(학림옥로)’에 실려 전한다. 학문을 하면서 터득한 지식을 기술한 일종의 수필집이다. 독보적인 견해로 피폐한 정치를 질책하기도 하고 시문을 평론하기도 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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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북송) 때 崇陽(숭양) 현령으로 張乖崖(장괴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관아를 순시하다가 창고에서 황급히 도망치려는 하급관리를 적발했다. 족쳐 보니 상투 속에서 엽전 한 닢이 나왔다. 훔친 것이라는 실토를 받자 형리를 시켜 곤장을 치게 했는데 겨우 한 닢 가지고 그런다고 크게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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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화가 난 현령이 大喝一聲(대갈일성) ‘네 이놈! 塵合泰山(진합태산)이란 말도 못 들었느냐? 하루에 일전이면 천일에 천전이고, 먹줄에 튕겨 나무가 끊어지고 물방울에 돌이 뚫린다(一日一錢 千日千錢 繩鋸木斷 水滴穿石/ 일일일전 천일천전 승거목단 수적천석)’라며 처벌했다. 관리의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일벌백계한 것이다. 繩은 노끈 승, 鋸는 톱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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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末(명말)의 洪自誠(홍자성)이 교훈이 되는 對句(대구)를 많이 써 유명한 어록집 ‘菜根譚(채근담)’에도 같은 뜻의 명언이 올려져 있다. 다만 한 글자씩 다르다. ‘새끼줄로 톱질해도 나무가 잘라지며 물방울이 돌을 뚫고, 물이 한곳에 이르러 도랑을 이루며 참외는 익으면 꼭지가 떨어진다(繩鋸材斷 水滴石穿 水到渠成 瓜熟蒂落/ 승거재단 수적석천 수도거성 과숙체락).’ 渠는 개천 거, 蒂는 꼭지 체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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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빨리 성과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성급해 할 것인가? 모든 일에 단계가 있고 기본부터 차근차근 밟아나가야 천리 길을 갈 수 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실적에 애타하는 사람들이 새기면 좋을 말이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탄주지어呑舟之魚 – 배를 삼킬 만환 물고기, 큰 인물의 비유

탄주지어呑舟之魚 – 배를 삼킬 만환 물고기, 큰 인물의 비유

탄주지어(呑舟之魚) – 배를 삼킬 만환 물고기, 큰 인물의 비유

삼킬 탄(口/4) 배 주(舟/0) 갈 지(丿/3) 고기 어(魚/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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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통째로 삼킬 수 있는 물고기라면 대뜸 허풍이나 과장이라 생각한다. 코끼리를 삼킨 고래이거나 아들 개구리에게 황소 크기를 알려 주려고 몸을 부풀다 터져버린 어미 개구리처럼 말이다. 하지만 허풍선이라는 뜻보다 실제 나룻배를 삼키는 물고기가 없는 것처럼 이 말도 針小棒大(침소봉대)한 비유로 큰 인물을 가리켰다. 좋은 의미의 인물이거나 盜跖(도척)과 같이 나쁜 의미의 악인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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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어는 다른 비유와 대비하여 이치를 설명하면서 여러 곳에서 사용됐다. 먼저 중국 道家(도가)의 사상서 ‘列子(열자)’에 등장한다. 이 책은 戰國時代(전국시대)때 전설적 사상가인 열자의 사상과 철학을 문인들이 모은 것인데 楊朱篇(양주편)에 들어 있다. 양주는 자기 혼자만 쾌락하면 좋다는 이기적인 쾌락설을 주장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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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가 梁(양)나라 왕을 만났을 때 작은 것에 신경 쓰지 않아야 큰 나라를 다스리기 쉽다며 말한다. ‘배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는 얕은 개울에서 놀지 않고, 큰 기러기는 높이 날아 더러운 연못에는 내리지 않습니다(吞舟之魚 不游枝流 鴻鵠高飛 不集汙池/ 탄주지어 불유지류 홍곡고비 부집오지).’ 汙는 더러울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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老子(노자)의 제자 庚桑楚(경상초)가 한 말이 ‘莊子(장자)’의 雜篇(잡편)에 실려 있다. 수레를 삼켜버릴 큰 짐승도 산을 내려오면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고, ‘배를 삼킬만한 큰 물고기도 휩쓸려 물을 잃으면 개미도 괴롭힐 수 있다(吞舟之魚 碭而失水 則蟻能苦之/ 탄주지어 탕이실수 즉의능고지)’면서 몸을 온전히 간직하려면 깊은 곳이나 먼 곳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碭은 넘칠 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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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漢(전한)의 淮南王(회남왕) 劉安(유안)이 쓴 ‘淮南子(회남자)’에도 나온다. ‘배를 삼킬 큰 물고기라도 함부로 움직이다 물을 잃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에 당하는 것이 그 거처를 떠났기 때문이다(吞舟之魚 蕩而失水 則制於螻蟻 離其居也/ 탄주지어 탕이실수 즉제어루의 리기거야).’ 主術訓(주술훈)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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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다. 큰 인물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면이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 나쁜 환경에 휩쓸리면 망치기도 쉽다. 무엇보다 자신을 부지런히 닦아야 하고, 악에 물들지 않도록 주변의 각별한 신경도 필요하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견문발검見蚊拔劍 - 모기 보고 칼을 빼다.

견문발검見蚊拔劍 - 모기 보고 칼을 빼다.

견문발검(見蚊拔劍) - 모기 보고 칼을 빼다.

볼 견(見/0) 모기 문(虫/4) 뽑을 발(扌/5) 칼 검(刂/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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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기란 미물이 끼치는 해독은 끔찍하다. 불을 끄고 잠을 청하면 어김없이 찾아와 앵앵거린다. 불면의 고통을 주는 것도 모자라 피를 포식하며 전염병을 퍼뜨린다. 말라리아나 일본뇌염에다 최근엔 지카 바이러스까지 옮겨 小頭症(소두증)을 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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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찮은 모기를 보고서(見蚊) 쫓기 위해 칼을 뺀다면(拔劍) 잡지도 못하면서 어리석다고 비웃음을 산다. 칼 刀(도)보다 더 큰 劍(검)을 휘두르니 풍차를 보고서 창으로 공격하는 돈키호테의 꼴이다. 여기에서 보잘것없는 작은 일에 지나치게 거창한 계획을 세우거나 사소한 일에도 화를 벌컥 내는 소견이 좁은 사람을 가리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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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선 같은 뜻으로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割鷄焉用牛刀/ 할계언용우도)?‘란 孔子(공자)의 말에서 나온 牛刀割鷄(우도할계, <313>회)란 성어를 쓴다. ’論語(논어)‘의 陽貨(양화)편에 있는 이야기다. 모기와 칼 이야기는 ‘도끼 들고 나물 캐러 간다’나 ‘쥐구멍 막자고 대들보 들이민다’ 등 같은 뜻으로 쓰이는 속담에서 비롯돼 조선 후기의 학자 趙在三(조재삼)의 ‘松南雜識(송남잡지)’에 실려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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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빼어 모기 잡는다는 직접적인 표현은 없다 뿐이지 옛날 문장가들도 어지간히 모기에 시달린 모양이다. 唐(당)나라 시인 劉禹錫(유우석)은 ‘내 몸은 일곱 자 너는 티끌 같은 것, 나는 혼자 너는 떼거리 나를 상처 내네, 하늘이 낸 것 어쩔 수 없어, 너 때문에 장막을 치고 상위에 숨는다(我軀七尺爾如芒 我孤爾衆能我傷 天生有時不可遏 爲爾設幄潛匡床/ 아구칠척이여망 아고이중능아상 천생유시불가알 위이설악잠광상)’고 노래한다. 遏은 막을 알, 幄은 장막 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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茶山(다산)은 ‘얄미운 모기(憎蚊/ 증문)’에서 잠을 못 이루게 하는 모기가 맹호보다 무섭다고 진저리친다. ‘맹호가 울 밑에서 으르렁대도, 나는 코 골며 잠잘 수 있고(猛虎咆籬根 我能齁齁眠/ 맹호포리근 아능후후면), 긴 뱀이 처마 끝에 걸렸어도, 누운 채 꿈틀대는 꼴 볼 수 있지만(脩蛇掛屋角 且臥看蜿蜒/ 수사괘옥각 차와간완연), 모기 한 마리 왱 하고 귓가를 울리면, 기가 질려 속이 타고 간담이 서늘하단다(一蚊譻然聲到耳 氣怯膽落腸內煎/ 일문앵연성도이 기겁담락장내전).’ 齁는 코고는소리 후, 脩는 길 수, 蜿는 꿈틀거릴 완, 蜒은 구불구불할 연, 譻은 새 지저귈 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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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좋은 면으로 본 말로 모기나 등에 같은 작은 벌레들이 소나 양을 물어 달리게 한다는 蚊蝱走牛羊(문맹주우양, 蝱은 등에 맹)는 말이 있고, 노부모에게 벼룩이나 모기를 물지 않도록 자식이 한방에서 자는 蚤蚊孝道(조문효도, 蚤는 벼룩 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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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장마가 한창인데 모기가 더욱 극성을 부려 성가시게 한다. 그렇다고 칼로 없애지 못하는 만큼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민감하지 않은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서민경제가 바닥이어선지 정서도 메말라가고 여유가 없을수록 작은 일에 치우치지 않아야겠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구약현하口若懸河 - 말을 폭포물이 흐르듯 잘하다.

구약현하口若懸河 - 말을 폭포물이 흐르듯 잘하다.

구약현하(口若懸河) - 말을 폭포물이 흐르듯 잘하다.

입 구(口-0)같을 약(艹-5)달 현(心-16) 물 하(氵-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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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조심하라는 성어를 그동안 이 난에서 많이 소개했다. 말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口禍之門/구화지문)을 비롯해 禍生於口(화생어구)까지 비슷한 의미를 가졌지만 출전을 달리 하는 말들이다. 아무리 침묵은 금이라고 주의를 주고 현명한 사람에게는 한 마디 말로 충분하다고 강조해도, 웅변의 재능을 신의 선물이라 말하는 사람이 있는 만큼 말을 잘 하는 사람은 부러움을 산다. 말을 잘 하여 마치(口若) 바위에서 떨어지는 폭포와 같다(懸河)고 찬탄한다. 썩 잘하는 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靑山流水(청산유수)보다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니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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口如懸河(구여현하), 懸河之辯(현하지변) 등으로도 쓰는 이 성어는 西晉(서진)의 학자 郭象(곽상)을 칭찬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무슨 일이든지 깊이 생각하여 사리를 깨쳤다. 자라서는 老莊(노장)사상에 심취하여 다른 사람들과 토론하기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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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학문 연구에 뜻을 두어 사양하다 黃門侍郞(황문시랑)이란 관직을 받고 나아가서도 매사를 이치에 맞게 잘 처리했다. 국정을 논할 때마다 곽상의 말이 논리가 정연하고 말재주도 뛰어난 것을 지켜보던 당대의 명사 王衍(왕연)은 이렇게 칭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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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의 말을 듣고 있으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거침없이 흘러내려 그치지 않는 것과 같다(聽象語 如懸河瀉水 注而不竭/ 청상어 여현하사수 주이불갈)." 唐太宗(당태종)때 房玄齡(방현령) 등이 편찬한 "晉書(진서)" 곽상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상에는 말 잘하는 사람이 많다. 부럽기도 하지만 반면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 성어는 때로는 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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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묵자흑近墨者黑 -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

근묵자흑(近墨者黑) -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

가까울 근(辶/4) 먹 묵(土/12) 놈 자(耂/5) 검을 흑(黑/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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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먹을 가까이 하면(近墨) 묻힐 수밖에 없으니 자신도 검어진다(者黑).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쉬움을 조심하라고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람의 성격이나 능력은 주변의 환경이나 친구에 의해 많이 좌우된다는 것을 깨우치는 말은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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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시세보다 10배나 되는 집을 샀다는 百萬買宅 千萬買隣(백만매택 천만매린)은 훌륭한 이웃을 찾아서였고 孟子(맹자) 어머니가 세 번이나 이사한 三遷之敎(삼천지교)는 아들의 좋은 교육환경을 위한 것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몇 가지만 더 같은 성어를 소개하면 南橘北枳(남귤북지), 蓬生麻中(봉생마중), 染絲之變(염사지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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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먹에 비유한 말보다 앞서 붉은 朱沙(주사)를 가까이 하면 자신도 붉어진다는 近朱者赤(근주자적)이 먼저 나온다. 주사는 진한 붉은 색의 수은으로 된 광물이라는데 도장 찍는 印朱(인주)의 원료다. 중국 西晉(서진) 때의 학자이자 문인이었던 傅玄(부현, 217~278)의 ‘太子少傅箴(태자소부잠)’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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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와 나무는 일정한 형상이 없어 틀에 따라 모나게도 되고 둥글게도 되는데 틀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면서 이어 말한다. ‘붉은 주사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붉은 물이 들고,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은 물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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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조화로우면 음향도 청아하며 몸이 단정하면 그림자 역시 곧다(近朱者赤 近墨者黑 聲和則響淸 形正則影直/ 근주자적 근묵자흑 성화즉향청 형정즉영직).’ 앞의 두 구절을 간략히 줄여 近朱近墨(근주근묵)이라고도 하고 近朱必赤 近墨必緇(근주필적 근묵필치)라 쓰인 곳도 있다. 緇는 검을 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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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秋適(추적)의 明心寶鑑(명심보감)과 달리 明(명)나라의 范立本(범립본)이 편찬한 ‘명심보감’에 姜太公(강태공)이 말한 것이라며 더 많은 대구가 있다. 近朱者赤 近墨者黑 뒤로 따르는 것은 이렇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밝아지고, 재능 있는 이를 가까이하면 슬기로워진다. 우매한 자를 가까이하면 어리석어지고, 착한 이를 옆에 두면 덕성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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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현명해지고, 어리석은 자를 옆에 두면 암매해진다. 말만 번지르르한 자를 가까이하면 아첨에 능해지고, 탐욕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도둑이 된다(近賢者明 近才者智 近癡者愚 近良者德 近智者賢 近愚者暗 近佞者諂 近偸者賊/ 근현자명 근재자지 근치자우 근량자덕 근지자현 근우자암 근녕자첨 근투자적).’ 佞은 아첨할 녕, 諂은 아첨할 첨, 偸는 훔칠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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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모나고 둥근 그릇에 따라 달라지고, 사람은 착하고 악한 친구에 의해 달라진다’란 말이 있다. 한자 명구로는 水隨方圓之器 人依善惡之友(수수방원지기 인의선악지우)다. 나쁜 곳에 발을 디디지 않는 것이 최상이지만 주변 환경에 따라 어쩔 수없이 변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 지레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작은 힘이라도 잘못된 것은 고쳐나갈 것인가는 의지에 달렸다. / 제공 : 안병화(前언론인, 한국어문한자회)